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쾅!
쿠르르르르릉.
쾅쾅쾅!
콰콰콰쾅!
“으아아악!”
“으아아아악!”
끔찍했다.
정말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울 정도로 끔찍한 살육 현장이었다.
흡사 지옥이 정말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왕대는, 한 마리의 악귀가 되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도살하고 있다.
“형님.”
의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의제만 그런 게 아니다.
한해북과 금예지,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모두 알고 있던 나 역시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형님,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떨렸지만, 나는 염우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현장을 지켜보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위해?”
“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사람들이…….”
“의제.”
“네, 형님.”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왕대를 막을 수 있지? 우리가 왕대를 막는다면, 왕대의 삶은 누가 보상해 주지? 지금 염동에 갇혀 있는 노예들의 삶은 또 누가 보상해 주고?”
의제는 대꾸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제와 같은 마음을 먹고 있던 한해북과 금예지 역시 고개를 푹 떨구기만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걸 다 떠나서. 왕대 여동생의 죽음. 알려지지 않은 제이 제삼의 왕대 여동생들의 죽음. 그녀들의 죽음에 대한 치죄는 누가 해 줄 건데?”
“…….”
“우린, 왕대를 막을 자격이 없어.”
내 말에 의제와 한해북 그리고 금예지는 오랜 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슬픈 눈으로, 불에 활활 타오르는 염우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이 왕대에 의에 죽은 마을 사람들과 상인들을 슬퍼하는 것인지.
아니면 왕대와 왕대의 여동생 그리고 또 다른 여동생들과 노예들을 가련히 여기는 눈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아니, 후자일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그러하니 말이다.
사실 내가 아미파에서 며칠이나 할 일도 없으면서 계속 눌러앉아 있다가 지금 시점에 온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왕대가 초절정 극상의 경지에 오르는 날을 기다린 것도 있지만, 아니다.
왕대는 진즉 초절정 극상의 경지에 올랐다.
난 왕대가 복수할 수 있는, 자신의 삶과 죽은 여동생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함이었다.
혹시라도, 나로 인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바뀌었기에 어쩌면 그가 마을 사람들과 상인들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복수를 선택했다.
그건 그의 몫이다.
오롯이 그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지, 제삼자인 우리가 왈가불가할 수 없다.
또한 그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에게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자격 따위는 없다.
그리고 그 이후, 그에게 들이닥칠 업보 역시 그의 몫이고.
우린,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
그를 막을 수도, 설득해서도 안 된다.
그게 우리 몫이다.
“한 형, 염동은 어때요?”
“동굴 입구를 막아 놨어요. 제가 열어 주기 전에는 아무도 못 나올 거예요.”
“염동을 관리하던 마을 사람 몇 명과 앞잡이 노릇 하던 노예들은요?”
“겁을 조금 줬더니, 죄다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저기 있겠군요.”
“네. 모두 이미 죽었겠죠.”
아침에 시작한 왕대의 학살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났다.
하지만 화마에 휩싸인 마을의 불은 한밤중이 되어서도 꺼질 줄 몰랐다.
왕대의 첫 혈겁은 그렇게 끝났다.
*
은형술을 극대로 펼쳤다.
초절정 극상의 고수를 감시하기 위함이다.
왕대가 다음 마을의 학살을 위해 움직이는 건 한 달 뒤다.
왕대는 무려 한 달이나 다 타 버린 마을과 시체들 사이에서 홀로 있다가 움직인다.
한 달 동안 그를 지켜볼 생각이다.
혹시라도 그를 자극할까 봐 아주 먼 거리를 유지한 채 그렇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염우촌 혈겁이 끝난 후부터 계속 산자락 아래 홀로 웅크리고 앉아 울기만 했다.
내가 일부러 기운을 조금씩 흘렸지만, 그는 내 기운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극도의 슬픔에 잠겨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와 의제, 한해북 그리고 금예지는 돌아가며 왕대를 감시했다.
왕대는 왕대고, 우리는 또 할 일이 있다.
한해북이 염동에 가둔 노예들이다.
빠르게 불에 탄 염우촌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수습했다.
고작 한나절 동안 모은 돈과 금은보화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노예들의 피땀으로 축적한 부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던 염우촌이었다.
우리는 그 돈과 보물들을 들고 염산으로 향했다.
곧바로 염동을 막은 바위를 치웠고, 그러자 노예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화문의 마악치입니다.”
딱 그 말 한마디였다.
그런데 수십 명에 달하는 노예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오열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힘들었던 삶과, 이제는 살 수 있다는 기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듯하다.
금예지와 의제가 서둘러 공평하게 돈과 보물들을 나눠 주었다.
그들은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입단속을 몇 번이고 당부하였다.
뭐, 이들이 입단속을 한다고 해도 염우촌의 일은 곧 번져 나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노예들은 우리를 향해 몇 번이고 큰절을 하며 고마움을 표하고 떠났다.
이제 그들은 자유다.
*
“엉엉엉, 엉엉엉. 으어어어엉.”
이튿날이 되어서도 왕대는 그저 울기만 했다.
우리도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눈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이튿날 저녁.
의제와 한해북은 염우촌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수습 중이다.
아무리 나쁜 이들이라 하여도, 죽었으니 제사는 지내 줘야 하지 않겠나.
금예지는 이웃 마을에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떠났고.
내가 왕대를 지켜보는 그때였다.
왕대를 지켜보던 또 다른 눈이 움직였다.
절뚝이는 걸음이었지만 뒷짐까지 지고 여유롭게 왕대를 향해 다가가는 노인.
우리가 마을에 와서 이튿날 마을을 돌다 마지막에 본 그 노인이다.
그리고 그가 곧 칠혈자(七血子) 구양봉막이다.
“왕대야.”
“끄어억. 엉엉엉. 으엉엉엉.”
“왕대야.”
노인이 재차 부르자 왕대의 울음이 뚝 그쳤다.
여전히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지만, 그 울음소리만큼은 멈추었다.
두려움과 놀람 등 복잡한 심경이 가득 담긴 눈으로 왕대가 노인을 바라보았다.
“잘했는데 어찌 우느냐?”
“엉엉엉, 주인님. 엉엉엉. 죄송합니다, 주인님. 엉엉엉.”
이상하다.
주인님이라니?
바로 그제 대염중소에서 소금 거래가 있던 날, 왕대도 다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소금을 날랐다.
그리고 그에게 별의별 욕을 다하며 재촉했던 사내를 향해 왕대가 ‘주인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오늘, 왕대는 구양봉막에게도 ‘주인님’이란 호칭을 썼다.
의아하면서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심리적으로 그에게 지배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
“쯧쯧쯧.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어쩌냐? 이제 너는 천하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너는 무적의 아수라혈천신공을 익혔느니라.”
“엉엉엉. 죄송해요, 주인님. 엉엉엉.”
“무엇이 죄송하단 말이냐? 답답한지고. 당장 일어나 아수라혈천신공을 천하에 알려야 하거늘. 왜 이러고 있어?”
“엉엉엉. 제가…… 엉엉엉. 사람들을…… 엉엉엉. 죽였어요. 엉엉엉. 엉엉엉.”
“하아! 참 나,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네 여동생을 죽인 놈들이 아니더냐? 너와 많은 이들을 때리고 욕하며 노예로 부려 먹은 악마들이니라. 잘했다. 잘했어. 당연히 죽어야 할 놈들을 죽인 거야.”
“엉엉엉. 엉엉엉.”
“쯧쯧, 됐다. 오늘은 돌아가마. 하지만 빨리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세상엔 악인이 너무 많아. 네가 그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그것이 곧 네 여동생의 복수를 하는 길이고, 그것이 곧 아수라혈천신공을 천하에 알리는 길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엉엉엉. 엉엉엉.”
“쯧쯧. 한심한지고. 됐다. 내일 다시 오마.”
왕대의 상태가 너무 심각한 것을 인지한 구양봉막이 연신 혀를 찬 후 걸음을 되돌렸다.
그리고 그가 왕대로부터 얼마쯤 떨어졌을 때.
“누, 누구……? 엇! 넌…… 너는 분명 그때의 그 얼뜨기 초짜 상인……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 것이냐?”
놀란 눈을 뜨고 나를 보는 놈을 생포해 염동에 가뒀다.
*
염우촌 혈겁 사흘째.
새까맣게 타 버린 마을의 중심에 마른 장작이 작은 산을 이룰 정도로 쌓여 있다.
그냥 쌓은 나무들이 아니다.
음양오행과 팔괘의 묘리를 담아 정연하게 쌓은 탑이다.
그리고 그 높고 길게 늘어선 탑 위에 수백 구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다.
왕대에 의해 죽은 염우촌 마을 사람들과 상인들의 시체다.
시체의 탑 앞에는 내가 새벽부터 정성스레 준비한 제단까지 준비가 됐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억울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분통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남은 가족들 때문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모두 잊으라고, 다 잊고 떠나라고.
죽으면 다 가야 한다고, 그렇게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달랬다.
제사를 지내면서도 참 슬펐다.
나쁜 이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시체가 잠을 자듯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쪽이 쓰리듯 아팠다.
왕대에 대한 아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슬픔과 아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다! 저기 사람이 있다!”
무려 이백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불에 모두 타 버린 마을을 보며, 또 탑 위에 길게 늘어진 시체들을 보며, 그들은 놀람과 두려움 또 적개심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경계하며 다가왔다.
난 지내던 제사를 잠시 멈추고 그들을 향했다.
왕대를 지켜보고 있는 의제를 제외하고, 금예지와 한해북이 서둘러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곧 이백여 무인들이 우리와 석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복잡한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세 걸음 앞으로 나와 조심스레 나를 향해 말했다.
“감숙 용남 무문연합회의 회주 종우검 숙손승이라 하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오?”
이미 대충이라도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다.
어쩌면 슬퍼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본 모양이고.
숙손승이란 자는 우리에 대한 경계심을 대부분 죽이고,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나 역시 참담한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
“혈겁이 있었습니다.”
“혈, 혈겁이오? 아니, 그건 그냥 봐도 알겠는데…… 도대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흉수가 누구요?”
“이 마을에서 노예로 살던 자입니다.”
“노, 노예?”
숙손승은 물론, 그와 함께 온 이백여 무인들의 눈빛이 순간 크게 떨렸다.
이들도 이 마을에서 노예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이다.
“들어보긴 했는데, 진짜로 노예를 부리고 있을 줄은…… 휴우.”
“이미 일은 끝났고, 저는 보시다시피 죽은 분들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제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일단 제사부터…….”
숙손승이 말을 하다가 말고 나와 우리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더니 더 조심스러운 자세로 내게 물었다.
“실례지만 도사님과…… 함께 계신 분들은 어디에서 오신 누구십니까?”
“현화문의 마악치라고 합니다.”
“복건 대두장의 한해북이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파의 금예지라고 합니다.”
“봉…… 봉황검! 허걱!”
쿠당탕.
얼마나 놀랐는지, 무려 일대 지역의 무문연합회 회주라는 자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넘어지기까지 했다.
우리가 아미파에 머물고, 또 이곳으로 이동하고, 다시 염우촌에서 지냈던 며칠 사이.
우리 예지의 명성이 더 널리 또 크게 천하에 진동한 모양이다.
아무튼 덕분에 제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제사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있었던 혈겁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고 하니, 숙손승은 적극적으로 우리 일을 도왔다.
융남 일대의 문파와 세가에 사람을 보내 추가로 무인과 인력을 보내게 했다.
산소를 만들어 시체를 매장하는 일부터, 다 타 버린 마을의 수습.
임시 막사도 지어졌고, 음식도 넉넉하게 만들어 줬다.
거기에 더해 삼사백에 달하는 무인이 하루 열두 시진 꼬박 염우촌을 철통같이 경비했다.
숙손승과 용남 무문연합회 덕분에 조금 더 수월하게 우리가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염우촌의 장례와 이런저런 일들이 대충 마무리되고, 나는 홀로 염동을 찾았다.
며칠 동안 홀로 어두운 염동에 갇혀 있던 구양봉막을 찾아온 것이다.
“시작할 시간이다.”
내 차가운 음성에 구양봉막의 두 눈이 크게 떨렸다.
목소리마저 떨며 나에게 물었다.
“무, 무엇을 말이냐?”
난 그런 그에게 씨익,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