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182화 (182/245)

182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이상한 동굴에서 깨어났다.

광마일기를 읽고 문신들을 확인했다.

내 몸에 다섯 개의 새로운 글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신살왕습왕(新殺王襲王), 신살왕이 왕대를 습격하다.

*

사부에게 삼재검법을 가르치…… 비정검사 오화서를 죽였다.

살왕이 세운 계책은 완벽했다.

지난 생과 똑같이 살왕 후배 살수들의 근거지인 표현객잔에서 그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아무래도 새외가 안전하겠지.”

“기왕 가실 거면 고려로 가세요. 백두산 기슭에 마을이 여러 개 있는데, 백두산 산신령이 그 일대를 모두 보호해 줘요.”

“산신령? 허허. 자네가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는가? 뭐, 고려해 보지. 고려도 좋고, 서장도 좋고, 몽고도 좋고. 어디든 국숫집 하나 할 자리 없겠나?”

“꼭 살아서…… 국숫집 다시 여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약속 꼭 지킬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시게. 훗날 어느 곳에서 천하제일국숫집이 생겼다고 하면, 내가 연 국숫집인 줄 알게나, 허허허.”

이번엔 울지 않았다.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고 가세요.”

“응? 부탁? 자네가 웬일인가? 부탁이란 걸 다 하고.”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요.”

“알았네. 그래 뭔가? 어떤 놈을 죽여 주면 되겠나?”

“이제 사람 안 죽이는 거 알아요.”

“큭큭큭.”

“저 사람하고 친해요?”

내가 손가락을 펼쳐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곳 표현객잔의 주인, 정확히 말하면 현 살수계 최고의 살수이자 조금 전 살왕으로부터 살왕이란 이름을 물려받은 신살왕(新殺王)이다.

“아, 저 녀석?”

그래도 새로운 살왕인데, 저 녀석이라니.

난 신살왕이 살왕의 말을 들었을까 화들짝 놀라 봤지만, 신살왕은 난장이 된 객잔 정리를 지휘하느라 못 들은 듯하다.

“내가 한참 현역에 있을 때 내 시중들던 녀석이지. 빠릿빠릿하고 싹싹해서 내 살수공 몇 개 알려 줬더니, 벌써 저만큼 커 버렸네, 허허허.”

오! 살왕 이 노인네.

다시 봐도 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저 녀석은 왜?”

“그런데 면왕 아저씨,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늘따라 이상하네. 부탁이니 궁금하다느니. 허허. 뭐, 얼마든지 물어보시게.”

“살수들에게 의뢰가 들어왔는데, 나중에 다른 의뢰인이 그전에 의뢰한 의뢰인을 죽여 달라고 의뢰를 하면 어떻게 해요?”

“안 받아.”

“절대로요?”

“절대 안 받아.”

“돈을 두 배, 아니 열 배로 준다고 하면요?”

“삼류 뜨내기 살수들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살수라면 절대로 그런 의뢰는 안 받아.”

“왜요? 살수들은 무조건 돈에 따라 움직인다면서요? 돈을 열 배로 준다고 하는데 안 받아요?”

“그것이 바로 삼류 뜨내기 살수들이 범하는 소탐대실이라는 것이네.”

“소탐대실?”

“눈앞의 작은 돈에 눈이 어두워, 훗날 크게 벌 수 있는 돈을 잃는 실수라네.”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자 살왕이 부가 설명을 해줬다.

“내가 지난번에 이런 이야기를 해 줬지? 살수계에 발을 담근 후 단 한 번도 의뢰인의 정보를 흘린 적이 없다고.”

“네.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신용일세. 믿음이고. 살수가 가장 중요히 여겨야 할 덕목이 바로 의뢰인과의 신용이라네. 만약 의뢰인과의 신뢰를 깨 버린다면, 이후 그 어떤 의뢰인이 그 살수에게 의뢰를 하겠나?”

“아! 그렇군요.”

“돈을 열 배가 아니라 백 배 천 배를 준다고 하여도, 제대로 큰돈을 벌겠다고 생각한 진짜 살수는 절대로 의뢰인을 배신하는 의뢰를 받지 않는다네.”

“오! 조금, 아주 약간 멋있어 보이려고 하네요.”

“큭큭큭, 사실 말이야.”

“네.”

“가끔 의뢰인들이 요상한 의뢰를 하거든. 예를 들어 죽일 때 그냥 죽이지 말고, 꼭 모습을 드러내고 겁을 잔뜩 준 다음에 죽여 달라느니, 아니면 손가락 하나씩 잘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달라느니 하는 요구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원한이 큰 상대라면 저라도 그렇게 의뢰하겠어요. 돈을 더 주더라도요.”

“그렇지.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나?”

“뭔데요?”

“그렇게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의뢰 대상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네.”

“아! 알 것 같아요. 돈을 두 배로 주겠다. 다섯 배로 주겠다. 열 배로 주겠다. 그러니 제발 살려 달라?”

“하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때 흔들리면 그건 그냥 쓰레기 삼류 살수가 되는 것이고. 굳건히 자신의 일을 끝마치면 그때부터 제대로 된 살수라 불리게 되는 것이지. 사실 이건 살수공을 익힐 때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는 것 중 하나야.”

“오! 그렇군요. 그러면 저기 저 신살왕도 당연히 의뢰인과의 신뢰를 절대적으로 지키겠네요?”

“당연하지. 더군다나 이제 갓 살왕이란 이름을 물려받아서 돈방석에 앉는 게 시간문제인데. 아주 사소한 신뢰라도 깨 버린다면, 그게 다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게 아니겠나? 의뢰도 신중히 받을 것이고, 받은 의뢰는 절대적으로 지킬 것일세. 그래야 돈방석에 앉을 테니 말이야.”

“소개해 줘요.”

“누구? 저 녀석을?”

“네.”

“의뢰하게?”

“네.”

“무슨 의뢰?”

“떠나는 양반이 그런 것까진 알 거 없고. 좋은 일인데 손이 부족해서 그래요. 감쪽같고 은밀한 최고의 손이 필요하거든요.”

“허허, 자네도 참 젊은 나이에 일복이 터졌군. 뭐, 소개해 주는 거야 어려울 리 있나? 따라오시게.”

“기왕이면 의뢰비도 조금 깎아서…… 하하.”

“염려 마시게. 저 녀석도 지금 기분이 최고야. 살왕이란 이름을 얻었으니 얼마나 좋겠나? 자네 덕이 있음 또한 분명히 알고 있고. 싸게 해 줄 것일세.”

*

살왕과 함께여서 그랬을까?

나이도 지긋한 신살왕은 연신 내게 고분고분 저자세를 취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심지어 내가 의뢰할 일을 꺼냈을 때, 그는 감사의 뜻으로 무료로 의뢰를 수용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무림맹에서 사람이 올 것입니다.”

“무림맹요?”

“네. 무림 맹주가 사람을 보내 의뢰를 할 것입니다.”

“무슨 의뢰를……?”

“저를 죽여 달라는 의뢰요.”

“음…….”

순간 신살왕뿐만 아니라 살왕까지 심각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 도사님. 이미 저는 마 도사님의 의뢰를 수용하겠다고 말을 뱉었습니다. 절대 마 도사님과의 신뢰를 깨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허허. 내가 이 녀석을 잘 가르쳤다니까, 허허허.”

옆에서 구살왕이 신살왕의 어깨를 연신 두드리며 웃어 댔다.

척.

탁자 위에 금자 일백 냥을 올려놓았다.

“의뢰비입니다.”

“무료로…….”

“아닙니다. 무림 맹주와 척을 지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뢰비를 받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일은 빈틈없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신살왕에게 의뢰를 마쳤다.

그리고 잠시 뒤.

“아이고, 먼 길을 가려는데 노자가 없구나.”

구살왕이 신살왕 주위를 계속 맴돌며 혼잣말을 해댔다.

“아이고, 우린 늙어서 걸을 힘도 없는데. 어디 소라도 한 마리 사서 달구지에 타고 가면 아픈 무릎이 조금은 괜찮을 텐데.”

오살까지 가세해 연신 앓는 소리를 해 댔다.

결국 신살왕은 구살왕과 오살에게 금자 스무 냥을 뜯기고 말았다.

뭐, 살수계의 일이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

“으아아앙. 미안해. 엉엉엉.”

퍽퍽퍽!

“으앙, 미안.”

퍼퍼퍽!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

예지와 재회하고, 아미파에 머물렀다.

국대 인경은 이번에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비무 시험의 우승자가 됐다.

우리는 곧바로 감숙 염우촌으로 향했…… 예지가 임하령과 함께 팔적산으로 떠났다.

구양봉막이 갇혀 있는 염동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다 눈 빠지겠네, 광마.”

이 인간은 내가 진짜 광마인 줄 아는 모양이다.

“광마, 아니 광천마제님. 헤헤헤.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이 늙은이의 죽기 전 마지막 소원, 들어주시려고 오신 겁니까? 헤헤.”

전생에선 구양봉막의 소원을 미리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대 관찰 이십 일째 되는 오늘, 난 그에게 답을 주려고 왔다.

아니, 거래를 하려고 왔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군.”

“아이고, 광마님, 아니 광천마제님. 죽는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무얼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광천마제님과 왕대의 싸움을 보게만 해 달라는데, 어찌 그조차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나한테 득 되는 게 없잖아.”

내 차가운 한마디에 순간 구양봉막의 가짜 울음이 뚝 그치고 말았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 눈치를 사정없이 살피며 간사한 목소리를 낸다.

“헤헤. 바라시는 게 있으시군요. 진즉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헤헤헤.”

“바라? 내가 뭘 바라? 곧 죽을 늙은이한테.”

“아이고, 광천마제시여. 개똥도 약에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제게서 가져가실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모두 가져가십시오. 전 왕대의 싸움을 보는 것이면 다 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정말 다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음…… 에잇. 돈도 없어. 그렇다고 아수라혈천신공의 비급도 없어. 내가 당신한테 뭘 가져갈 수 있겠어?”

“제가 필사를 하겠습니다. 이십 년 넘게, 삼십 년 가까이 책이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은 아수라혈천신공입니다. 필사본을 드리겠습니다, 광천마제님.”

“됐어. 난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한 신공을 이미 익히고 있어. 부작용으로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그딴 마공을 내가 왜 원해?”

구양봉막 이 노인네, 포기하지 않는다.

거기에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린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인간이 칠십오 년이란 인생을 헛으로 산 게 아닌가 보다.

제법 눈치가 대단하다.

그렇게 다시 사정없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왕대…….”

“뭐?”

“왕대를 드리겠습니다.”

“왕대? 왕대가 무슨 물건이야? 주고받고 하게?”

“물건은 아니지만, 그는 노예입니다. 염우촌의 모든 노예가 그렇듯, 그 또한 한 사람의 주인을 섬기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그래?”

“네. 저를 잡아 오던 그날 분명 듣지 않으셨습니까? 왕대가 제게 주인님이라 부르는 것을요.”

“분명 왕대가 당신을 그렇게 부르긴 했지. 근데 그냥 아무한테나 그렇게 부르는 거 아니야?”

“어이쿠! 큰일 날 말씀하시네요.”

“뭔 또 큰일까지.”

“헤헤, 이곳 염우촌은 오십 년 동안 그런 관습을 계속 이어 오고 있었습니다. 노예들도 그렇게 한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는 걸 당연하다 생각하지요. 마치 갓난아이가 어미의 젖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물듯, 이곳 노예들도 그러한 일들이 자연스레 몸에 배었습니다.”

“그런데 왕대의 주인은 원래 따로 있지 않았나? 당신이 왕대를 그 사람한테 산 거야?”

“헤헤, 아닙니다. 여동생이 죽고 괴로워하던 당시 아홉 살이던 왕대에게 은밀히 접근해 아수라혈천신공을 가르쳐주며 자연스레 그를 내 노예로 삼은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던 주인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꼬박꼬박 주인님이라 부른 것도 다 제가 시켜서 한 일입니다.”

“그게 뭐야? 그럼 왕대를 어떻게 나한테 주겠다는 건데?”

“왕대는 아홉 살에 이곳 염우촌에 노예로 팔려와 정확히 삼십 년 동안 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주인이 없는 삶은 태양이 없는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이 낯설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인의 권리를 포기한다면 그는 크게 당황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을 광천마제님이라 지목하면, 그는 자연스레 광천마제님의 명령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쉬워?”

“쉽지요.”

“너무 간단한 거 같은데?”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헤헤.”

“만약 안 되면, 왕대 싸움 구경 못 한다.”

“허걱! 잠, 잠깐!”

“쯧쯧. 그럴 줄 알았다.”

“아니, 원래라면 아주 간단하게 될 일인 건 맞습니다. 소유권을 넘기면 당연히 노예는 새 주인을 섬깁니다. 그런데…… 이건 제 잘못도 아니고 제가 거짓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왕대의 정신 상태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안 된다는 소리네. 먹을 거 충분히 넣어 줄 테니까, 그냥 여기서 남은 인생 조용히 반성하며 살다가 가. 나 간다.”

“잠깐! 광천마제님! 잠시만요!”

큭큭큭. 저 노인네 아주 애간장이 바싹 타들어 가는 모양이다.

“뭐? 왜 또?”

“이렇게 해 보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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