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누구냐, 넌?”
“묻는 건 나고, 대답은 네가 한다. 물론, 입을 열지 않으면, 크큭큭. 많이 아플 거다.”
의외였다.
처음 내가 염동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상당히 놀란 얼굴을 하던 노인네였다.
하지만 고문이란 말을 한 후부터는 오히려 담담한 얼굴이 됐다.
변탠가?
“알았다. 알았어. 질문은 네가 하고 답은 내가 한다. 그래도 누군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다시 묻겠다. 누구냐, 넌?”
뭐지?
괜히 말리는 것 같다.
어쩌지? 내가 누군지 알려 줘야 하나?
아니다. 그럼 진짜 저 노인네한테 말리는 거다.
그래도 답은 해 줘야 할 것 같으니…… 아! 생각났다.
“광마.”
“뭐?”
“광마라고.”
“광마?”
“그래, 광마.”
“광마가 누군데?”
“나라고, 광천마제. 줄여서 광마.”
노인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또 묻는다.
아!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데.
“아니, 그래서 광마건 광천마제건 누구냐고?”
“곧 천하의 사도를 하나로 통합해 천하의 주인이 될 몸이시다.”
“휴우.”
고개를 떨군다.
한숨까지 길게 내쉰다.
무서워서 저러나?
“미친놈이었군.”
젠장!
내 계략이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됐다. 어차피 순순히 입을 열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날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아니, 미친놈이 딱 맞다. 그 미친놈의 고문이 얼마나 지독한지 당해 보면 알 거다.”
“잠깐.”
“또 뭐?”
“고문 안 해도 된다.”
“뭐? 왜?”
“순순히 그냥 말할 거니까.”
“…….”
뭐지?
아! 뭔가 좀 이상하게 흘러간다.
계속 저 노인네한테 말리는 느낌이다.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칠혈자 구양봉막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날 잡아 이곳에 가둘 때 보니, 제대로 무공을 익혔더군. 동굴 안이 어둡지만 내 상태가 잘 보이리라 믿네.”
난 대꾸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는 잘 보여도 구양봉막은 내가 잘 보이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뭐, 아무튼.
“봐 봐, 그냥 내버려 둬도 곧 죽어. 내 상태가 지금 그렇다고. 길어야 몇 달이고, 오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라고.”
“그, 그래서. 그래서 뭐?”
“곧 죽을 내가 숨길 게 뭐가 있다고 숨기겠나?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 아니, 그냥 내가 얘기해 줄게. 왕대가 궁금해서 온 거 아니야? 그가 익힌 무공이라든지 그런 것들.”
“그, 그렇긴 한데…….”
“앉아. 마을 노예들이 하도 튼튼하게 만들어서 동굴 안 무너져.”
“어험, 뭐, 그럼 그럽시다.”
난 구양봉막의 말에 털썩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근데…… 몇 살인가? 대단한 고수 같던데.”
“어허! 이 노인네가. 질문은 내가, 당신은 답만 해.”
“쩝, 알았네. 뭐부터 얘기해 줄까?”
“당신 정체.”
“천마신교 천마비고수호대 제삼대 소속 오조 조장이었다가 지금은 그냥 곧 죽을 어르신 구양봉막 님이시다.”
뭐야?
진짜 뭘 저렇게 순수하게 다 말해?
“그거, 비밀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뭐가 그렇게 쉽게 나와?”
“쯧쯧, 말했잖아. 곧 죽을 마당에 숨기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냐고.”
“그, 그렇지. 어험.”
“또? 뭐가 궁금한데?”
“마교 사람이 여긴 왜 있지?”
이번엔 즉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무언가 내 의중을 꿰뚫어 보려는 분위기였다.
곧.
“나에 대해 뭔가 좀 아는 모양이군. 맹주가 보냈나?”
“맹주? 무림맹주?”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에 대해 알 수가 없을 텐데?”
뭐야?
이 노인네하고도 관련이 있었어?
아! 맹주 이 인간, 천하에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숨어서 다 하고 다니는구먼.
아차! 또 말리겠다.
“질문은 내가, 답은 당신이. 벌써 잊었어?”
“그래, 그래. 그게 규칙이라고 했지. 알았다. 알았어. 다음 질문.”
“여긴 어떻게 있는 거냐고?”
“맞아. 그걸 물었지. 나이가 드니 금방 들었던 것도 잊는다니까.”
“…….”
“천마비고에서도 금기마공보고에 있던 아수라혈천신공을 훔쳐 도망쳤다.”
“그게 가능해? 마교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심지어 천마비고는 마교의 가장 심처에 있고 경계 또한 엄청나다고 들었다.”
“말했잖아. 내가 천마비고를 지키던 수비대 소속 조장이었다고.”
“그래도 믿기 힘든데?”
“스무 살에 천마비고 수비대의 대원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무려 이십 년 동안 준비했어. 아수라혈천신공을 훔치기 위해. 이젠 좀 믿을 수 있겠냐?”
미친 노인네, 집요하기도 하군. 이십 년이나 준비했다니.
“그런 후에는?”
“완벽했지. 완벽하게 아수라혈천신공을 훔쳐 천마신교를 빠져나왔다. 천하를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때…… 빌어먹을 곤륜파 도사 놈들을 맞닥뜨린 거야. 그런 후 대판 싸우고 도망가고, 오해하지 마. 엄청난 숫자로 덤벼들어서 도망간 거야.”
“이십 년 동안 준비했다며? 왜 곤륜파 도사들을 만나게 된 거지?”
“본교 내에서의 일만 준비했지. 십만대산을 떠난 후의 일은 준비하지 않았어. 아니, 십만대산 밖이 어떤 세상인지 알지도 못했다고. 나이 사십이 될 때까지, 신교 내에서만 살았으니 말이야.”
“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 다음은?”
“곤륜파 놈들에게 쫓기다가 그다음은 공동파 말코도사 놈들까지 가세해 나를 쫓더군.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도망 다닐 만했어. 내가 시간을 조금 지체하는 사이, 천마신교에서도 추격대를 보냈더군. 휴우.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아수라혈천신공을 내가 직접 익히는 거였는데.”
“그때 단전이 파괴된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됐고. 이십 년 동안 준비해서 훔친 아수라혈천신공의 주인이 왕대가 된 것이지.”
광천마제 시절 공손병이 조사해 내게 보고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내용이다.
“왜 왕대였지? 제자로 삼은 건가?”
“그건 아니다.”
“그럼?”
“그냥…… 그냥 왕대에게 줬다.”
“고문 시작할 시간이군.”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어험, 불쌍해서 줬다.”
“불쌍해서?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말이야?”
“내가 이 마을에 막 와서 정착했을 때, 왕대의 여동생이 죽었다. 마을의 늙은 놈이고 어린놈이고 돌아가면서 아직 꽃도 피워 보지 못한 그 불쌍한 아이를……. 개새끼들! 아니, 놈들은 악마야. 죽어 마땅해.”
“…….”
“왕대 주인 놈도 한패였고, 왕대에게 여동생이 사고로 죽었다고 둘러댔지. 왕대가 좀 모자란 녀석이긴 하지만, 완전 바보는 아니야. 알 거 다 안다고. 녀석이 그 소리를 듣고 끄억끄억 울고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며 꾸역꾸역 일을 하는데…… 휴우. 진짜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녀석을 선택한 거다. 녀석에게 복수라도 할 기회를 주기 위해. 물론, 녀석의 복수심도 좀 이용해야 했고.”
다시 생각해도 염우촌 잡것들은 죽어 마땅한 쓰레기들이다.
아니, 너무 곱게 죽인 것 같다.
됐다. 이미 지난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아수라혈천신공은 어떤 무공이지?”
“본교의 구대 교주께서 아수라신공을 바탕으로 만드신 무적의 신공이다.”
“그런데 왜 금기마공보고에 있었던 거야? 금기마공보고면 금기된 마공을 보관하는 곳 아니야?”
“맞다. 아수라혈천신공이 아주 약간의, 정말 사소한 문제점이 있어서 금기마공으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익히지 못하고 금기마공보고에 보관되기만 했지.”
“사소한 문제점?”
“왕대.”
“왕대?”
“그렇다. 왕대의 지금 상태가 그 사소한 문제점이다.”
“음…… 좀 쉽게 말해 줄 수 없어? 아니! 그냥 쉽게 말해!”
“마공에 대해 좀 아나?”
“뭐, 대충 들어는 봤지.”
어디 내가 들어만 봤겠나?
마교의 교주와 한판 제대로 뜬 적도 있다.
물론 기억에는 없지만 말이다.
“마공은 쉽고 빠르게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너희 중원 무림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하는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궁극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 게 바로 마공이다.”
끄덕끄덕.
“왕대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좀 모자란 녀석이었어. 근골이 좋아 외공을 익혔으면 제법 힘 꽤 쓰는 고수 소리는 들었을지 몰라. 하지만 절대 지금의 경지 근처에도 오를 수 없었겠지. 마공의 힘이다. 아수라혈천신공의 힘이고.”
“음…….”
“머리가 나쁘고 근골이 좋지 않고 무재가 없어도. 또 그 무공의 정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승의 경지로 가는 깨달음이 없어도! 큭큭큭. 마공은 모두를 궁극의 경지로 오를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어때? 흥미가 돋지 않나?”
“부작용이군.”
내 말에 구양봉막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 않겠나? 약간의 부작용은 다 있는 법이야.”
“아수라혈천신공의 부작용은 마교에서조차 금기 마공으로 분류할 만큼 큰 것이겠군. 대신 당신이 말한 마공의 장점 역시 극대화한 무공일 테고. 그래서 왕대가 지금의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맞나?”
“훗, 제법 똑똑한 녀석이군.”
“칭찬 고맙다. 하지만 당신한테 받는 칭찬 따위는 별로 기쁘지 않군. 하던 말이나 계속해. 그래서 아수라혈천신공의 부작용이 정확히 뭔데?”
“특별한 건 없다. 이건 진짜다. 대신, 다른 마공이 갖고 있는 공통된 부작용이 몇 곱절 더 심해진다는 것이지.”
“다른 마공이 갖고 있는 부작용? 그게 뭔데?”
“늙어 죽을 때 엄청난 고통 속에 죽는다는 건 중원 무림인들도 이젠 거의 다 알 거고, 큭큭큭, 큭큭큭.”
“왜 웃지?”
“나 말이야, 큭큭. 단전이 파괴됐거든.”
“…….”
“원래 진즉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보라고. 단전이 파괴되고 혈도가 막히고 끊기면서 무공마저 모두 잃어버렸어. 그랬더니 봐 봐. 얼마나 편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지, 하하하하!”
“마인들은 죽을 때가 되고, 또 그런 고통이 시작되면 자신의 무공을 전폐시키면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
“미친.”
“……?”
“그럴 놈은 내가 아는 한 마교 전체에 한 명도 없어. 지옥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겪더라도, 아니면 자신의 목을 스스로 베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절대로 자신의 무공을 폐하지 않아.”
“음…… 이상한 놈들이군.”
“쯧쯧, 그래서 너희 중원 무림 놈들을 나약하다고 하는 거야. 진정한 무인의 이상과 가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놈들.”
“그런 논쟁 따위 할 마음 없으니까, 계속 말해. 아수라혈천신공의 부작용.”
“두 번째 주화입마. 원래 마공은 속성으로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대신, 주화입마에 빠지기도 쉬워. 그리고 아수라혈천신공은 그 확률이 열 배 스무 배 이상 높아. 며칠 전 왕대가 염우촌 사람들을 몰살시킨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야. 놈은…… 원래 바보라고 할 정도로 착한 놈이었거든.”
“다른 부작용은?”
“뭐, 나머진 다 비슷한데. 확실히 그것 때문이야. 주화입마. 정신이상. 제정신이 아니지. 아수라혈천신공을 만드신 구대 교주께서도, 스스로 주화입마에 빠져 본교에서 엄청난 혈겁을 일으킨 후 죽으며 그것을 금기 마공으로 분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전해지지.”
“왕대의 상태는?”
“나도 몰라. 그냥 미친놈이야.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그나마 날 알아봐서 다행이지.”
“뭘 믿고 그에게 접근했던 거지?”
“믿고 뭐고가 어디 있나? 죽이려면 죽이라고 간 거지. 또 말해 줘? 나 얼마 살지 못한다고. 삶에 미련 따윈 없어. 내가 직접 익히진 못했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수라혈천신공을 눈으로 보고 죽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지덕지라고.”
“왕대의 정신을 되돌릴 방법은?”
“큭큭. 그래도 조금은 똑똑한 놈인 줄 알았더니, 역시나 미친놈이었군. 세상천지에 주화입마를 치료할 방법이 어디 있나? 그것도 단순한 무공도 아닌 천마신교의 천마비고에 보관되던 아수라혈천신공으로 인해 빠진 주화입마인데.”
왕대를 돕고 싶은데, 그 방법을 구양봉막에게서 구하는 건 어려울 듯하다.
고문이라도 진짜 한번 해 볼까 싶었지만, 지금 구양봉막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고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왕대를 돕는 방법은,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겠다.
“다음 질문.”
“궁금한 게 더 있나?”
“있다. 그리고 질문은 내가 한다.”
“알았다. 알았어. 그래도 무공을 익힌 놈하고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좋군, 큭큭. 사실 말이야.”
“……?”
“이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었거든, 큭큭큭. 근데 평생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고. 입이 얼마나 근질거렸는지 알아? 고맙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줘서 말이야.”
“그럼 계속 솔직히 말해 줘라.”
“물론이지. 그래, 더 궁금한 게 뭔가?”
“아수라혈천신공. 비급. 그걸 보고 싶다.”
“음…….”
방금까지 히죽히죽 웃던 구양봉막이 인상을 구긴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뭐지?
“없다.”
“없어? 폐기했어?”
“미쳤어? 목숨 걸고 훔친 걸 왜 폐기해?”
“그런데 왜 없어?”
“어떤 놈이 가지고 갔어.”
“어떤…… 어떤 놈이?”
“맹주. 창궁검제 남궁비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