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맞아. 내가 바로 마악치다. 현화도사란 탈을 쓰고 있지만, 진짜 내 신분은…… 큭큭큭. 무림 정복이란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 광천마제 마악치 님이시다, 푸하하하하!”
구양봉막의 얼굴이 굳었다.
날 진짜로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거 많이 뻘쭘하군.
적당히 늙은이를 속인다는 게, 내가 너무 나갔다 싶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그런 얼굴이다.
곤란하다. 사실 더 들을 게 있는데.
어쩌지?
그런데 그때.
“혹시…….”
“어험. 뭐? 왜? 나 진짜 광천마제 마악치야.”
“그러니까.”
어라? 뭔가 이상하다.
표정이 굳어서 날 미친놈이라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애매하다.
아니, 처음으로 진짜 심각한 얼굴을 하는 구양봉막이다.
왜지? 설마, 내 말을 믿는 건가?
“화산파의 수룡검도…… 한패냐?”
허걱! 이 노인네, 진짜로 내 말을 믿는 모양이다.
그래! 이거다.
좀 더 강하게 나가자.
“당연한 얘기 아니야? 우리는 이미 서로의 피를 나눠 마시며 하늘에 대고 맹세까지 했어. 무림을 정복하는 그날까지 함께하기로.”
“아…….”
많이 놀란 얼굴이다.
진짜로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는 모양이다.
바보는 내가 아니라 구양봉막 본인인 것 같다.
조금 더 세게 나가 볼까?
“어차피 곧 죽을 거라고 했지?”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내 입에서 엄청난 비밀이 튀어나올 걸 예감한 모양이다.
“좋아. 곧 죽는 노인네니까 말해 주지. 무당파, 아미파 그리고 제 삼의 세력까지.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어.”
“설, 설마…….”
난 곧바로 광마일기를 꺼내 펼쳤다.
정확히 무당파 장문인이 무당태극패(武當太極牌) 대신 써 준 무당대임서(武當代任書) 부분을 펼쳐 보여 줬다.
구양봉막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는 순간이었다.
“자, 이만하면 내가 농으로 한 얘기가 아니란 걸 믿을 수 있겠지?”
또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구양봉막이었다.
“좋아. 그럼 하나만 더 묻지.”
많이 놀랐나 보다.
역시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마구 끄덕인다.
“감시자가 있나?”
“모른다.”
“주기적으로 보고한다며? 보고는 누구에게 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무림맹에서 사람이 찾아온다. 그런데…… 아마 감시자가 있을 수도 있어. 내가 내공이 없어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지. 초절정 극상의 그것도 마공을 익힌 괴물을 무림맹주가 나의 보고만 믿고 방치할 리는 없을 테니까.”
“음, 역시 그렇겠군.”
내가 혹시 모를 감시자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구양봉막이 땅바닥을 마구 기어 나에게 다가왔다.
이내 내 바짓가랑이를 덥석 잡았다.
“부탁이다. 진짜, 진짜로 부탁이다. 광천마제 너와 왕대의 싸움을 보게 해 다오. 아니, 보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이 노인네.
이젠 간절함을 넘어 절박한 얼굴로,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내게 애원한다.
사실 이 노인네가 나와 왕대의 싸움을 관전하건 말건 큰 상관은 없다.
그래, 죽는 사람 소원은 또 들어줘야 진짜 도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난 광천마제가 아니라 현화도사 마악치니까.
“크하하하! 네가 본좌의 위대함을 진심으로 눈에 담고 싶은 모양이구나?”
구양봉막이 여전히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좋다! 이 위대하신 몸께서 친히 아수라혈천신공을 어떻게 깨부수는지 네게 볼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크하하하하!”
구양봉막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더 강렬하게 흘러내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 왕대랑 붙으려면 최소 스무 날은 더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 구양봉막은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기다려야 할 테고.
*
왕대 관찰 이십 일째.
이제 열흘 남았다.
왕대가 폭주하여 다음 마을의 혈겁을 일으킬 날이.
그리고 우리는 이미 충분하게 왕대에 대한 관찰을 마쳤다.
왕대는 이십 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산자락 아래에 웅크린 상태로 울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감을 조금씩 늘려 가며 어느 정도 왕대의 내부까지 관조할 수 있었다.
그렇게 관찰을 마치고, 왕대는 의제와 한해북에게 맡겼다.
나와 금예지만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예지야, 어떻게 생각해?”
“맞아. 확실히 초절정 극상의 경지야. 분명해.”
됐다.
이젠 내가 왕대와 싸우면 된다.
그 싸움을 통해 나는 초절정 극상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예지와 의제, 한해북에게도 내가 혼자서 왕대를 상대할 것이라 당당하게 말해 놨다.
근데 정말 그 방법이 맞긴 맞는 걸까?
모르겠다.
아무튼 왕대와 싸워도 내가 이긴다.
왜? 광천마제 생에도 내가 싸워서 이겼다.
심지어 현재 나는 당시 보다 일 갑자의 내공을 더 보유하고 있다.
최소한 죽을 일은 없고.
그렇게라도 부딪혀 봐야 어떻게 든 내가 초절정 극상의 경지를 되찾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빠.”
“응? 왜?”
“오빠가 알아 둬야 할 게 있어.”
“뭔데?”
“저자, 왕대라는 사람.”
“응.”
“나보다 강해.”
“뭐? 왜? 같은 초절정 극상의 고수잖아. 그런데 그걸 어떻게 부딪혀 보지도 않고 단정 지어?”
“느낌이 그래. 나보다 한 수도 아니고 최소한 두 수 위야. 위험해.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어. 내 기감이 또 본능이 그렇게 계속 경고하고 있어.”
“음…….”
“지금 상태는 아니야. 왕대의 울음이 격해졌을 때 그래. 폭주 직전의 격한 상황. 그때가 되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무섭다는 느낌이 들어. 염우촌 혈겁, 그때 폭주했던 상태가 되면. 내가 감당해 낼 수 없어.”
갑자기 좀 무섭네.
내가 원래 아주 살짝 약간 쫄보긴 하다.
그런데 예지 말을 들으니 더 무섭다.
광천마제 시절엔 어떻게 녀석을 이긴 거지?
아! 광마일기에 분명 그렇게 쓰여 있긴 하다.
몇 번이고 도망가고 싶었고, 실제 몇 번 시도했으나 다 실패했다.
도망가다 강제로 붙잡혀 싸웠다는 뜻이다.
아! 초절정 극상이고 뭐고, 갑자기 싸우기 싫어지네.
“오빠, 정말 혼자서 싸울 거야?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나…… 오빠가 다치는 거 싫어.”
우리 예지가 울먹이기까지 하며 내게 말했다.
뭐, 내가 쫄보라서가 아니다.
사내대장부가 여자를 울려서 되겠나?
다 우리 예지를 위해서다.
“작전 변경.”
“응? 어떻게?”
“싸움은 내가 할 건데. 예지 네가 옆에 착 달라붙어 있어 줘.”
“응?”
“의제랑 한 형도, 칠연절명침하고 무형비침까지 점검 철저하게 해서. 혹시라도 내가 위험해지면, 세 사람이 바로 달려들어서 날 구해 줘.”
“오, 오빠?”
“아! 우리 예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지?”
“꼭 그렇게까진…….”
“그래, 네 맘 다 알아. 이렇게 계책을 변경하면 넌 걱정 안 해서 좋고, 나는 안전해서 좋고. 좋지? 하하하.”
“응. 그, 그래…… 좋, 좋아. 그러자.”
우리 예지 앞에서 살짝 모양이 빠지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무서운데.
그런데 설마 우리 예지랑, 의제 그리고 한해북까지 가세해도 감당 못하면 어쩌지?
“예지야, 혹시…… 우리 넷이 다 덤벼도 감당 안 될 수도 있을까? 그건 좀 말이 안 되지?”
예지의 얼굴이 또 어두워졌다.
“뭐야? 정말 그럴 가능성도 있어?”
“아니야. 그렇게는 내가 만들지 않을게.”
뭐지? 우리 예지가 미소를 짓는데, 불안하다.
그냥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뭐야? 예지야, 우리 서로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뭔데? 말을 해 줘.”
“그게…… 실은…….”
예지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화기를 꺼내야 해. 그래야 왕대를 감당할 수 있어.”
“화기? 그거 이미 내공으로 전환한 거 아니었어?”
예지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답했다.
“오빠의 사부님이신 유현 도사님 덕분에 화기를 모두 잠재울 수 있었고, 또 유현 도사님과 위화궁 우 여협의 도움을 받아 잠재된 내기를 조금씩 꺼내 안정적으로 내공으로 전환할 수 있었어. 그런데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해. 아직 수십 배가 넘는 화기가 내 몸속에 잠자고 있어.”
예지의 내공은 일 갑자 반이 조금 넘는다.
의제와 한해북보다 조금 더 많은 편이다.
이는 분명 내가 백두산에서 얻은 만년산삼의 사분의 일 뿌리를 말려 두었다가 반으로 나누어 예지와 초향에게 준 덕도 포함이 된다.
원래 가지고 있던 내공 반 갑자와 만년산삼을 통해 얻은 내공 반 갑자.
그리고 나머지 반 갑자가 조금 넘는 내공은 화기를 모두 전환해 얻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화기에서 내공으로 전환한 양이 수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 뭐야?
용의 내단을 몸에 품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남들은 열심히 영초며 내단이며 찾으려고 목숨 걸고 뛰어다니는데, 우리 예지는 몸속에 그냥 수십 갑자의 기운을 머금은 영약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생겨 버렸다.
먼 훗날의 무림.
수룡검과 봉황검 둘이서 무림을 이끌게 된다?
아니다.
천무휘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상태로 봐선 그냥 예지가 천하제일인 자리에 침 발라 놓은 격이다.
수십 갑자의 내공을 몸에 품고 있고, 그걸 계속해서 내공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하지 않겠나?
와!
이건 진짜 사기다.
부럽다.
설마…… 나도?
내 광기도?
난 아닌 것 같은데.
광천마제 시절의 내 경지였다면, 이를 모를 리도 없었을 테고.
그때의 나는 광기를 거의 폭주하다시피 했던 때 아니겠는가?
휴우, 모르겠다.
단정 지을 수 없다.
우선 왕대부터 생각하자.
“그런데 예지야. 아직 내공으로 전환하지 않은 화기를 어떻게 꺼내 쓴다는 거야? 앗! 설마…….”
예지가 미안한 듯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다.
“안 돼! 그러면 네가 또 폭주할 수 있잖아. 그건 내가 죽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거야. 절대 반대. 하지 마! 내가 용납할 수 없어.”
“하지만 오빠, 왕대는 정말 위험해. 모두 죽을 수 있다고.”
내가 화까지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만약, 정말 만에 하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난 다시는 너를 보지 않을 거야.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절대로, 내가 죽더라도 절대! 절대로! 그럴 생각 하지 마.”
“오빠…….”
예지가 울먹인다.
더 강하게 다짐을 받아 놔야겠다.
우리 착한 예지가, 내가 죽는 꼴을 보면 또 폭주할지 모른다.
그것만큼은 꼭 막을 것이다.
그렇게 예지에게 제대로 다짐을 받으려 눈을 부라리고 있을 때였다.
“마 도사님, 금 여협, 숙손승입니다.”
현재 우리를 도와 염우촌 일대의 경계를 책임지고 있는, 감숙 용남 무문연합회의 회주 종우검 숙손승이 막사 밖에서 우리를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요?”
하필 이때.
“잠시만 기다리시라…….”
그런데 그때.
숙손승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목소리였고, 이미 들어 본 익숙한 목소리기도 하다.
아니, 그녀는 말을 함과 동시에 허락도 없이 우리 막사로 진입했다.
“예지 사매!”
아미파의 소포검화 임하령이다.
그런데 다급한 표정은 둘째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덩달아 예지도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령 사저,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상태가…… 지금 왜 이런 모습이에요?”
예지의 말에 임하령이 울먹이며 말했다.
“장문인 사고와 사부님께서 절대로 네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너무 위급한 상황이라…… 어쩌면 우리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나 혼자 무리를 이탈해 너를 찾아왔어.”
“무슨, 무슨 일인데요?”
임하령은 눈물까지 주르르 흘리며 답했다.
“오장로 봉화 사고께서…… 제자 두 명만 이끌고 섬서에서 임무를 수행하시다가 그만 황룡회와 충돌했대.”
“황룡회요? 유령신검의 그 황룡회요?”
임하령이 더 굵어진 눈물 줄기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신검의 수제자 칠흑야검(漆黑夜劍)이 죽었어. 황룡회에서는 이를 오장로님께서 그랬다고 단정 짓고, 현재 수백 명의 고수로 팔적산에서 오장로님을 포위하고 있대. 장문인 사고와 장로님들 그리고 제자 수백 명이 현재 팔적산으로 급히 이동 중인데…….”
“…….”
“도와줘. 유령신검이 나서면, 황룡회와 전면전으로 붙으면…… 우리 다 죽을지도 몰라. 도와줘, 사매. 제발! 엉엉엉.”
임하령의 흐느낌은 결국 오열로 토해졌고, 동시에 우리 예지의 얼굴도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