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나를 죽이려 하더군. 제자를 잃은 사부가 또 나를 죽이려 했어. 문주를 잃은 문도들, 연인을 잃은 여인. 친구, 형제, 가족, 동료, 전우…… 내가 한 번 살행을 다녀올 때마다 나를 죽이려는 자는 수도 없이 늘어났다네. 그래서…… 너무 무서웠네. 죽을까 봐.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잔 적이 없었다네.”
이 남자, 살왕.
광천마제 시절 나와 너무나 비슷한 삶을 살았다.
“죽기 싫어서, 너무 무서워서 그랬네, 허허. 천하의 살왕이 죽음을 두려워하다니. 하지만 나도 사람일세. 죽는 건 무서웠다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내가 극악무도하고 악랄한 살왕이라고. 감히 나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그걸 보여 주려고 죽은 자 옆에 표식을 남겨 둔 것일세.”
“쇠꼬챙이요.”
“그렇지. 그 쇠꼬챙이는 사실 나도 무섭다고, 나도 두렵다는 내 속마음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르지.”
지금 이맘때의 광천마제 시절 내가 그랬다.
죽기 싫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더 이상 도망 다니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보이는 족족 다 죽이고 다녔다.
정사를 불문하고, 내게 칼을 들이대는 놈들은 그냥 다 죽인 것이다.
살왕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억도 안 나는 광천마제 시절의 내가 떠올라 괜히 마음이 쓰렸다.
“아까 육시경 이야기했지?”
“아, 네.”
“자네가 직접 죽이지는 말게. 친구들에게도 직접 죽이라 하지 말고.”
“무슨 사연이 있나요?”
“그래도 아버지 유언 아닌가? 바람이 나고, 배다른 동생도 데리고 오고. 잠깐 밉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끔찍이 아껴 주시던 좋은 아버지셨네. 바람피운 것만 빼면. 허허.”
“유언 때문이군요.”
“그렇지. 아버지 유언. 원래는 우리 천운장을 멸문시킨 살문을 싹 쓸어버리고, 육시경 가족까지 다 죽이려 했네. 당시는 아버지 유언보다 분노와 복수심이 너무 컸거든. 그런데 내가 복수하려고 하는데, 이미 몇 년 전 그 여자와 아버지 친구, 그에 속한 가문과 문파가 죄다 풍비박산나 있더군. 육시경이 제 어미와 새아버지 그리고 그 가족이며 문도며 다 죽인 거야. 내가 왜 그놈을 개마두라 부르는지 알겠는가?”
“아! 완전히 이해됩니다.”
“흐흐. 그래서 그놈을 죽일까 했는데, 그때 아버지 유언이 떠올랐지.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런 미친놈이자 원수의 자식인 놈을 돌봐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때 결심했네. 저렇게 지랄맞게 돌아다니다간 분명 칼에 맞아 죽을 거라고. 그때 최소한 복수 정도는 해 줘야겠다고. 그래야 나도 죽어서 아버지 얼굴을 볼 면목은 있지 않겠나.”
“아! 그런 사연이었군요.”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
그러면서도 지금 대명장에 잡아 두고 있는 육시경을 어찌해야 할지 답을 내리긴 어려웠다.
“정보를 흘리시게. 놈도 나만큼 많은 적을 두었어. 놈이 어디 있는지 살짝 소문을 내면, 놈을 죽이려는 자들이 넘쳐날 걸세.”
“정보를 흘린 자에게는 복수 안 하세요?”
“만약 자네가 아닌 다른 자가 흘렸다면, 덤으로 죽여 줘야겠지. 그래야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조금은 더 당당할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만약 자네와 자네 친구들이 그런 정보를 흘린다면, 괜찮네. 저승에 계신 아버지도 분명 이해할 걸세. 누가 뭐래도 육시경은 패륜에 진짜 나쁜 놈이니까 말일세.”
“아! 그럼…… 죄송하지만 그자를 풀어 주고 그 정보를 흘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그게 천하와 모두의 안녕을 위하는 길일세.”
아! 이게 또 이렇게 쉽게 해결된다.
참, 허탈하기도 하고. 살왕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또 불쌍하기도 하고.
심란하다.
잠시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살왕도 과거를 생각하며 꽤 심란했던 모양이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며, 술을 연신 퍼마셨다.
그렇게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이도 지긋하신데, 아저씨는 제자 없어요? 이 나이 되면 제자가 봉양해 주고 그러는 게 보통 아니에요?”
“말하지 않았나? 우리 살수들은 오로지 돈에 의해 움직인다고. 살수계와 살문은 무림과 일반의 문파와 그 기본 틀 자체를 달리하네. 우리에게 우정이니 사제지간의 정이니, 이런 건 애초에 있을 수도 없어. 오죽하면 사람 목숨으로 돈을 벌어먹겠나? 죄다 지옥 불에 떨어질 나쁜 놈들인데. 제자며 사부며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
“오살 저놈들과 나야 일 갑자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내, 조금은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고. 사실 저 녀석들 머리가 아주 나빠. 일살은 몇 글자 정도는 읽을 줄 아는데, 나머지 녀석들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른다네. 큭큭. 그래서 은퇴할 때 저놈들을 데리고 함께 나온 것이지.”
내가 입을 달싹거리며 말을 할 듯 말 듯 했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다 보니 살왕 눈에 그리 비친 모양이다.
살왕이 그런 내 얼굴을 기이하게 보며 말했다.
“뭔가? 그 말을 하려다 말다 하는 표정은?”
“아, 네. 그게…… 아…….”
“괜찮네. 내 신분을 밝혔네. 더 이상 숨길 게 없다는 뜻이야. 만약 자네가 날 죽이겠다면, 당장 바깥으로 나가 큰 소리로 외치게. 여기 살왕이 있다고.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고, 아침 해가 뜨기 전 이 식당을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포위해 나를 죽일 걸세.”
“…….”
“난, 이미 자네에게 내 생명과 직결되는 일을 말해 주었다는 뜻일세. 무엇이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게나.”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난 조금 더 고민한 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살왕은 그런 나를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맹의 맹주. 창궁검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음…….”
“그가 천하가 모르는 비밀 병기, 아홉 명의 고수를 몰래 키우는 중입니다.”
움찔했다.
모든 것을 말해 주겠다던 살왕이 분명 순간 놀라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에게도 이 사실은 엄청난 비밀이었나 보다.
“휴우. 놀랍군. 마 숙수, 아니지. 마 도사 자네는 보면 볼수록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끝을 알 수 없군. 그건 어찌 알았나?”
“마두들을 잡으러 다니다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허허. 우연이라. 밉기 힘든 말이지만, 자네의 말이니 일단 믿어 보겠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무림에선 삼 할의 힘을 숨기라고, 세가나 문파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고수들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도 아닐세.”
내가 뭐라 말을 하려고 했는데, 살왕이 순간 무언가 떠올랐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제자가 있지 않냐는 질문을 그래서 한 건가?”
“네. 그들 중 살수공을 익힌 자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고작 몇 살 많아 보이는 젊은 자였고요. 엄청나게 강한 자이기도 했습니다.”
“음…….”
살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각하기 싫은 과거를 떠올리는 모습이었다.
“언젠가부터 살수계를 떠나고 싶었네.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은퇴하여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네. 꿈이었지. 국숫집을 운영하며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떠날 수 없었겠네요? 복수하려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랬지. 그런데 그때 그자가 날 찾아왔네.”
“무림맹주요?”
“맞네. 솔깃한 제안을 하더군. 아니,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어. 내 후계자, 살수계에서는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갖춘 아이였네. 그 아이를 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 아이에게 내 살수공을 모두 전수해 주라 했네. 그러면 조용히 은퇴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지난번 내가 죽기 전 광마일기에 기록한 내용과 똑같다.
“첫날 나에게 물었지? 내 목에 현상금 걸린 거 있냐고. 무림맹주가 약속을 지켜 내 목에 현상금이 걸리지 않았고, 또 내 종적을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 거였네. 그 아이와 내 살수공을 건넨 대가였지.”
“…….”
“제자는 아니었지만, 정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네.”
이런 말은 광마일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살왕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삼존하구룡협(三尊下九龍俠)이 될 아이들이라 부르더군. 나도 딱 한 번 우연히 그 말을 들었네.”
아! 이건 비정검사 오화서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광마일기에 그리 기록되어 있다.
“그 아이들은 건들지 마시게.”
“왜요? 면왕 아저씨의 후계자가 될 뻔한 그 아이 때문에요?”
“아니, 그게 아니야. 자네가 위험해서 그렇네.”
“면왕 아저씨. 제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최근에서야…… 초절정으로 판단했네.”
“맞아요. 그런데 그냥 초절정은 또 아니에요.”
살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 갑자가 넘는 내공을 가지고 있어요.”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살왕이 너무 놀라 인상을 와락 구기며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아! 현화문. 현화문에 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사 갑자라…… 허허. 무림의 상식을 벗어나는 괴물 같은 내공을 가졌군, 자네.”
“제가 생각해도 조금 말이 안 되긴 해요.”
“그래도 아닐세. 그 아이들은 건드리지 마시게.”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 삼존하구룡협이란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 뒤에 있는 자들 때문이지.”
“창궁검제요?”
“삼존 모두 위험하네.”
“천수신권, 창궁검제…… 그리고 비정검사 오화서요?”
“헙! 자네…… 자네 정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살왕이 놀람을 넘어 경악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른 후 말을 이었다.
“자네들을 지켜보는 눈이 많다네. 천수신권…… 자네 정말 천수신권과 그 아이들이 얽혀 있음을 어찌…… 휴우. 그건 그렇고. 창궁검제와 천수신권은 보는 눈이 많아 자네들을 어쩌지 못할 걸세. 또한 자네들을 어설픈 고수 따위를 시켜서 제거하기도 힘들 테고. 하지만 비정검사 오화서는 다르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면 아마 화경의 벽을 깨고도 남았지 않을까 싶네. 그자가 나타나는 순간.”
“…….”
“자넨 죽은 목숨이야. 자네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이변은 없다네.”
“그럴 것 같았어요. 방법이 없을까요?”
“없네. 화경의 고수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화경의 고수밖에 없다네.”
“그래도…….”
“마 도사.”
“네, 면왕 아저씨.”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해 주는 말일세. 절대로 그들과 부딪히지 마시게.”
“네. 그럴게요.”
살왕은 진심으로 걱정하며 나에게 그리 말했다.
뭐라고 하겠는가?
노인네가 저리 진지하게 말하는데.
방긋 웃으며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늦은 새벽까지 술잔을 나누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알게 됐지만, 또 내 머릿속은 더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
“점소이 아저씨들 친절도, 복무 태도, 미소, 말투 모두 합격!”
“와아아아!”
“위생과 청결, 합겹!”
“와아아!”
“면왕 아저씨, 오늘의 국수 맛…… 완전 합격!”
“허허허, 어허허허! 고맙네, 고마워. 허허허!”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의 총매출…… 두두두두두두. 은자 아흔두 냥!”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
“와아아아아아!”
노인네 여섯 명이서 서로 얼싸안고 소리 지르고 손뼉까지 치며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면왕식당이 한 달 만에 상전벽해라 할 만큼의 엄청난 변화와 그 성과를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
“정말 내일 떠날 생각인가?”
“네.”
그날 밤, 오살은 오늘도 먼저 만취하여 뻗었다.
나와 살왕만이 남아 술을 마시며 대화를 잇고 있다.
“조금만 더 머무르면 안 되겠나? 마두야 다른 놈들에게 잡으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천하에 스스로 협객이라 자칭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친구들하고 약속한 일이기도 해요. 내일 떠나야 해요.”
살왕이 잠시 입을 닫았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다.
난 그를 기다려 주었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 살왕이 눈에 힘까지 주며 입을 열었다.
“자네.”
“네, 면왕 아저씨.”
“삼존하구룡협과…… 부딪힐 생각 맞지? 내 조언 따위는 이미 버려 버리고.”
“그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잖아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수는 없죠.”
“그렇지. 그건 자네다운 일이 아니지.”
또 고민이다.
하지만 이번 고민은 짧았다.
“삼존하구룡협은 자네가 해치우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아이들은, 자네들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비정검사 오화서는 달라. 보름 전에도 말했지만, 자네들이 상대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네.”
“그러면요?”
“오화서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네? 면왕 아저씨야말로, 보름 전에 면왕 아저씨 스스로 한 이야기를 잊어버린 거 아니에요? 화경의 고수는 화경의 고수만이 상대할 수 있다면서요?”
“살수는 달라. 그리고 나 혼자 놈을 상대할 생각도 없어.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 난 첫 살행을 나갔을 때부터 마지막 살행까지 확률 없는 살행은 의뢰도 받지 않았어.”
“무슨 방법이 있는 거예요?”
“내가 뿌린 씨, 내가 거둘 참이네.”
“설마…….”
“괴물같이 커져 버린 살수계의 살수들을 모조리 끌어다가 오화서와 동귀어진시킬 생각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