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퍽퍽퍽!
“그만! 왕대야, 그만.”
나와 의제, 한해북 거기에 구양봉막까지.
뜨거운 태양을 피해 아름드리나무 그늘에 앉아서 한참이나 왕대의 폭행을 보고만 있었다.
확실히 미쳐도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맞긴 한 모양이다.
여아를 인질로 잡아 죽이려 했던 괴인은 죽지도 못하고 또 기절도 못 하며 한 시진째 왕대의 폭행을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는 중이다.
“왕대야, 그만하고 잠시 쉬어. 놈도 체력을 회복해야 더 오래 때릴 수 있다고.”
내가 재차 말하자 왕대의 발길질이 멈췄다.
하지만 왕대는 쓰러져 있는 괴인을 계속 선 채로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왕대야, 너도 이리 와서 잠깐 앉아. 좀 쉬라고.”
녀석, 말을 잘 듣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우리가 나란히 앉아 있는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와 앉았다.
여전히 시선은 괴인이 도망갈세라 그에게 꽂혀 있었다.
내가 슬쩍 왕대 옆으로 다가갔다.
“재밌어?”
끄덕.
“조금 있다가 더 혼내 주자.”
끄덕끄덕.
말은 안 하지만, 그래도 답은 잘한다.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까지 뚝 그친 상태다.
표정의 변화가 시각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내 느낌에 지금 왕대의 기분이 꽤 좋은 것 같다.
“아까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어린아이 괴롭히는 나쁜 사람만 때린다는 약속.”
끄덕끄덕.
“착한 사람은 절대 때리면 안 돼.”
끄덕끄덕.
“그런데 가끔, 어린아이를 위해서 혼내는 어른도 있어. 그건 괴롭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바르고 훌륭하게 자라라고 가르침을 주는 거야. 그런 사람도 때리면 안 돼. 그 사람들은 진심으로 어린아이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니까. 알았어?”
이번엔 반응이 없다.
그러더니 처음으로 괴인에게서 시선을 떼어서 나를 본다.
갸우뚱.
이해하기 힘들다는, 어떻게 그걸 판별할 수 있는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일단, 나에게 먼저 물어봐. 아까 구양봉막 아저씨한테 들었지? 내가 현화문이라는 도문의 도사라고.”
끄덕끄덕.
“신통력까지 갖춘 꽤 고절한 도사야.”
끄덕.
“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곧바로 구별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누굴 때리고 싶다면 먼저 나한테 물어보고, 내가 때려도 된다고 하면 그때 때려. 쉽지?”
잠시 고민한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런 후.
끄덕끄덕.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는 왕대다.
작은 사부 말이 맞았다.
조금 걱정하긴 했는데, 확실히 쉽다.
주화입마 때문에 단순한 건지, 아니면 구양봉막의 말처럼 원래 머리가 안 좋아 단순한 건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 말을 따르게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날 왕대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괴인을 지르밟아 주었다.
어린아이를 죽이려 했던, 아니 죽였던 악인의 최후는 그렇게 끝났다.
“감시하던 자들 일곱 명 모두 깨끗이 제거한 후 시체까지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신살왕님. 구양봉막은요?”
“특급 살수 한 명과 일급 살수 두 명을 붙여 말씀하신 귀정사로 보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신살왕님.”
“은혜야 제가 지지 않았겠습니까? 마 도사님 덕분에 살왕이란 이름도 얻었고, 황금 일백 냥까지 주시고. 받은 돈과 은혜에 비해 너무 수월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여, 감사하면서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혹 언제라도 손이 필요하시면 연락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신살왕과 살수들이 떠났다.
정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일 처리였다.
구양봉막을 귀정사로 보낸 이유는 왕대의 치료법, 더 정확히는 아수라혈천신공의 부작용에 대한 치유법을 찾기 위함이다.
작은 사부와 이미 말은 끝내 놨고.
구양봉막을 설득하는 일은 너무 쉬웠다.
“미친! 이봐, 광마.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진짜라니까.”
“됐다. 그냥 날 죽여라.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네게 복수할 것이다.”
“아! 이 양반이 정말 속고만 살았나. 진짜라니까.”
“퉤! 세상천지에 천마신교의 교주보다 강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는 것이냐! 왕대의 싸움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라면 그냥 날 지금 죽여라!”
“내 사부님이시다.”
“사, 사부? 네 사부?”
“그렇다. 그것도 큰 사부님도 아니고 작은 사부님.”
“너보다 강하냐?”
“당연히 나보다 강하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 봐야 뭐, 거기서 거기겠지.”
“소림사 출신이시다.”
“소림사?”
“그래. 그리고 나보다 강하다고 한 건,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작은 사부님께서 내 나이대에 지금의 나보다 강하셨다고 말하는 거야.”
“미친. 그런 말도 안 되는…….”
“네가 그랬지? 아수라혈천신공을 훔쳐 마교 밖을 나서기 전까지, 마교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그, 그랬지. 근데 그건 왜?”
“네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천하는 넓고 마교주보다 강한 고수들이 많은 건 아니지만 분명 존재해. 내 큰 사부님이나 작은 사부님이 대표적인 예고.”
“…….”
“마교가 왜 중원을 넘보지 못하겠어? 네 말대로라면 마교주 혼자서 천하를 다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어험. 뭐, 신교에도 다 신교만의 사정이 있어서…….”
“가서 확인해 봐. 내가 말한 대로 작은 사부님한테 아수라혈천신공의 구결을 알려 줘. 작은 사부님이 당장에 그 파훼법을 네게 읊어 줄 테니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교주님께서도 하지 못하시는 일이다.”
“그러니까 가서 확인해 보라니까. 우리 작은 사부님이 하는지 못하는지.”
“정말…… 정말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이라면 뭐?”
“어험, 그냥 놀랄 것 같다고, 많이. 왕대의 활약을 보는 것보다 더 많이 놀랄 일임엔 분명해 보이는군. 어쩌면 천하제일인을 만나게 되는 일일지도 모르니.”
그렇게 구양봉막은 순순히 귀정사로 갔다.
아니, 순순히 가는 게 아니라 상당히 들뜬 얼굴로 떠났다.
이미 한 번 봤던 왕대의 아수라혈천신공을 다시 보는 것보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당대의 천하제일인일지 모를 작은 사부를 만나는 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가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최소한 뼛속까지 무인의 피가 흐르는 구양봉막에게는 그러할 것이다.
사실 지금 상태의 왕대는 꽤 괜찮다.
아니, 매우 훌륭하다.
눈을 좀 팔게 하여 폭주를 막으려 했을 뿐인데, 벌써 어느 정도 마음의 치유가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아수라혈천신공의 부작용 치유법을 반드시 찾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구양봉막을 죽일 수도 없고 데리고 다닐 수도 없어서 귀정사로 보낸 것이다.
원곡이 갇혀 있는 동굴 옆에 빈방이 많다고.
뭐, 빈방이 아니라 귀정사의 빈객소에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건 구양봉막이 얼마나 작은 사부의 비위를 맞추느냐에 달렸다.
작은 사부가 나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사람이지만, 남들에게까지 모두 그런 건 아니니 말이다.
*
구양봉막이 떠난 그날 오후.
염우촌에는 나와 의제, 한해북 그리고 왕대만이 남았다.
왕대는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와 석 장에서 댓 장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냥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짐 정리 다 했어?”
“네, 형님.”
“뭐, 챙길 것도 없습니다, 마 형. 작은 봇짐 하나뿐인데요.”
“그렇지요. 그럼 이제 떠나면 되겠군. 잠시만요.”
나는 의제와 한해북을 뒤로하고, 왕대 쪽을 향해 한두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댓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왕대는 살짝 놀란 얼굴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 짐짓 모른 척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봐, 왕대.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어. 짧은 만남이었지만 재밌었어. 어린아이 괴롭히는 나쁜 놈도 같이 혼내 주고. 우리 갈 테니까, 왕대 너도 잘 살아. 잘 있으라고. 안녕!”
난 왕대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며 작별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왕대야, 잘 살아!”
“잘 있어라, 왕대야!”
의제와 한해북까지 왕대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 준 후 내 뒤를 따랐다.
우리 예지가 있는 섬서 팔적산을 향해 떠난 것이다.
*
-형님, 왕대 저 녀석 계속 따라오는데요?
-모른 척해.
-네, 형님.
-마 형, 그나저나 속도를 좀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예지가 지금 팔적산에서 어떤 고초를 당하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한 형 말이 맞소.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속도를 좀 낼 생각이었어요. 의제, 한 형. 죽을힘을 다해 따라오세요.
-네? 그게 무슨…… 마 형!
-형님! 같이 가요!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니, 전속력에서 살짝 힘을 빼 달렸다.
의제와 한해북이 극한의 힘을 쏟아야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속도다.
산이고 들이고 강이고를 가르지 않고 그렇게 밤새도록 달렸다.
아침이 되도 달렸고, 밤이 되도 달렸다.
내가 신법을 멈춘 건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어느 마을의 입구에서였다.
의제와 한해북은 땀을 소나기처럼 쏟아대며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그 뒤, 정확히 다섯 장 거리.
의제와 한해북과는 달리, 너무나 멀쩡한 모습의 왕대가 그 자리에 있었다.
숨까지 고른 것을 보니, 제대로 힘조차 쓰지 않고 쉽게 우리를 그리 따라온 모양이다.
이미 섬서의 경계는 넘어섰고.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싸움을 하려고 해도 배가 든든해야 잘 싸울 수 있으니 말이다.
난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작은 마을 규모에 비해 제법 괜찮은 객잔으로 들어갔다.
의제와 한해북은 입에서 단내를 풀풀 풍기며 죽을 둥 살 둥 힘겹게 내 뒤를 따라 들어왔고.
왕대는…… 객잔 밖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한다.
난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렇게 주문까지 다 마쳤다.
의제와 한해북은 여전히 죽을상이었고.
난 잠시 상념에 잠겼다.
왕대와 싸울 수는 없다.
그냥 솔직히, 싸우면 죽을 것 같기 때문인 게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왕대와 싸우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보고 광마일기에 기록했던 왕대에 대한 나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왕대는 순수하고 착하다.
그가 혈겁을 일으킨 건, 세상이 그를 그리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왕대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은 그렇다.
그래서 그와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문제는 어떻게 내 초절정 극상의 경지를 찾느냐는 것이다.
싸워야 하나? 답은 그것밖에 없나?
아니다.
지난 생에 왕대와 싸웠지만, 난 초절정 극상의 경지를 되찾지 못했다.
싸움이 답이 아니란 소리다.
그럼 무엇일까?
도대체,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어 너무 답답했다.
그렇게 내가 잠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이미 우리 식탁 위에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어제 아침 식사를 한 후 지금까지 한 끼도 먹지 못해 일부러 과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형님?”
“어, 그래. 먹자.”
내가 젓가락을 들자, 이제는 조금이나마 사람 낯빛이 돌아온 의제와 한해북이 침을 질질 흘리며 음식 먹을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내가 젓가락을 다시 식탁 위에 돌려놓자, 둘 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날 원망하는 눈으로 보는 듯했다.
깔끔하게 무시하고.
난 여전히 객잔 밖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왕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눈빛이 닿자, 왕대가 움찔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는가?
뭐가 어떻게 됐든, 녀석도 엄청 배가 고플 텐데 밥부터 먹여야겠다.
“이봐, 왕대!”
내가 큰 목소리로 부르자 왕대가 다시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그런 그에게 내가 큰 동작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들어와. 밥 먹어.”
왕대가 다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주저하면서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다시 내가 그에게 말했다.
“밥 먹어. 밥을 먹어야 또 달리지. 어린아이 괴롭히는 놈 혼내 주러 가는데, 밥을 안 먹으면 힘이 없어서 혼내 줄 수 없다고. 그러니까 어린아이 괴롭히는 놈들 우리랑 같이 혼내 주려면, 어서 와서 밥 먹어.”
왕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젓가락을 들어 음식들을 내 입으로 쑤셔 넣었다.
곧바로 의제와 한해북이 번개보다 더 빠른 젓가락질을 시전했다.
“우걱우걱. 맛있다. 여기 음식 맛이 꽤 괜찮네요. 우걱우걱. 이봐, 왕대. 형님 얘기 못 들었어? 우걱우걱. 내가 다 먹기 전에 어서 와서 먹어. 우걱우걱. 아이고, 맛있다.”
“우걱우걱. 그래, 왕대야. 이거 고기볶음 진짜 맛있다. 우걱우걱.”
의제와 한해북이 입안 가득 음식들을 쏟아부으며 왕대를 향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런 후 우리 셋 모두 왕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음식 먹기에 바빴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의제, 한해북 우리 셋 모두 똑똑히 느꼈고 눈까지 마주쳤다.
왕대가, 드디어 한 발 한 발 걸어 객잔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우리 식탁 바로 앞까지 다가왔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또 고개까지 숙인다.
그러더니 두 손을 모아 우리를 향해 내밀었다.
마치 거지가 구걸을 하는 딱 그 모양새였다.
아니, 주인에게 밥을 구하는 노예의 그 모습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찢어질 듯 정말 아팠다.
“일어나.”
식탁 위에 젓가락을 올려놓고, 왕대에게 그리 말했다.
“일어나, 왕대.”
왕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푹 숙인 고개 아래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뿐이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대의 가지런히 모은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예전엔 밥 먹을 때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울컥한 마음에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하던 말까지 멈춘 후 터지려는 울음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우리랑 밥 먹을 때는, 이렇게 나란히 함께 앉아서. 하하 호호 웃으며 먹는 거야. 누구 눈치도 보지 말고, 마음껏 배불리 그렇게 먹으면 돼. 그러니까 일어나서 내 옆에 앉아.”
내 옆자리에 앉은 왕대.
그의 흐느낌이 이제는 격한 울음으로 커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