187화
“독함곡(毒陷谷)의 소행이었습니다.”
“독함곡이요? 유령신검의 수제자를 죽였을 정도면, 꽤 대단한 고수들일 텐데. 저는 처음 들어 봅니다.”
“새외에서 온 놈들이니까요.”
“새외요?”
“네, 그렇습니다. 독함곡은 수백 년 전 중원 무림에서 죄를 짓고 남월국으로 도망친 독공의 고수들이 남월국의 밀림 전사들과 결합하며 만든 세력입니다. 중원과 남월국 사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중원을 넘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 그래서 제가 이들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저도 오래전 황궁의 기밀문서에서 본 기억을 어렵게 떠올려 이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 역시 금의위 출신이시군요.”
“보시겠습니까?”
“저들……이에요?”
내가 시선을 돌렸다.
스무여 명의 고수들, 제대로 된 고수들이다.
그들이 여덟 명의 사내들을 포승줄로 단단히 포박해 있었다.
“데리고 오너라.”
“네!”
포승줄에 묶인 여덟 명이 끌려왔다.
그들만이 아니다.
다른 고수들이 수레 한 대를 끌고 왔는데, 수레 위에는 기이하게 생긴 물건들이 가득했다.
기관과 함정에 쓰이는 병장기와 암기.
그리고 기이한 향과 색의 독들이다.
여송위는 흉수보다 먼저 병기와 암기 그리고 독에 관한 설명을 했다.
“병기와 암기, 모두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이 독들. 남월국에서만 생존하고 자라는 독사와 독거미 그리고 독초들의 독을 융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는 독함곡의 독문독(獨門毒)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증거를 찾으셨군요.”
“네. 거기에 더해, 이 독에 중독되어 죽은 자는 무지개색의 혈맥이 피부 위로 툭 두드러져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미 저희 측에서 칠흑야검의 시체를 수소문한 결과 정확히 그 현상이 일치하였습니다.”
“이 증거를 제시하면, 그 어떤 이견도 없겠습니다.”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들.”
여적위가 포승줄에 묶인 흉수들을 가리켰다.
하나같이 퉁퉁 부은 얼굴에 피투성이다.
엄청나게 두들겨 맞은 모양이다.
“중원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자는 두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고문 중 죽었고, 이제는 한 명만이 중원 언어를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남월국 언어 외에는 할 줄 아는 언어가 없습니다.”
“자신이 한 일도 실토했나요?”
“네.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결국 모두 자백했습니다.”
번거롭다는 건, 아마도 고문하는 일을 말하는 것 같다.
“누가 시킨 것인가요?”
“그게, 저희도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하지만 칠흑야검을 죽여 달라고 의뢰한 자가, 누군지 모르더군요.”
“왜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월국 언어도 유창하게 하여 그가 의뢰한 일이 중원의 일이 아니었다면, 남월국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복면을 써서 얼굴도 볼 수 없었고요. 무엇보다 그가 제시한 의뢰금이 너무나 엄청나서, 의뢰인의 신분을 감히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의뢰를 철회할까 봐 그랬답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주었기에 그랬다고 하나요?”
“황금 일백 냥, 비단 한 수레, 차와 약재 다섯 수레, 상품의 병장기 네 수레, 마지막으로 중원의 지도를 의뢰비로 제시했다고 하는군요.”
“나라까지 팔아먹은 놈들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후 우리는 사건에 대해 조금 더 대화를 이어갔다.
현재 상태와 아미파를 지원하기 위해 처선이 부른 문파들에 관한 설명도 들었다.
아! 처호와 공손병은 고문 전문가를 설득 중이라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아무튼 전생에서는 선도연가와 몽중방 단 두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두 문파 외에도 세 곳이 더 아미파를 돕기 위해 팔적산 인근에 매복하고 있다고 한다.
천검문, 숭무문, 동산파로 다섯 개의 문파를 모두 합치면 그 무인의 수가 일천오백 명에 달한다고.
내가 미리 이번 일에 대해 처호, 처선에게 말해줬기에, 이들이 전생보다 더 철저하게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이들 다섯 개 문파가 이미 나를 주군으로 모시기를 맹세하였다고 한다.
내게 충성 맹세를 한 문파는 이곳 다섯 개가 전부가 아니다.
이들 다섯 문파는 팔적산에서 가깝고, 은밀히 이곳까지 이동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아미파와 황룡회가 충돌했을 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힘을 지닌 문파만 선별했기에 다섯 문파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이유는.
새로 가세한 세 문파도, 선도연가와 몽중방의 사연과 비슷하다.
모두 무림맹과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눈에 벗어나 오랜 시간 핍박당한 곳이라 한다.
또 사파란 이유 하나만으로 웅크리고 숨죽여 평생을 살았던 이들이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군, 그들이 주군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자신들의 명운마저 내게 걸어 버린 것이다.
기쁘면서도 막중한 책임감이 내 어깨에 올려지는 순간이었다.
“갑시다, 팔적산으로.”
“존명!”
*
처선에게 설명은 들었지만, 팔적산 현장에 도착한 나는 두 가지 부분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그 규모다.
팔적산 기슭, 수백 개의 막사가 설치되어 있다.
황룡회의 무인 이천 명가량이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
황룡회를 이끄는 이는 일장로 수림야귀(樹林夜鬼) 견노량으로, 그의 무공 경지에 대해서는 천하에 알려진 바가 극히 적다.
거기에 황룡회의 이장로란 자도 와 있다고 하고, 양대호법 중 우호법인 번충쌍노(飜衝雙老)란 원로 고수까지 그곳에 있다고 하였다.
반대편에도 수백 개의 막사가 설치돼 있다.
아미파의 막사들이다.
일천일백 명의 아미파 제자들이 그곳에 주둔하고 있고, 아마파에서는 장문인 심전 사태가 일장로, 이장로, 사장로를 이끌고 왔다.
그 두 세력만이 아니다.
눈엣가시 같은 무림맹도 두 진영의 측면 중간 지점에 일백 수십여 개의 막사를 지어 주둔 중이다.
무림맹에서는 무림맹 최강 무력대라는 청룡검무대와 백호백도대 등을 포함하여 팔백여 명의 무인을 이끌고 왔다.
이들을 이끄는 수장은, 현뇌전(賢腦殿)의 부전주 사의팔통(思意八通) 방백이란 자다.
사의팔통 방맥은 무림맹 현뇌전의 전주인 천뇌사(天腦師) 제갈세축의 오른팔이라 알려진 자다.
그리고 제갈세축은 다시 무림맹의 군사이며 무림맹주의 두뇌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자다.
무엇보다, 우리가 죽인 제갈세가의 제갈세진과 사촌 관계다.
표면상으로 무림맹은, 황룡회와 아미파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한마디로 황룡회는 봉화 사니와 봉화 사니의 두 제자가 있는 팔적산을 철통같이 포위한 상태고.
아미파는 이을 뚫고 봉화 사니를 구출하려는 형세.
그리고 무림맹은 두 세력의 충돌을 막으려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아무튼 이 어마어마한 규모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놀란 두 번째는.
이 엄청난 사람들과 고수들이 있음에도, 그 분위기가 너무 평화롭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충돌도 없었던 듯, 대지마저 깔끔하다.
대치하고 있는 황룡회와 아미파 진영에서도 부상자나 흉흉한 분위기의 무인들은 볼 수 없었고 말이다.
뭐지?
이 평화로운 분위기는?
일단 아미파 사람들을 만나 봐야겠다.
“이곳은 아미파의 진영입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 엇?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님 아니십니까?”
아미파 진영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제자가 나를 알아봤다.
덕분에 우리는 수월하게 아미파 수뇌부 막사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
“나무아미타불. 마 도사님! 여긴 어떻게?”
나와 의제, 한해북, 그리고 왕대까지.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반겨 주었다.
꽤 놀란 얼굴들이다.
장문인 심전 사태와 장로들 그리고 무림맹으로 파견했던 아미장로까지 이곳에 와 있었다.
아미장로 말에 따르면, 이번 일을 중재하기 위해 무림맹 화산장로와 종남장로까지 현재 무림맹 진영에 와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내 방문에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반겨 주었고, 우린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때.
-어떻게 된 거야, 오빠?
예지다.
예지도 당당히 막사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이로는 아직 어리지만, 아미파에서도 예지의 무위를 크게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예지는 나와 함께 들어온 왕대를 보며,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그렇게 놀라 전음으로 물은 것이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우선 이번 일부터 처리하자.
-위험하지는 않은 거야?
-응.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았어, 오빠.
내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심전 사태가 친히 지금까지의 상황과 논의 중이던 안건들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며칠 동안 계속 담판을 이어 가는 중이네.”
“계속 팔적산에 갇혀 있는 봉화 사매와 두 사질을 풀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황룡회에서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네.”
“몇 번이고 무력 충돌의 위기가 있었으나, 다행히 직접적으로 부딪혔던 적은 없다네.”
“무림맹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네. 은근히 황룡회 측에, 최악의 경우가 닥치면 우리 아미와 함께 싸울 뜻을 내비치었네. 물론 황룡회에서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지만 말이야.”
대충 요약하면 이런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무림맹의 도움?
사실 이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일 또한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원곡과 함께 귀정사에 잡혀 있는 제갈가단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고 나 역시 조금은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 제갈가단의 말에 따르면, 맹주와 천수신권이 꿈꾸는 무림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중심이 되는 무림이다.
그런데 만약 이곳에서 아미와 황룡회가 충돌하게 된다면, 그 일은 커다란 전쟁으로 번져 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랜 세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온 아미파를 돕기 위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가만있지 못할 것이다.
황룡회는 유령신검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화경의 고수 한 명의 힘은 무림에서 절대적이다.
최소한, 그가 작정하고 살수를 펼친다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몇 곳은 수십 년 동안 재기하기 힘든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뜻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타격은 무림맹주와 천수신권 입장에서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닐 터.
무엇보다 이번 일의 핵심은 황룡회와 아미파가 아니다.
팔적산에서 유령신검의 수제자가 죽은 일은, 오롯이 나와 왕대를 죽이기 위한 위장일 뿐이다.
당연히 무림맹에서 이들 사이에 진짜 전쟁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고, 이는 역시나 제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뭐, 최악의 상황도 가정했으리라.
그러니 심전 사태의 말마따나, 최악의 경우 무림맹이 아미파를 도와 황룡회에 큰 타격을 입히려 하는 것이고.
이는 또 하나의 가설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 무림맹주 입장에서는 아미파까지 버릴 수 있는 패라는 뜻이다.
무림맹이 돕기는 돕지만, 어차피 전면전은 아미파에서 치르게 될 것이다.
이는 아미파의 엄청난 손실,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아미파와 황룡회를 동귀어진시켜, 아미파를 버리는 패로 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나나 아미삼검 그리고 무당파의 송암 도장이 걱정했던 그 일.
아미파와 무당파에 무림맹주나 천수신권과 내통하는 간자가 있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그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아미파에 간자가 있고, 이미 아미파가 그 간자를 통해 무림맹주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아미파를 버리는 패로 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설명이 길었지만, 사건의 해결은 간단하다.
어차피 흉수는 봉화 사니가 아니고, 이곳에서 싸움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는 것.
이런 내막을 모두 알고 있다면, 이번 일은 손바닥을 뒤집듯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황룡회와 다음 담판은 언제 있을 예정입니까?”
“정확히 한 시진 뒤라네.”
“허락해 주시면, 제가 그들과 담판을 지어 보겠습니다.”
“마 도사, 뭔가…… 준비한 게 있나 보군?”
“네, 심전 사태. 믿고 맡겨 주십시오.”
우리 예지 앞에서, 아니 천하가 모두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간만에 멋진 모습 좀 보여 줘야겠다.
내가 바로 마악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