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 긴 줄이 늘어선 면왕식당.
난 식당 안에서 살왕과 오살에게 아쉬운 작별을 고하였다.
참, 진짜 눈물 많고 감성 충만한 노인네들이다.
꺼억꺼억 울어 대는데, 더는 내가 버티기 힘들어 그렇게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내가 면왕식당을 떠나기 전날 밤.
나와 살왕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비정검사 오화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였다.
그렇게 계책을 모두 수립한 후.
“맹주가 아저씨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천하는 나를 이미 잊었고, 우리는 코에 수염이 나기 전부터, 수가 틀어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수련을 계속해 왔거든.”
“식당이 이제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어요. 아깝지 않아요?”
“잘 알면서 자네가 그런 말을 하는가? 자네에게 전수 받은 국수 비법과 식당 운영법이면, 천하 어디를 가서든 떼부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일세, 허허허.”
“어디로 가실 건데요?”
“아무래도 새외가 안전하겠지.”
“기왕 가실 거면 고려로 가세요. 백두산 기슭에 마을이 여러 개 있는데, 백두산 산신령이 그 일대를 모두 보호해 줘요.”
“산신령? 허허. 자네가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는가? 뭐, 고려해 보지. 고려도 좋고, 서장도 좋고, 몽고도 좋고. 어디든 국숫집 하나 할 자리 없겠나?”
“꼭…….”
“…….”
“꼭 살아서…… 국숫집 다시 여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약속 꼭 지킬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시게, 허허허.”
이 할배들한테 옮았나?
그날 내 눈에서는 둑이라도 터진 듯 그렇게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
어느 외딴 산길에서 구지개를 만났다.
사마준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남 신양으로 가 정륭방과 그 쫄따구 문파들을 박살을 내버렸다.
그러자 무림맹에서 원소라는 자가 고수들과 함께 접근했고, 우리는 원소를 따라 무림맹으로 향했다.
*
지루했던 용봉지회의 시간이 이어졌고, 무림맹주와 독대도 다시 가졌다.
똑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용봉마렵.
내가 삼백여 명의 후기지수들을 이끌고 마두 사냥을 나서는 날이다.
들뜬 녀석들, 겁먹은 녀석들, 흥분한 녀석들까지.
내 뒤를 따르는 후기지수들의 모습은, 광마일기에 적힌 대로 가지각색이었다.
오중체와 표필공은 역시나 의제와 한해북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연신 ‘형님!’, ‘형님!’ 소리를 하고 있고 말이다.
-마두는 어디쯤에 있습니까?
내가 전음으로 원소에게 물었다.
-곧 도착합니다. 저 절벽을 지나면 판당협이라는 협곡이 나오는데, 그곳에 숨어 내상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원소 이 양반.
그냥 잘해 줬다.
나쁜 놈이긴 하지만 곧 죽을 양반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냥 원래처럼 존대도 해 주고 그냥 잘해 줬다.
우리의 일정 역시 지금까진 전생과 같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후기지수들을 향했다.
다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움직이고 있다가, 내가 걸음을 멈추자 모두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휴식! 운기조식도 하고, 긴장도 풀고. 아무튼 내가 ‘됐어’라고 말할 때까지 휴식!”
나름 그 지역에서는 천재 소리 듣던 녀석들이다.
당연히 한두 시진 걸었다고 지칠 아이들은 없다.
내 갑작스러운 휴식 명령에 다들 의아해했지만, 그냥 따랐다.
그렇게 우리의 무기한 휴식이 시작되었다.
일 각이 지나자.
“마 도사님, 이제 출발해도…….”
원소가 뭔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재촉했다.
“아니. 좀 더 쉬어야 합니다.”
다시 일 각이 지났다.
“이제 충분히 쉴 만큼…….”
“아직.”
다시 일 각이 더 지났다.
“이러다 마두를 보지도 못하고 날이 샐지도 모르겠습니다, 마 도사님.”
“아직.”
“혹,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왔다.”
다그닥다그닥.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두 대의 수레를 이끌고 빠르게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후기지수 몇몇이 경계 태세를 갖추었으나, 내가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하자 그저 의아한 눈으로 볼 뿐이었다.
그리고 곧, 수레에서 삼백여 개의 피독면이 나왔다.
내가 하오문에 의뢰해 미리 구비한 상품의 피독면이다.
이거 구하느라 돈 많이 썼다.
“자! 첩보에 의하면 마두가 독을 쓴다고 한다. 어떻게 착용하는지 충분히 사용해 보고, 모르면 옆 사람에게 물어보고! 다들 빠르고 완벽하게 착용할 때까지 출발하지 않겠다. 모두 실시!”
“넵!”
독은 무림인에게도 두려운 존재다.
사천당가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이유 역시 독이다.
마두가 독을 쓴다는 말에, 그 어떤 후기지수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피독면 착용 훈련에 돌입했다.
그렇게 다시 일 각이 지났다.
“마 도사님, 피독면 착용 훈련은 충분한 것 같은데요.”
“아직.”
“이러다 정말 날 새겠습니다.”
-고작 다친 마두 한 명 잡는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 왔다.”
순간 저 멀리서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금예지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신법을 펼치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예지야!”
내가 소리를 치자, 모두의 시선이 금예지에게로 쏠렸다.
금예지는 재차 엄청난 도약으로 삼백여 후기지수들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어 내 앞에 착지하였다.
후기지수 사이에서 얕은 탄성이 새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예지야, 와 줬구나.”
“어머, 오빠. 내가 올 줄 알았어?”
“응. 어제 꿈에 봉황이 검 한 자루를 들고 날아와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해 주더라고.”
“뭐야, 안 보던 사이 농담만 늘었어.”
“하하. 그래도 좋고, 아니라도 좋고. 널 보니 너무 반가워서 그래, 하하하.”
“나도, 헤헤.”
“자! 모두 출발한다! 대열 갖추고!”
“넵!”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마두 사냥에 나섰다.
*
쾅!
콰콰콰콰쾅!
퍼퍼퍼퍼펑!
콰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쾅!
삼십이마적단 중 한 명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스물두 명이 있다.
지난 생에서 이 싸움에 나는 쉰 명가량의 후기지수를 잃어야 했다.
내 내공도 고갈되고, 의제와 한해북은 중독에 내상까지 심각하게 입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다르다.
상품의 피독면을 모두 갖추었다.
내가 선공을 날렸고, 곧바로 금예지가 합류했다.
독에 중독되지 않은 의제와 한해북은 마구잡이로 적들을 쓸어 갔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예지.
후기지수들과 또래인 그녀.
그녀의 신위는 역시나 경악 그 자체였다.
후기지수들이 우리를 도와 싸울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그녀의 엄청난 신위를 보는 것에 정신이 없었다.
“오중체! 표필공! 기월제! 원소 그 인간 도망가지 못하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앗! 넵! 죄송합니다, 형님! 단단히 붙잡고 있겠습니다!”
원소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두는 여유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번 싸움은 일 각이 넘어가기도 전에 끝을 맺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우리 예지의 검에서 열두 번의 검강이 연달아 쏟아졌고.
이미 전의마저 상실했던 남은 마두들이 그렇게 생의 끝을 맞이했다.
완승이다.
한 명도 죽지 않았음은 물론, 다치지도 않았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아미파에 봉황이 나왔다!”
“금예지 여협이다!”
“와아아아!”
싸움이 끝나자 정신을 차린 후기지수들.
한 녀석이 환호하기 시작하니, 곧바로 삼백여 아이들 모두가 펄쩍 뛰기까지 하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
오늘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금예지였다.
하지만 즐거워할 때가 아니었다.
“다들 동작 그만!”
내 호통에 모두가 입을 닫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진을 형성하고 주위를 경계하라!”
“넵!”
나이는 또래지만, 이미 나는 저들에게 같은 항렬의 존재감을 넘어섰다.
내 명령에 즉각 아이들이 긴장하여 원형의 진을 펼치며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쉬이이이이이익!
절벽 위에서 빡빡머리 권술가가 아이들이 뭉친 곳을 향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예지야, 저놈은 내가 막을 테니…….”
“알았어, 오빠. 위에 놈들은 내가 보고 있을게.”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
콰콰콰콰콰콰쾅!
아! 손쉽다.
예지 덕분에 내공을 아낄 수 있었다.
빡빡머리 권술가, 소림의 냄새가 짙게 나는 권술가 녀석을 일 수에 물리칠 수 있었다.
피떡이 되어 즉사했다.
난 피떡이 되어 죽은 대머리 앞에 착지해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은 여덟 명.
놀라워하고 있다. 또 갈등하고 있다.
싸워야 할지, 그냥 떠나야 할지.
하지만 놈들은 전자를 택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과 자신감이 대단한 놈들인가 보다.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수련해 저럴 테다.
하지만 그건 놈들의 치명적 실수였다.
“예지야! 의제! 한 형!”
“어!”
“네!”
나와 우리가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고, 놈들 여덟 역시 우리와 동시에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콰콰콰콰콰콰콰쾅!
삼존하구룡협과 우리의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예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던 놈들이다.
그런데 이번엔 멀쩡한 나와 의제, 한해북까지 가세했다.
놈들이 오래 버틸 수 없는 이유다.
사실, 한두 놈은 생포하려 했다.
쉽지 않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놈들이 마지막 순간 동귀어진의 수법을 썼고, 이내 우리의 도검에 자신의 몸을 던져 버렸다.
뭐, 살려 고문을 한들, 대단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놈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
싸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예지는 이번에도 봉황검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순식간에 수룡검 천무휘에 필적할 만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맹주는 이번에도 원소를 처형했다.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또다시 나를 집요하게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당연히 거절했고.
난, 금예지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의제와 한해북만을 대동하여 무림맹을 떠났다.
*
아미파로 가는 여러 갈래의 길 중, 우리는 이번에도 비교적 한적한 섬서를 통해 사천으로 넘어가는 방향을 택했다.
그렇게 이름도 없는 어느 산의 산기슭을 지날 때다.
인적이 없는 외진 곳임에도, 생뚱맞게 국숫집이 보였다.
“의제, 한 형, 우리 국수 한 그릇 먹고 갈까?”
“좋죠.”
그렇게 그곳으로 들어가 한 그릇씩 깨끗하게 비운 후 국숫집을 나서려…… 이런!
“형님!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저 한 그릇 더 먹어도 될까요?”
“저도 한 그릇 더 먹겠습니다. 이거, 이런 곳에서 팔 국수 맛이 아닌데요? 독이 들었다고 해도 먹겠습니다, 하하.”
“그래요, 한 형. 바쁜 길도 아닌데, 한 그릇씩 더 합시다.”
“이보시오, 주인장.”
한해북의 부름에 대머리에 초라한 몰골의 노인네가 조르르 달려왔다.
“네에. 갑니다.”
초라한 외모와 달리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덩달아 의제와 한해북도 그냥 웃었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아까부터 국수 삶는 모습도 봤는데, 계속 웃고 계시더라고요.”
“내 국숫집이 있고, 내 국수를 맛있게 드셔 주시는 손님들이 계신 데,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하.”
“하하, 국수가 맛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 기분까지 좋게 하는 국숫집이군요.”
“고맙습니다, 손님. 계산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저희 두 사람 한 그릇씩 더 먹을게요. 아! 그리고 혹시 술이나 안주도 있나요?”
“술은 화주가 있고, 안주로는 육수를 낼 때 함께 삶은 수육이 있습니다.”
“와! 좋네. 그것도 함께 주세요.”
“네에.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국숫집 주인 노인네가 다시 숙방으로 갔다.
곧바로 요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의제와 한해북이 다시금 짙은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기 전, 훈풍이라도 부는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