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광마일기>>
(상략)
그날도 우리 사패천의 천주전에서 큰 연회를 벌였다.
이백여 명의 핵심 수하들이 있었고, 또 수많은 악사와 무희 그리고 기녀들이 함께했다.
“천주님! 대마왕이 되었던 그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는 수십 번도 더 해 줬잖아.”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들을 때마다 큰 감동입니다, 천주님.”
“네! 부탁입니다. 들려주십시오, 천주님!”
“천주님께서 대마왕이 된 신화가 듣고 싶습니다!”
“저도요!”
이름도 모르는 어느 수하 녀석이 그리 외쳤고, 곧이어 모두가 내 이야기를 재촉했다.
“하! 뭐, 별거 있나? 대마두의 왕! 크하하하! 본좌가 막 스물네 살이 됐을 때였지.”
“와아아아아!”
“본좌는 이미 대마두의 왕인, 대마왕이라 불렸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거야. 감숙에 새로운 대마왕이 나타났다고. 진짜 무시무시한 대마왕이라고.”
“오오오오오.”
“어디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있나?”
“없습니다!”
“곧바로 감숙으로 달려갔지. 의제 녀석과 단둘이서 말이야.”
“오오오오.”
“한데, 그 녀석 대단한 녀석이었어. 믿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고.”
“저희는 천주님을 믿습니다! 하늘이 내리신 천주님께서는 무적이십니다!”
“됐다. 아무튼 그 시산마검이란 녀석, 그놈과 칠주야를 싸웠다. 진정한 대마왕이 누군지 천하에 보여 주려고. 본좌야 말로 진정한 천하제일악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칠주야의 처절한 싸움 끝에, 아수라혈천신공을 대성한 놈의 목을 벨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
“천주님 만세!”
“와아아아아!”
“천주님 만세! 만세! 만만세!”
(중략)
언제나 나는 내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이야기했다.
지금 죽어 가는 순간임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유치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돌아 버릴 것 같다.
그리고 시산마검.
그의 이름은 왕대다.
순박하고, 착하고, 겁이 많았던 그냥 시골 청년이다.
젠장.
그놈을 생각하니 또 남아 있지도 않은 양심과 죄책감이 되살아나려 하는군.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미안했던 일 중 하나가 녀석에 관한 일이다.
(중략)
감히 나에게 덤빌 생각조차 못 하던 정파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뜸하기만 하던 놈들이 이번엔 큰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진짜 죽이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몸을 피했다가 반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미 대마왕이라 불리던 나였고 그 이름의 값어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산마검이란 말이 들려왔다.
자신이 살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몰살하고, 감숙의 열 몇 개 마을마저 죄다 연달아 몰살한 마두의 신성이 등장했다고.
어쩌면 그가 진정한 마두들의 왕이 될지도 모른다고.
핑곗거리가 좋았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의제와 함께 감숙으로 향했다.
사실 핑계였고, 정파 놈들의 연합 추살대로부터 잠시 몸을 피하려던 게 진짜 이유였다.
(중략)
피칠갑을 한 사내, 삼십 대 중후반의 사내가 덜덜 떨고 있었다.
순박한 눈망울로 겁에 잔뜩 질려, 그렇게 어느 산자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녀석을 발견했다.
설마 그가 나와 악명을 나란히 떨치는 시산마검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중략)
“잘못했어요, 주인님. 때리지 마세요.”
“제 여동생은 어디에 있나요?”
“여동생이 보고 싶어요.”
“아! 아!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열심히 할게요. 내일은 일을 두 배로 할게요. 배가 고파요. 밥 좀 주세요.”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아저씨, 아줌마. 저 죽기 싫어요. 데려가지 마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처음엔 언어 장애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말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그렇게 두려움에 덜덜 떨며 계속 혼잣말을 해 댔다.
광인(狂人)이었다.
마공(魔功)의 부작용일까?
그는 주화입마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너무나 슬펐다.
내 가슴이 무너져내릴 정도로 그는 극도의 두려움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중략)
난 덜덜 떨며 혼잣말을 하는 그를 두고 한나절을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런데 그때, 그를 죽이려는 추살대가 몰려왔다.
나와 의제가 말리기도 전, 추살대는 곧바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실력의 추살대였다.
오히려 봉인된 악귀를 깨워 버리고 말았다.
울고 불며 덜덜 떨기만 하던 시산마검의 몸에서, 아수라혈천신공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삼백 명에 달하는 추살대를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몰살시켰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광인이 된 그, 맹수가 된 아수라혈천신공의 시산마검이 곧바로 움직였다.
오로지 살욕(殺慾)의 본능만이 그의 온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찾아, 그저 죽일 대상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대로 두면, 또 수백 수천 명이 죽어 나갈 터.
결국, 내가 그를 막았다.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시산마검이 더 이상 죄업을 쌓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싸웠다.
난 시산마검, 아니 왕대와 그날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넘게 싸워야 했다.
죽을 고비만 수백 번 넘겼다.
마공이, 아수라혈천신공이 실로 얼마나 무시무시한 신공인지 깨닫게 되었다.
싸우는 내내 도망가고 싶었을 정도였고, 실제 도주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는 강했다.
진정한 힘(力), 순수한 무(武), 극한을 넘어선 초인(超人)이 무엇인지 그때 깨달았다.
내가 초절정 극상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왕대는 죽었다.
(중략)
큰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와 의제를 죽이려 했다는 정파 연합의 추살대.
그들이 실제 조직되지 않았다는 말을 한참이 지나 들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그리고 덜덜 떨며 울고 있던 시산마검을 자극해 그 마음속 악귀를 깨우게 만들었던, 시산마검에 의해 순식간에 전멸했던 그 추살대는 급하게 모은 삼류 낭인들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추살하려던 대상이 시산마검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찝찝함이 계속 남는 사건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일부러 그곳에 몰아넣었다는 찝찝함.
그보다, 도저히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광천마제가 되고, 사패천의 천주가 된 후에도.
그 산기슭 아래에서 홀로 웅크려 덜덜 떨며 울고 있던 왕대의 눈망울이 계속 떠올랐다.
(중략)
수하들을 시켜 시산마검 왕대에 관한 조사를 시켰다.
왕대는 지적장애가 있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한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었다고 했다.
염우촌에 팔려 온 두 남매.
황법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와 노예를 부리는 일은 모두 금기되었다.
하지만 염우촌에서는 은밀히 그러한 일들이 관습처럼 이어져 오고 있었다고 한다.
두 남매 말고도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마을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고.
(중략)
열한 살이었던 여동생은 동네 사내들에게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당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머리가 모자란 왕대였지만, 분명 그러한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중략)
도망가다가 마을 사람에게 잡히면, 심지어 이웃 마을에서까지 도망가는 노예들을 잡아다가 주인집으로 넘겼다고 한다.
(중략)
어느 날 갑자기 왕대가 마공을 익힌 마인이 되었고, 그 힘은 실로 가공하여 인근의 고수가 힘을 합해 덤볐지만,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다고 한다.
공동파의 장로 두 명이 죽고, 제자만 수십 명이 죽은 후에는 명문대파라는 곳에서도 그를 어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중략)
열세 개 마을의 수천 명을 몰살시키고, 그를 잡고 죽이려던 무인들 역시 일천 명이 넘게 죽었다.
(중략)
천안천이 공손병이 중요한 정보를 입수해 왔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내가 시산마검을 만났을 당시의 정확히 삼십 년 전.
당시 곤륜파가 있는 청해와 공동파가 있는 감숙 일대에서 일대 소란이 일었다.
마교의 천마비고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고 있던 금기 마공인 아수라혈천신공을 훔쳐 도주한 칠혈자(七血子) 구양봉막이란 자를 잡으려던 소동이었다고 한다.
곤륜파와 공동파 그리고 마교의 추격대가 그를 쫓으며 청해와 감숙 일대에 큰 소란이 있었다.
결국 구양봉막이란 자를 추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보존하여 탈주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시산마검의 여동생이 죽기 삼 년 전의 일이며, 왕대가 시산마검이라 불리기 삼십 년 전의 일이다.
(중략)
지금 광천동에서 죽어 가는 이 순간까지 그때의 그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순수했고, 천진했던 왕대의 눈.
더없이 슬펐던 눈.
두려움에 웅크려 덜덜 떨던 모습까지.
지금껏 내가 수백 수천 명을 죽였다지만, 그중 가장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이를 꼽으라면 시산마검 왕대일 것이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양심과 측은지심이란 것이 되살아나 나를 아프게 한다.
만약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만,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왕대를…….
(하략)
*
아미파를 떠나 감숙 용남 염우촌(鹽牛村)으로 가는 길이다.
염우촌의 옛 이름은 와우촌(臥牛村)이다.
마을을 둘러싼 산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오래전부터 그리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산촌과 다름없이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에서 염산(鹽山, 소금산)이 발견됐다.
소금은 그들에게 부유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때부터 와우촌은 주변 산촌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고, 마을의 이름마저 염우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염우촌 사람들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소문과 다르게 염산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거기에 더해, 동굴을 깊이 파고 들어가야 소량의 소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그 고된 노동으로 인해, 소금 채취를 포기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어느 집에서 죄수 한 명을 노예로 사 왔다.
황법으로 엄연히 금지된 인신매매였고 노예를 부리는 일이었지만, 감숙은 변방에서도 변방이어서 황법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노예였지만, 그 노예는 많은 일을 해 주었다.
곧 노예의 주인은 편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외지에서 노예를 사들여 부리는 일을 시작했다.
벌써 오십 년이 넘게 이어져 온 염우촌의 관습화된 일상이었다.
작금에 이르러는 그 노예의 수가 수십 명에 달하고 있었다.
이건 광마일기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라, 이곳으로 오기 전 개방에서 얻은 정보다.
그렇게 난 개방에서 얻은 정보를 재차 읽어 확인한 후 품속에 넣었다.
말을 천천히 몰며 염우촌으로 가는 길.
내 나이도 어느덧 스물네 살이 됐다.
딱 이 시기, 시산마검을 만났고 그를 죽였다.
동시에 초절정 극상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이번엔 어떤 방법으로 초절정 극상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내가 처음으로 원래의 내 무공을 되찾은 건 천무휘 때다.
천무휘와 검을 마주하면 무공을 되찾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천무휘가 적수노사 동탁방을 향해 극도로 분노했을 때 내 절정의 무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 회귀부터는 더 쉬웠다.
천무휘를 보면, 그 즉시 절정의 경지가 나에게 되돌아왔다.
그런데 백두산에서는 또 달랐다.
미리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했다.
그렇게 백두신령을 만났고, 백두신령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내게 초절정의 경지를 되돌려 주었다.
금제의 실을 한 가닥 끊고 내게 초절정의 경지를 되찾게 해 준 것이다.
심지어 일 갑자라는 백두산의 순수하고도 웅장한 기운을 내공으로 변환해 보태 줬다.
이제 시산마검이다.
아니, 왕대다.
그를 만나 초절정 극상의 경지를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을 모르겠다.
아미파에서 감숙 염우촌으로 가는 길 내내 그 생각에 빠져 있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응? 아! 당연히…… 네 생각하고 있었지. 하하.”
“에이, 거짓말. 헤헤헤.”
그래, 일단 가자.
가서 부딪쳐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나.
이제 초절정 극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