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예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동공까지 풀린 게, 사고(思考)마저 멈추어 버린 것 같다.
떠나면 내가 죽고, 가지 않으면 사문의 사고들과 사자매들이 죽는다.
어찌 선택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녀의 본능이 그녀의 사고를 멈추게 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임하령의 상태도 만만치 않고.
일단 진정부터 좀 시켜야겠다.
“자, 두 사람 다 심호흡하고. 예지야.”
“응?”
“심호흡. 들이마시고, 내쉬고. 이렇게. 괜찮아. 다 괜찮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심호흡. 그래, 그렇게.”
약간의 시간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나자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우선 임하령에게 물었다.
“아미삼검은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현재 팔적산을 포위하고 있는 이들은 황룡회의 일부 무력대라고 해요. 유령신검과 황룡회의 최고수들은 나서지 않은 상태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아미삼검께서 그곳으로 가면, 분명 유령신검도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고 하셔서, 장문인께서 아미삼검의 하산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음…… 그렇군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니, 장문인 심전 사태의 판단이 옳다.
간혹 사소한 사고가 문파와 문파 간의 전면전으로 번지는 일은 무림에서 흔하다.
하지만 그건 작은 문파들의 이야기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그리고 유령신검의 황룡회나 극양신장의 화양문 같은 거대 문파의 전면전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아도 일단 무림맹에서 강하게 중재할 것이고, 또 다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거대 문파 간의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 무림 전체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아미삼검을 나서지 않게 한 건, 내가 보기엔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 일을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왕대가 폭주했다.
그 현장에 나와 예지가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분명! 분명하게 맹주의 귀에 이미 들어갔을 것이다.
나와 예지, 의제, 한해북.
맹주는 우리 네 사람이라면 충분히 왕대를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맹주는 분명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
왕대가 죽고 사는 건 그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 그렇다면.
만약 내가 맹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넷 중 가장 강한 고수인 금예지.
그녀만 우리 무리에서 빠진다면, 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은 왕대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고 생각할 것이고, 만약 아니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변방인 감숙에서도 혈겁이 일어나 오가는 사람이 없는 이곳 염우촌.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다지만, 용남 무문연합회 무인 삼백여 명 정도의 입을 막는 건, 무림맹 입장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왕대와 내가 붙고, 둘 중 누가 죽더라도 살아남은 자를 조용히 제거한 다음 동귀어진했다고 공표하면 끝이다.
결국, 나에게서 금예지를 떼어 놓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일 테다.
눈엣가시 같은 나도 없애고, 비밀 병기로 키우려다 골칫거리가 된 왕대까지 없애는 일석이조의 계책.
맹주. 정말 보면 볼수록 치사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결국, 봉화 사니는 안전할 것이다.
팔적산의 포위는 맹주에 의해 계획된 일이고, 금예지를 이곳에서 빼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와! 그러고 보니, 맹주가 대단하긴 대단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나와 왕대를 죽이기 위해 결국 유령신검의 일제자를 죽였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물론, 내 가정이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겪은 맹주는 분명 그리했을 것이라고 나는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그나저나 내 가정이 틀렸을 경우도 대비를 해야 하는데.
상황이 너무 곤란하다.
아미파를 구하러 가면, 왕대가 일천 명 가까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아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죽인다면 희생자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이곳에 머물며 왕대를 막자니, 만에 하나 황룡회와 아미파 사이에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또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고.
또 왕대를 버리고 팔적산으로 가면, 결국 나는 초절정 극상의 경지를 되찾지 못한다.
초절정 극상의 경지를 되찾지 못하면, 만검존을 상대할 수 없다.
만검존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건, 화경의 경지를 되찾을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다시 이곳에 머물자니, 아미파 제자들의 죽음을 본 우리 예지가 폭주할까 걱정되고.
돌겠네.
선택의 기로.
내 머리가 하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오빠?”
“어? 어.”
“심호흡.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래, 그렇게.”
예지의 말에 따라 심호흡을 했다.
조금 전 내가 예지에게 알려준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호흡법이다.
덕분에 새하얗게 변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 예지 말이다. 자기도 분명 심란하고 놀라고 마음도 아프고 그럴 텐데, 그 상황 속에서도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준다.
얼마나 착한가.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첫사랑이다.
“고마워, 예지야.”
“응, 오빠.”
그 말이 끝이었다.
우리 세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예지도, 나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예지를 보내긴 보내야 하는데, 혼자 보낼 수도 없고.
어쩌지? 정말 돌아 버리겠네.
아오! 무림맹주 쓰레기.
곱게 죽이진 않으마.
속으로 맹주를 아무리 욕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그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다시 숙손승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막사 밖에서 들려왔다.
“마 도사님, 손님이 또…… 달호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달호? 어서 와! 어서 들어와!”
급한 목소리로 달호를 불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달호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몰골도 꽤 좋지 않아 보였다.
경신법에 있어선 제법 대단한 녀석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거리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온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막사 안으로 들어온 달호는 예지와 임하령의 눈치를 살피며 쉬이 그 어떤 행동과 말도 취하지 않았다.
“괜찮아.”
다시 내 허락이 떨어지자.
척!
부복을 하고는.
“주군! 급히 전할 게 있어 이리 달려왔습니다.”
달호의 부복과 주군이라는 말에 임하령과 예지 모두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 예지도 달호를 보는 건 처음이다.
“예지야, 이 친구 이야기는 내가 나중에 해 줄게. 우선 달호 얘기부터 듣고. 전하라.”
“존명! 며칠 전 공손병 선생의 연락망으로부터 현재 섬서 팔적산에서 아미파의 오장로 봉화 사니와 그분의 두 제자가 황룡회 무사 수백 명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나도 조금 전 들었다. 그래서? 무슨 방법을 찾았어?”
“충! 처호 선생께서 이 일에는 분명 드러나지 않은 음모가 있다 하시며, 주군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급하게 대비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 역시 처호 선생이군. 어떤 대비를 했는데?”
“사람을 급히 파견해 은밀히 무당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송암 도장께서 직접 황룡회와 아미파 몰래 움직이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또, 포쾌문(捕快門)의 금의포쾌(錦衣捕快) 여적위 문주에게 사건의 은밀한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여적위는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시골 현청의 말단 포쾌로 시작하여 황제의 금의위 수장까지 지낸, 황궁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하는 인재입니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황궁에서 벌어진 파벌 싸움과 중상모략의 희생양이 되어 홀연히 사직서를 쓰고 황궁을 떠나 여송에서 여적위라는 이름으로 개명까지 한 후, 무림에 포쾌문을 개파하였습니다. 처호 선생이 황궁에 있을 무렵 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라고 합니다.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꽤 대단한 인물인 듯하다.
그보다.
“송암 도장이 직접 움직였다고?”
“충! 그러하겠다는 약속의 서신을 받자마자 주군께 보고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약속대로라면 아미파보다 먼저 팔적산에 도착할 것입니다.”
역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나에게는 처호와 처선 그리고 공손병이 있었다.
이래서 주변에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옆에 있었더라면 진짜 볼에 뽀뽀라도 해줬을 거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내 얼굴에서 웃음기를 숨길 수 없었다.
“또 있어?”
“충! 선도연가(仙道燕家)와 몽중방(夢中幇)에서 각기 수백의 정예 무사를 이끌고 팔적산으로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이동 중입니다. 역시 아미파보다 먼저 팔적산에 도착하리라 예상됩니다. 불상사가 생길 시 세가와 문파의 명운을 걸고 아미파를 도와 싸운다는 맹세를 한 후 출정하였습니다.”
선도연가? 몽중방?
모두 처음 듣는 이름들이다.
아니, 어디서 들어 보긴 들어 본 것 같은데.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곳들 아닌가?
내가 그렇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나보다 임하령이 먼저 달호에게 물었다.
그녀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두 문파의 이름은 진즉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과는 조금의 인연도 없는 곳들인데, 그곳에서 어찌 본문을 도우러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달호는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복한 상태로, 임하령의 질문을 경청한 후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답을 해도 되는지 묻는 것이다.
난 달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곧바로 달호가 다시 임하령을 향해 답했다.
“그들은 아미파를 위해서가 아닌,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것입니다.”
“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임하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달호와 나를 연신 번갈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두 문파 모두 주군께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선도연가는 섬서의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정파 소속의 꽤 강력한 세가입니다. 십 년 전 무림맹의 눈 밖에 난 뒤로 화산과 종남 그리고 백리세가 등의 탄압을 지속적으로 받아 명맥마저 끊길 위기에 처해 공손병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공손병 선생은 다시 이를 처호 선생에게 알렸고, 처호 선생의 지략으로 섬서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처소 선생이 주군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 즉시 주군께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몽중방은?
-역시 섬서에서 오랜 시간 그 힘을 유지하고 있는 문파입니다. 다만 사파와 사술을 쓴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탄압을 받았습니다. 동병상련이라 하여, 선도연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도연가의 가주와 몽중방의 방주는 가까운 사이가 됐고, 선도연가의 가주가 주군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팔적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아미파를 도와 함께 싸울 수 있는 힘을 갖춘 곳이 두 문파라 우선 그들만을 보냈습니다.
-음…… 그렇군.
전음은 그렇게 무덤덤하게 보냈지만, 난 속으로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숨기려 해도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예지하고 임하령.
두 문파가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둘 다 입을 쩍 하니 벌리고는 좀처럼 다물 줄 몰랐다.
놀라도 엄청나게 놀란 얼굴들이다.
“어험, 어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예지야? 이 오라버니의 매력은 파면 팔수록 양파 껍질같이 계속 나온다고, 하하하!”
“오빠…….”
우리 예지가 드디어 웃는다.
그래, 우리 예지는 웃을 때 제일 예쁘다.
계속, 평생 그렇게 웃게만 해 줄게.
이후 달호를 통해 몇 가지 보고를 더 받았다.
모두 우리 세 사람을 안심시키는 내용들이었다.
처호, 처선, 공손병 세 사람은 진짜 복덩이들이 아닐 수 없다.
*
처호와 처선 그리고 공손병을 치하하는 서신을 써 달호에게 줘 보내고, 임하령도 막사 바깥에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예지야, 지금 당장 떠나. 가서 네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들을 지켜.”
“오빠, 본문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 맞아. 하지만 오빠들 역시 나에게는 가장 소중해.”
아! 아주 살짝 섭섭하다.
오빠가 아닌 오빠들이란다.
뭐, 그래도 이게 어딘가?
천하의 우리 예지가, 나를 가장 소중한 존재로 생각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오빠 믿지?”
“응.”
“그럼 가도 돼. 나, 다 생각이 있어.”
“왕대를 상대할 계책?”
“응. 그러니 여긴 염려하지 말고 어서 떠나, 팔적산으로.”
“어떤 계책인지 들려줘.”
아! 그런 거 없는데. 어쩌지?
모르겠다.
“나 섭섭해지려고 하네.”
“어? 왜? 내가 무슨 잘못했어?”
“아니, 오빠 한번 믿어 달라고 했는데, 지금 의심하고 있잖아. 아!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됐어?”
“하지만…….”
“예지야, 오빠 믿어. 정말 손만 잡고 잘 거, 아니 그게 아니라. 어험, 그냥 좀 믿어 주면 안 돼?”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우리 예지 울려고 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예지도 지금 엄청나게 갈등하고 있다.
선택을 못 하고 있다.
이럴 땐 결단을 내릴 수 있게, 강하게 나가 줘야 한다.
난 짐짓 멋진 표정을 짓고, 한 손을 예지의 어깨에 올리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 갑자기 왜 심장이 쿵쾅쿵쾅하는지 모르겠다.
“예지야, 정말 손만 잡고, 아니 그게 아니라. 믿어 줘. 나 정말 잘할 수 있어. 정 아니다 싶으면, 의제랑 한 형 데리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갈게.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뚝 하고. 봉화 사니부터 구해.”
“오빠…… 엉엉.”
결국 우리 예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내 품에 쏙 안기는 그녀였다.
좋다.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너무 좋아서, 왕대가 아니라 염라대왕과 싸워도 이길 것 같이 힘이 솟구친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다.
이제 왕대는, 나 홀로 상대해야 한다.
할 수 있다.
광천마제 시절에도 해냈는데, 일 갑자의 내공이 더 보태진 지금의 내가 질 리는 없다.
똥꼬에 힘 꽉 주고.
한판 붙으러 가자!
이제 진짜 초절정 극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