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척!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탓!
무를 썰었다.
천무휘의 것처럼 정교하지 않았고, 한해북의 것처럼 예쁜 모양도 아니다.
하지만.
“요리를 많이 해 봤어요?”
백달다는 성공과 실패를 언급하기 전에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네. 사부님을 홀로 모시며, 요리는 제게 일상이었습니다.”
백달다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그러더니.
“고기는 안 썰어 봤죠?”
“네. 사부님과 지낼 때는 육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하하.”
“……?”
“마 도사님, 봐요.”
난 내가 썬 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천무휘나 한해북 것에 비해 썬 모양이 예쁘지 않았다.
그런데.
“살아 있어요. 분명 칼로 무를 썰었는데, 무가 숨을 쉬고 있는 게 보여요. 신기하네요. 이건 나도 하지 못하는 칼질이에요. 아니, 들어 보기만 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백달다의 설명이 이어졌다.
“무인들은 이걸 활검(活劍)이라 한다지요? 사람을 죽이는 칼이 아닌 살리는 칼을 쓴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다고 들었어요.”
내가?
내가 활검을?
광천마제였던, 극악무도한 대마두의 왕이었던 내가?
여전히 내 광천검에서 검강을 뽑아내면 거무튀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데?
“볼수록 훌륭해요, 마 도사님.”
난 더 이상 광천마제가 아니다.
활검을 쓰는 현화문의 도사 마악치다.
“쉽지 않을 거예요. 무공 수련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요.”
“할 수 있습니다. 가르쳐만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정말이죠?”
“넵!”
“그래요. 마 도사님 성공!”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가 빈가식신 백달다 숙수의 국수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천무휘와 의제, 한해북은 곧바로 떠났다.
떠나기 전, 어디에서 어떻게 마두를 잡을지 종이에 적어 상세히 알려 주었다.
다들 어떻게 알았냐고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신통력이란 말 한마디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녀석들이 떠나고, 곧바로 백달다 숙수의 국수 만드는 수업이 시작되었다.
백달다의 말처럼 제대로 된 요리를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검이야 대부분의 수련에서 온 힘을 다해 휘두르면 된다지만, 이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힘을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게 중요했고, 그보다 백달다는 마음을 강조했다.
항시 사부를 생각하며, 또 초향을 생각하고, 다시 우리 예지와 미호를 생각하며 국수를 만들었다.
고작 국수 만드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지만, 밤이 되면 언제나 녹초가 되어 쓰러질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광마일기를 손에 놓을 수 없었다.
혹시 또 죽게 된다면, 다음에 여기 다시 와야 하지 않겠나?
시간이 촉박하다.
지금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우리 세 녀석이 마두를 잡는 석 달이 전부다.
그래서 다음에는 다시 이곳을 찾지 않게, 백달다 숙수의 가르침을 정말 아주 상세히 모두 다 기록하였다.
미친 듯 노력했더니, 두 달이 되기 전 어느 정도 백달다 숙수의 기준에 도달하는 국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도 남은 한 달.
백달다 숙수에게 망하는 식당이 망하는 이유와 이를 살리는 방법, 식당 운영의 전반적인 비법까지 전수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 무림을 영영 떠난다 해도, 멋진 식당 하나 차려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충분한 실력이 되었다.
아니, 내 활검 덕분에.
최고의 국수는 아닐지라도, 그와는 또 다른 훌륭하면서도 이색적인 풍미의 새로운 국수가 탄생하게 되었다.
*
빈가식신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그곳을 떠났다.
난 곧바로 하남으로 달렸다.
그곳에서 석 달 전 약속한 대로 우리 세 녀석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 노파 홀로 객잔이라 하기 애매한 그런 초가에서 십합단 녀석들을 만났다.
우리는 십합단 녀석들과 함께 산서 신창양가로 향했다.
양아치 사건을 모두 해결한 후.
혈철마관 육시경은 죽이지 않고 대명장 뇌옥에 가두었다.
나와 우리 녀석들은 다시 헤어졌다.
구지개, 지금은 독고검문의 소문주가 된 사마준을 만나기까지 두 달이 조금 안 남았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세 녀석은 다시 마두를 잡고.
난 섬서를 향해 홀로 움직였다.
정확히는 섬서 삭주 평로현 대야촌에 있는 면왕식당(面王食堂).
살왕이 그곳에 있다.
*
이번 생, 내 절대적 목표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비정검사 오화서와 훗날 삼존하구룡협이라 불릴 아홉 녀석이다.
아니, 정확히는 비정검사 오화서다.
그자를 죽인다.
왜?
죽이겠다고 했으니 죽여야 한다.
그걸 떠나.
삼존하구룡협은 광천마제 시절 맨 마지막 순간 내 발목을 잡았다.
내가 기나긴 도주를 포기하고 광천동에서 현경이라는 마지막 목숨을 건 도박을 했던 이유가 그놈들 때문이다.
그놈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더 멀리 도주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맹주가 비밀리에 키운 개들이다.
삼존하구룡협은 언제고 내 발목을 잡으려 들 것이다.
없애야 한다.
그들을 내버려 두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을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그걸 다 떠나.
어차피 놈들이 날 죽이려 들 테니, 그때 죽이면 된다.
한 번 겪었기에 지난번처럼 개고생하며 그들을 상대할 필요도 없다.
삼십이마적단과 삼존하구룡협에 대한 대비는 이미 철철 넘칠 정도로 계획해 두었다.
진짜 문제는 삼존하구룡협이 아닌 그들의 스승 비정검사 오화서다.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금예지가 합류한다고 해도 놈을 이길 수 없다.
천무휘가 언제 화경의 벽을 깨어 돌아올지 모르지만, 녀석이 돌아온다고 해도 오화서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부족하다.
오화서는 화경의 경지에서도 꽤 대단하다 할 경지에 올라선 것이 분명하다.
자신에게 조금의 이익이라도 된다면, 맹주의 말에 따라 또 나를 죽이러 올 것이다.
그래서 기필코 죽여야 한다.
이건 전생의 내가 한 다짐이고, 이번 생에 또 다짐한 내 각오다.
하지만 쉽지 않다.
작은 사부나 무적 할매를 부르는 방법이 있지만, 그럴 수는 없다.
무적 할매에게 이런 부탁을 할 수는 더더욱 없고.
내 삶이고 내 업보와 연관된 일이다.
작은 사부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내가 처리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 내 실력으로는 그를 상대할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살왕이다.
이번 생의 두 번째 목표.
살왕을 제거하는 일이다.
계속 이어지는 악연.
한 번이었다면 모르지만, 분명 내가 혈철마관 육시경을 건드린 그 순간부터 살왕과의 악연의 끈은 이미 얽히고 말았다.
그가 원치 않아도, 맹주가 그를 이용해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오화서와는 다르게, 살왕은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그냥 죽일 수는 없다.
날 한 번 죽였던 그다.
그리고 또 죽이러 올 거다.
놈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난, 놈과 살수들을 이용해 오화서를 칠 계획이다.
*
섬서 삭주 평로현 대야촌에 있는 면왕식당.
하아!
면왕식당이라니.
이름 한번 유치하게도 지었다.
본인이 살왕이라 식당 이름을 면왕이라고 지었나?
식당 간판을 보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 짧게 심호흡을 하며 백달다 숙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면왕식당의 문을 열었다.
요리를 하는 숙방에 한 명.
식당에 다섯 명?
손님이 아니다.
손님은…… 한 명도 없다.
다섯 명 모두 점소이다.
그것도 죄다 환갑을 훌쩍 넘긴 점소이.
돌겠네.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냐?
문제는.
널브러져 있다.
나른한 눈꺼풀.
한참 음식을 팔아야 할 정오에, 손님이 앉아 식사를 해야 할 의자를 여러 개 붙여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한 명은 심지어 짜증 섞인 한숨까지 내쉰다.
손님인 내게 인사를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다섯 명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는가 싶더니, 그나마 가장 젊어(?) 보이는 노인 점소이가 설렁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뭘 먹겠나?”
반말까지!
와! 진짜 가지가지 한다.
점소이 친절도, 자세, 복무 태도 실패!
“찬단(餐單, 메뉴판)은요?”
터지려는 울화를 간신히 다스리며 물었다.
그러자 대답 대신 턱으로 한쪽 벽을 가리킨다.
노인 점소이가 가리킨 벽을 봤다.
찬단이 그곳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와아아아아!
멋진 글씨체다.
더없이 훌륭한 글씨체로 국수의 종류가 일흔두 가지나 된다.
무슨 소림사의 칠십이예라도 따라 한 건가?
모를 일이다.
국수 종류가 너무 많아.
아니, 그보다 가격!
가장 싼 국수가 은자 한 냥이고, 가장 비싼 국수는 무려 금자 일백 냥이다.
미친! 미친!
진짜 미쳤다!
금자 일백 냥짜리 국수라니?
와! 망하려고 작정을 했군.
음식 구성과 가격 실패!
“국수 한 그릇 주세요.”
“무슨 국수?”
“한 냥짜리 국수요.”
“금자?”
“은자 한 냥짜리요.”
대답도 없이 그냥 휙 몸을 돌려 숙방으로 향한다.
숙방에서 나를 지켜보던 숙수.
아무래도 저자가 살왕인가 보다.
점소이는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던 것과 달리, 사뭇 긴장된 자세로 숙수에게 주문을 전했다.
열린 숙방이다.
일부러 숙방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살왕으로 추측되는 숙수의 요리를 지켜보았다.
타타타타타타탓.
칼 솜씨는 나무랄 데가 없다.
일수일살(一手一殺)의 살왕 솜씨가 어디 가겠나.
문제는 그 후다.
“후르릅. 퉤.”
국자로 국물을 떠먹더니, 퉤 하고 바닥에 뱉는다.
그러더니 물을 한 바가지 넣는다.
다시 국물을 먹고, 이번에는 소금을 넣는다.
같은 상황이 정확히 세 번 반복됐다.
초보 숙수라면 응당히 지켜야 할 계량을 하지 않는다.
맛에 자신이 있나?
광마일기에는 별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나저나 국수와 함께 살왕의 침까지 먹어야 하나 보다.
자신의 입에 닿았던 국자를 다시 육수에 넣어 휘젓는다.
그럴 거면 숙방을 안 보이게 가리든가.
돌겠네.
그렇게 잠시 후 국수가 나왔다.
보기에는 꽤 그럴듯하다.
냄새도 그럭저럭.
늙은 점소이 다섯 명과 숙수 한 명.
그렇게 여섯 명의 특급 살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마셨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국수를 한 젓가락 떠먹었지만, 시전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파는 면이다.
음식의 맛, 당연히 실패!
숟가락과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여섯 명의 살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식당을 한 바퀴 쓰윽 돌았다.
살왕이 있는 열린 숙방 앞을 지날 때는 걸음까지 멈추어 그 안을 자세히 살폈다.
살왕의 아미가 꿈틀거렸지만, 뭐?
어쩔 건데?
지금 난 손님이다.
두려워할 것 없다.
그렇게 식당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파리는 두말할 나위 없고, 곳곳에 벌레가 지나다니고 거미줄까지 몇 군데 보였다.
탁자와 의자 그리고 바닥은 얼마나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가득 쌓였다.
숙방 안은 더 심각했다.
퀴퀴한 냄새는 기본이고, 요리를 하고 아예 솥이며 그릇을 닦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확실하다.
살수 여섯 명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난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확인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앉았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청결, 위생 실패!
총체적 난국이다.
망하는 식당의 모든 요소를 완벽히 갖추고 있다.
“숙수 좀 나오라고 하시오.”
고요했던 식당.
아니,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돌던 식당 안.
내 말 한마디에 살벌했던 분위기가 극에 달했다.
다섯 점소이가 일제히 극도로 긴장하며 숙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방 안에서 내가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숙수.
아니, 살왕.
내 부름에 그의 몸이 굳었다.
설마 자신을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나 보다.
잠시 고민하던 살왕.
이내 그가 은은한 살기를 풍기며 숙방을 벗어나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렇게 내가 앉은 식탁 앞까지 다가와 선 살왕.
아니, 숙수.
아니, 살왕이다.
숙수의 분위기가 아닌, 살왕의 기운을 풍기고 있다.
난 딱 한 입만 먹은 국수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향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 국수, 발가락으로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