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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두가 된 이유-156화 (156/245)

156화

“형님, 괜찮아요? 어제 맹주전 다녀온 후 상태가 영 아니네.”

“아, 응. 괜찮아.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뭔데요?”

“생각 정리 좀 하고 말할게. 엇? 예지 온다.”

금예지라는 말에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의제와 한해북이 돌변하였다.

나는 순간 투명 인간이 되어 버렸고, 두 녀석은 오로지 금예지를 꿀 떨어지는 눈으로 보며 반겼다.

잠시 후.

“뭐? 남궁무기? 맹주 아들?”

의제가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물었다.

“네, 오라버니. 우리 아미장로원까지 찾아와서 무림맹에 입맹할 것을 얼마나 집요하게 요구하는지. 불편해 죽는 줄 알았어요.”

“사심은 없어 보였어?”

이번엔 한해북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사심요?”

“응. 따로 만나 차를 마시자든가 밥을 먹자든가 하는 말.”

“그렇게 묻긴 했는데…….”

“뭐? 정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의제가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광분해 물었다.

“바쁘다고 했죠. 오라버니들하고 무공 수련도 하고 불경과 도경에 관해 토론도 하고. 할 일 많다고요.”

“풉.”

“큭큭큭.”

금예지의 말에 조금 전까지 세상 무너진 것처럼 심각했던 의제와 한해북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지 말아요. 저 정말 아까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고요. 내일 또 오면 어쩔지 벌써 걱정이라니까요.”

“바쁘다고 해. 아니, 내일부터는 아침밥 먹기 전에 우리 전각으로 와. 여긴 못 오겠지. 놈도 부끄러운 게 뭔 줄 안다면, 하하.”

“그런데 마 오라버니는 왜 심각한 얼굴이에요?”

예지가 근심 어린 얼굴로 나에게 물었고, 조금 전까지 나란 존재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있던 의제와 한해북도 정확히 코딱지만큼만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음, 안 되겠다.

말해야겠다.

“의제, 한 형, 그리고 예지야.”

“…….”

“그만 떠나야겠다, 무림맹.”

순간 세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가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아니, 이미 떠났어야 한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예지 때문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미친 척 눌러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적과 한 지붕 아래 오래 있는 건 위험한 일이다.

굳은 표정의 세 사람에게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예지를 향해 말했다.

“예지야, 너만 좋다면 이제 함께 움직이고 싶은데. 천무휘도 폐관을 깨면 우리를 찾아올 거야. 예전처럼 다섯이서 함께하고 싶어.”

“저도…… 저도 그러고 싶어요, 오라버니들.”

초조, 걱정, 불안, 여하튼 그런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드리웠던 의제와 한해북의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당장 떠나기는 힘들겠지?”

“응.”

“우린 더는 이곳에 머물기 힘들 것 같아.”

“맹주 때문에?”

“응.”

“그럼 오라버니들 먼저 떠나. 내가 사부님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라도 속화 사고께 허락받을게.”

“개방에 우리 위치 남겨 놓을 테니 그리로 움직이면 될 거야.”

“알았어. 최대한 빨리 갈게.”

“그래. 다시 함께하자. 일단 다시 뭉쳐서 아미파로 가 네 사부님과 아미파 장문인께 인사드리고, 정식으로 허락받아 움직이자고.”

“와! 벌써 기대된다. 나도 이제 오라버니들하고 함께 마두를 소탕하고 민초들을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거야?”

“하하! 생각보다 위험하고 짜증 나는 일도 많고 그래.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

“알았어, 오빠.”

우리는 환히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짧은 이별일 뿐이고, 비교할 수도 없이 길고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웃으며 헤어졌다.

*

무림맹이 있는 하남 낙양에서 사천 아미파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우리는 비교적 한적한 섬서를 통해 사천으로 넘어가는 방향을 택했다.

이름도 없는 어느 산의 산기슭.

미리 인근 개방 분타에 우리의 행적을 남겼다.

예지가 찾아올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약속한 장소로 이동 중, 지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으슥한 길목에 다 무너져 가는 국숫집이 하나 있었다.

느낌이 쎄하다.

공교롭게 전 마을에서 다음 마을까지 이동하는 중, 배가 꺼질 순간을 마치 계산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정확한 위치에 있는 국숫집이다.

사실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찝찝했다.

그래서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대머리에 왜소하고 초라한 아주 많이 늙은 주인 혼자서 운영하는 국숫집이다.

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은 각자 한 그릇씩 국수를 시켜 먹었다.

독을 타서 그런가?

맛이 별로다.

아닌데.

이건 무형, 무취, 무미, 무색의 독인데?

기분 때문인가?

아무튼 맛은 별로다.

다시 오고 싶은 국숫집은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계산까지 마치고 국숫집을 나섰는데.

툭. 툭.

의제와 한해북이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의제와 한해북 너머, 늙고 초라한 대머리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살왕이다.

인적 없는 외진 곳에 차려진 국숫집.

전생에 개방을 통해 얻었던, 광마일기에 기록된 살왕에 대한 정보.

살왕이 이십여 년 전 한참 악명을 떨치며 살행에 나설 때 가장 많이 쓰던 그 수법이었다.

“누구냐, 넌?”

“이십 년 전까지 사람들은 나를 살왕이라 불렀다.”

“나에게 왜 이러는 것이지?”

“얼마 전 산서에서 죽은 혈철마관 육시경. 그 아이가 내 동생이다.”

“잠깐! 잠깐! 잠깐만!”

내가 다급히 외쳤다.

전전생에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기감을 제대로 펼쳤다.

아니, 이미 펼치고 있었다.

국숫집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이미 땅속에 숨어 있는 다섯의 기감은 감지 완료했다.

아주 미세하게 그들의 움직임은 물론 기의 흐름까지 감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이들의 기파에 미세한 파동이 일어 내가 다급하게 살왕을 향해 외친 것이다.

곧바로 내 발아래 땅속의 기파가 안정을 되찾았다.

“잠깐! 휴우. 진짜 살왕 맞아요?”

“…….”

“잠깐! 잠깐! 잠깐만요.”

뭔가 다시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려던 살왕이 움찔하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사람 잘못 찾아왔어요. 혈철마관 육시경은 신창양가의 가주 양북달이 죽였다고요. 그리고 양북달은 이미 무림맹에서 처형했고요.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저한테 그러세요?”

내가 짐짓 매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하지만 살왕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답했다.

“무림맹에서 알려 주더군. 내 동생의 정보를 신창양가에 일부러 흘린 자가 있다고. 그게 바로 너라고.”

“잠깐! 잠깐만요! 움직이지 마세요. 어차피 죽을 거, 궁금한 건 좀 풀고 죽자고요.”

살왕이 갈등한다.

어쩌면 이십 년 전의 살왕은 이런 순간 갈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십 년 동안 살행을 멈추었던 살왕이다.

그의 쇠꼬챙이가 충분히 무뎌질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 간절하고도 다급한 말에,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갈등하는 것이다.

그냥 죽일지, 아니면 내 바람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고 죽일지 말이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육시경은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내 동생이니까. 복수는 해 줘야지.”

“저는요?”

“네 가족이 날 찾아와 복수한다면, 나 역시 이해할 것이다.”

“하나만 더요.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

“용봉마렵 소식 들으셨나요?”

살왕은 대꾸 대신 날 쳐다보기만 했다.

들었다는 반응이리라.

“아홉 명의 젊고 말도 안 될 정도로 고강한 고수들이었어요. 그리고 그중 한 명. 분명하게 살수공을 익히고 있었어요. 살왕 당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요?”

“그걸 내가 왜 말해 줘야 하지?”

관계가 있다는 소리군.

“어차피 죽을 건데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 그것만 좀 알려 줘요. 깔끔하게 죽을게요.”

“휴우. 내가 늙긴 늙었군. 죽는 놈 소원을 다 들어주고. 말해 주마. 내가 한참 살왕으로 명성을 떨칠 무렵, 난 동시에 간절히 은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호지세였다. 호랑이 등에서 내리면 오히려 나와 나를 따르던 수하들이 모두 죽게 생겼지. 그래서 계속 살문을 이끌면 끝없는 살행을 이어 갔다.”

살왕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듯했다.

“그때 무림맹주가 나에게 사람을 보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에 저에 대해 말해 준 사람도 맹주겠군요?”

살왕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당시 맹주는 나와 우리 살문의 살수들 모두가 살 수 있는 제안을 했다.”

“무슨 제안이었나요?”

“내 후계자. 나를 이어 훗날 살왕이 될 아이가 있었다. 당시 고작 일곱 살이었지만, 우리 살문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의 무재를 갖춘 엄청난 아이였다. 그 아이를 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 아이에게 내 살수공(殺手功)을 모두 전수해 주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나와 내 수하들 모두가 무림을 떠나 조용한 삶을 살 수 있게 약속해 준다고 하였다.”

“그 아이를 넘겼군요.”

“어차피 살수가 되는 것보다 무림맹 무사가 되는 게 그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해 그리 결정했다.”

“무림맹에서도 살수 노릇 하고 있습니다. 맹주의 개가 되어서요.”

“그 또한 그 아이의 운명이겠지. 내 잘못이라면 내가 그 벌을 받을 것이고. 됐다. 대화는 끝이다. 이제 갈 시간이…….”

“잠깐! 잠깐! 진짜로 마지막 하나만요. 진짜로요. 부탁이에요. 진짜!”

살왕이 처음으로 표정이란 걸 지었다.

아미를 꿈틀하는 게 인내의 한계를 느낀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아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부드럽게 변하고 말았다.

“국수……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살왕이 눈빛으로 나를 묵묵히 쳐다봤다.

“저승으로 가기 전, 저를 위해 국수 한 그릇만 더 말아 주실 수 있을까요?”

“어렵겠구나. 미안하다.”

“귀신이 되어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가기 전, 살왕 당신이 작은 제단에 향을 피우고 국수 한 그릇만 올려 주면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정말 맛있게 먹어서 그랬어요. 저승에 가서도 그리울 엄청나게 맛있는 국수였다고요.”

“그럼…… 그 정도는 해 주마. 약속하마. 오늘 네가 죽고 아흐레가 되는 날, 네 위패를 세우고 향을 피운 후 정성스레 국수 한 그릇 말아 올리겠다. 됐느냐?”

“어디에 사시는데요? 어디 사시는지 알아야 귀신이 되어서도 제가 찾아가서 먹죠.”

살왕이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섬서 삭주 평로현 대야촌에 있는 면왕식당(面王食堂)이 내 집이다. 잘 가라, 아이야.”

그게 끝이었다.

곧바로 내 발아래 땅이 터져 나가며 다섯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난 허공으로 높이 도약하며 그들을 향해 검강을 뿌렸다.

정확히 그들을 향해 다섯 방의 검강을 날렸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냉철한 일 수였다.

그리고.

콰콰콰콰쾅!

다섯 살수는 내 몸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몸통이 터져 즉사했다.

그리고 그때.

그 폭발을 뚫고 쇠꼬챙이 하나가 내 목을 찔러 들어왔다.

쇠꼬챙이 너머로 살왕의 얼굴이 보였다.

잔뜩 찌푸린 인상.

조금 전 죽은 다섯 명 때문이 아니다.

살왕이 나를 향해 몸을 날림과 동시에, 그의 등에 칠연절명침 일곱 개와 무형비침 한 개가 꽂혔기 때문이다.

무형비침이고 칠연절명침이고, 하나만 맞아도 즉사한다고 알려졌다.

살왕의 의지와 집념이 죽음마저 넘어서, 나를 기필코 죽이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모르고 당했다면 모를까.

또 내가 조금이라도 당황했다면 모를까.

다시, 의제와 한해북이 진짜로 혼절했다면 모를까.

아니, 애초에 전전생에 내가 살왕에게 죽은 것 자체가 나의 실수다.

아무리 조력자가 다섯이나 있다고 하지만 전면전으로 살수 따위에게 죽을 내가 아니다.

콰콰콰콰콰콰쾅.

살왕은 정확히 몸의 일곱 군데가 터져 즉사했다.

목의 왼쪽 부위, 양쪽 어깨 등 내 검기가 뻗친 부분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구멍을 내고 그렇게 죽은 것이다.

살왕이 죽어 땅바닥에 쓰러지자, 놀란 얼굴의 의제와 한해북이 서둘러 다가왔다.

“형님, 어찌 아셨습니까?”

“이자가 정말 살왕이에요? 다 들었지만, 너무 놀라서 믿기 힘들 정도네요.”

의제와 한해북 둘 다 크게 놀라고 당황한 얼굴이었다.

국숫집을 발견하자마자 난 전생에 수집한 살왕의 정보를 떠올렸고, 미리 의제와 한해북에게 상세히 어떻게 대처할지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상대가 진짜 살왕이라니, 저렇게 놀란 얼굴들을 하고 있는 것이고.

아무튼 됐다.

살왕은 언제 다시 만나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난 빠르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광마일기에 기록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남루하고 초라한 중년의 사내가, 여섯 구의 시체가 늘어선 이곳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아! 산 넘어 산이라더니.

쟤는 또 뭐야?

의복은 남루하고 꼴은 초라한데, 그 분위기는 무지막지하다.

마치 무림 영웅전에 나오는, 홀로 천하를 떠돌며 무림오대고수니 십대고수니 하는 자들을 죄다 쓰러뜨리는 그런 주인공 같은 분위기다.

젠장!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그것도 아주 아주 많이 좋지 않다.

“누구요?”

“여드레 전 네가 판당협에서 죽인 아홉 아이들의 스승이다.”

젠장!

이번엔 진짜 X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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