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아!
또 심쿵 했다.
나만 심쿵 한 게 아니다.
의제와 한해북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이백여 명밖에 남지 않은 후기지수들.
모두 금예지와 또래다.
이 녀석들이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하나같이 심쿵 한 얼굴로 우리들의 첫사랑을 바라보고 있다.
“오빠, 괜찮아?”
그녀가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뒤에 있는 나에게 물었다.
“어? 어. 내기가 고갈돼서 좀 힘들긴 한데. 금방 회복할 수 있어.”
“늦어서 미안해.”
아! 우리 예지는 역시나 마음씨마저 곱다.
“아니야. 와 줘서 고마워, 예지야.”
“조금만 기다려, 오빠.”
“어. 무리하지 마.”
“응.”
절벽이 무너지고, 땅은 터져 나갔다.
사방에 피가 뿌려지고 시체가 나뒹구는 현장이다.
그렇지만 모두 숨죽여 나와 금예지의 대화에 귀를 곤두세웠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인상을 찌푸린다.
갑작스레 등장한 금예지 때문에 약간의 내상을 입은 듯하다.
뭔가 짜증을 내며 금예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막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쉬이이이이익!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금예지의 검에서 검강이며 화강, 불의 검강이 쏟아져 나왔다.
어마어마했다.
상대는 화들짝 놀라, 막을 생각조차 못 하고 몸을 날려 피했다.
하지만 금예지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불의 검강은 실로 보고도 믿기 힘든 그런 엄청난 위력이었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
“으아아아아악!”
“대형을 돕는다!”
중년 사내의 하반신이 불의 검강에 휩싸였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연한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보던 여덟 명의 사내가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곧, 일 대 구의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다.
콰르르르르르르르.
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쾅쾅!
후기지수들은 폭발의 여파에 휩쓸릴까,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몸을 피해 금예지의 싸움을 지켜봤다.
한마디로 무지막지했다.
그녀의 몸속에 있던 화기, 그녀는 그것을 잠재우고 봉인한 게 아니라 무공으로 전환해 버린 것이다.
사부, 무적 할매!
도대체 우리 예지를 어떻게 만든 거예요?
이 년에 가까운 시간.
우리들의 첫사랑은 괴물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설레고 아름답고 귀엽고 깜찍하며 심쿵 할 수밖에 없는 미녀 괴물 말이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콰콰콰쾅쾅쾅쾅쾅!
땅과 하늘을 오가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싸움이 이어졌다.
아니, 우리 예지가 시종일관 무려 아홉 명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적들은 인상을 마구 구기며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상처만 계속 늘어 가고 있다.
아홉 명 모두 불의 검강을 이기지 못하고 의복이 모두 타 버리기까지 했다.
반면 예지는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우리 예지가, 내가 현재 가장 오르고 싶은 그 경지.
초절정 극상(極上)의 반열에 오른 상태인 것이다.
예지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우리 예지에게 저들을 모두 맡겨선 안 된다.
난 빠르게 현화승천신공을 운용했다.
우리 현화문의 내공 심법이라서가 아니라, 이건 그냥 사기다.
바닥을 드러냈던 내공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난 혹시 몰라 시선을 우리 예지의 싸움에 고정한 채,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내공을…… 어?
저…… 저 새끼들…… 설마?
빡빡머리 한 명.
반월도를 쓰는 놈 한 명.
그리고 맨 처음 우리 예지에게 화상을 입은 놈은 검에서 용의 형상을 한 검강을 뿜었다.
젠장! 미친!
진짜 그놈들인가?
절강 태주 용왕산(龍王山)의 지극현애(地極顯涯).
그곳에서 나는 생애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의 사내들이었고, 병기도 제각각이었다.
한 놈은 빡빡머리였고, 한 놈은 기이한 형태의 반월도를 썼다.
그리고 수장으로 보이는 녀석에게서는 창궁검제 그 인간의 냄새가 지독하게도 났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무림맹 절강 태주 지부의 지지부인 촌동네 삼문현 소속 하급 무사라 했다.
당시 내 정신이 오락가락했기에, 나를 무전취식이나 한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며 그렇지 않아도 없는 내 정신을 완전히 빼놓으려고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러다 정말 저들 꾐에 빠져 허무하게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수십 장 높이의 지극현애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빌어먹을 새끼들.
역시나 그랬다.
내가 몸을 날리자, 아홉 명 모두 일제히 그 높디높은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 가파른 절벽을 아홉 명 모두 마치 평지를 달리듯 그렇게 쉬이 달리고 날았다.
개나 소나 펼칠 수 있는 신법이 아니었다.
상승에서도 고도의 상승 신법이었다.
하급 무사?
놈들의 무위를 확인한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한 놈은 화경의 고수였고, 나머지 여덟 명 모두 초절정의 고수였다.
창궁검제의 냄새가 나던 놈에게서는 서른 장에 달하는 용이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빡빡머리의 권강은 순식간에 일백여 개가 되어 나를 덮쳤다.
그들 아홉 명 모두는 그 한 번의 수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절기를 나에게 쏟아부었다.
내가 그들을 모두 소멸시켰다.
절경을 자랑하던 지극현애와 함께, 나의 광천검이 그들 아홉 명을 단번에 이 땅 위에서 지워 버렸다.
난 다시 정신을 잃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도주했고, 목숨이 경각에 달해 이곳 광천동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날 죽이려 했던 아홉 놈들은, 무림맹주인 창궁검제와 소림사의 천수천권 그리고 화산파와 사패천의 배신자들이 비밀리에 키운 제자나 고수들이었으리라.
-광마일기 中
하아!
나이가 딱 맞아떨어진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후반.
십오 년 후 광천마제였던 내가 마지막으로 싸웠던 놈들과 나이와 외모 그리고 무공까지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때는 한 놈이 화경의 경지였고, 나머지 여덟이 초절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첫 번째 놈이 완연한 초절정의 고수.
둘이 초절정 초입.
나머지 다섯은 절정 끝자락이다.
이게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정말 아주 오래전부터 이들을 비밀리에 키웠던 것이다.
또 분명한 사실이 보였다.
한 사람이 키운 게 아니야.
빡빡머리는 아닌 듯 보이지만 분명 소림사의 냄새가 난다.
이십 대 후반의 검을 쓰는 놈은 분명 남궁세가의 검법을 익혔다.
반월도는 정종의 것이 아니다.
사파다.
아! 그리고 다른 한 녀석은 화산파의 검법을 익힌 듯하고.
도대체 뭐야?
어떻게 저렇게 제각각인 녀석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분명 저들은 맹주의 명을 받고 움직인 것일 텐데.
화산파 역시 저들과 한패라는 뜻인가?
아! 우리 천무휘 녀석.
어쩌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이 클 텐데.
일단 눈에 담자.
저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다 살핀다.
최대한 저들을 살펴서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창궁검제와 천수신권이 무림을 상대로 꾸미고 있는 음모와 얽힌 자들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소림사 한 명.
남궁세가 한 명.
아니다.
남궁세가의 검법, 둘이다.
그리고 빡빡머리 말고 봉을 쓰는 저 사내, 역시 소림사다.
소림사 냄새가 난다.
소림사 둘.
반월도는 확실히 사파고.
화산파…… 한 명 맞다.
나머지 셋은 모르겠군.
설마 저건?
살수공이다.
근접전을 피하고, 최대한 금예지에게서 멀리 떨어져 싸움의 정황을 살피다 틈이 나면 찔러온다.
살문 소속일 가능성이 높다.
살문 한 명.
그리고 또 다른 녀석.
검을 휘두르는 척하지만 진신 무공은 독과 암기다.
처음에는 독을 위주로 쓰다가, 예지가 독의 상극인 불로 이를 모두 태워버리자 지금은 암기 위주로 공격한다.
사천당가인가?
이건 확신할 수 없다.
사천당가가 독과 암기로 유명하다지만, 독과 암기를 쓰는 문파는 널리고 널렸다.
우선 독과 암기 한 명.
마지막으로 도(刀)를 쓰는 놈.
하북팽가는 아니다.
그 특유의 기운이 아니다.
어디지? 모르겠다.
도를 쓰는 놈 한 명.
“네 이놈들!”
내가 저들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쓰던 그때.
의제와 한해북이 동시에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내공은 고갈됐고, 내상은 깊으며, 독에 중독까지 된 녀석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랑의 힘을 막을 수는 없나 보다.
사랑은 언제나 위대한 것이니까.
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쾅!
제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의제와 한해북이 진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적들에게 몸을 날렸다.
금예지 한 명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적들이 순식간에 전열이 흐트러졌고.
예지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아홉 중 여섯이 즉사했다.
곧이어 후기지수들도 힘을 보탰다.
“여협을 도와라!”
임지령이 선두로 몸을 날렸고, 남은 후기지수들이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의제와 한해북은 힘을 다 쏟고, 내상과 중독까지 가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승패는 갈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화르르르르르르르.
임지령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이 적들과 칼을 겨누기도 전.
검에서 용을 뿜어 대던 녀석과 권강을 마구 뿌리던 빡빡머리, 그리고 반월의 검강을 날리던 녀석까지.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
임지령이 후기지수들을 지휘하였다.
부상당한 동료들을 치료하고, 시체들을 수습하게 했다.
오중체와 장위지 등은 적이 더 공격해 올지 몰라 경계를 섰다.
더불어 다치지 않고 발이 빠른 후기지수들 몇 명을 선별해 급히 무림맹으로 보냈다.
그다지 예쁜 구석은 없지만, 얼굴 말고 예전에 우리 예지를 못살게 굴었던 것 말이다.
아무튼 예쁜 구석은 없지만, 임지령에게서도 영웅의 면모가 확실히 보이긴 한다.
아미파에서 그녀를 왜 그토록 걱정하며 신경 쓰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오빠, 어때?”
우리 예지.
우리들의 첫사랑.
근심이 한가득한 얼굴로 나와 의제, 한해북을 보살펴 준다.
얼굴도 예뻐, 무공은 고강해, 마음씨는 그냥 살아 있는 천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 그 자체인 우리들의 첫사랑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저 멀리에서 엄청난 무리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무림맹에서 온 구원군이다.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무림맹 무력대도 있고, 그보다 몇 곱절의 숫자는 각파와 세가에서 온 고수들이다.
후기지수들의 부모며, 사부며, 그런 이들이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내, 사방에서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은 일백여 명의 사부와 부모들이 터뜨린 통곡 소리였다.
무림맹에서 서둘러 부상자를 치료하고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임지령과 오중체, 장위지, 표필공, 기월제, 허시 등이 구원군으로 온 무림맹 장로 한 명과 무력대주 세 명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잠시 후.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들이 일제히 시선을 우리에게로 돌렸다.
하나같이 크게 놀란 얼굴들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노인네들이 오는데 죽을 상처도 아니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노인네들,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후기지수들 살리려고 죽을 둥 말 둥 싸웠던 의제와 한해북 역시 찬밥 신세였다.
그들은 오롯이 놀란 눈을 떠 금예지를 볼 뿐이었다.
“아미파의 제자 금예지가 무림맹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정말이더냐?”
구원군의 최고 수장, 무림맹 종남장로다.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어허, 이걸 좀처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
금예지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러자 옆에 있던 무림맹 백호도무대 대주가 역시나 놀란 얼굴로 물었다.
“금 소저라고 했소?”
“네.”
“저 정체불명의 아홉 명을 처리한 게 금 소저가 한 일 맞소?”
“맞습니다.”
“싸움의 흔적을 보아……. 음, 강한 힘의 검강과 도강, 권강 등이 난무한 것 같은데.”
“그랬습니다.”
백호도무대 대주가 움찔했다.
다시 종남장로가 나섰다.
“혼자 저들을 다 물리친 것인가?”
“아닙니다. 곽 오라버니와 한 오라버니가 결정적 도움을 주었고, 다른 소협들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종남장로와 백호도무대 대주 등이 뒤를 돌아 임지령과 오중체 등 후기지수들을 보았다.
임지령과 오중체 등은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남장로는 신음성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금예지를 향했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스물둘입니다.”
“임지령 소저의 사매라고?”
“네.”
“어허, 스물둘에 지고한 경지에 오르다니. 화산에서 수룡검이 나왔을 때도 믿기 힘들었거늘. 이제는 아미산에서 봉황검이 나왔구나. 무량수불, 허허허.”
그때였다.
“나무아미타불.”
장내에 천리음이라 할 만한 상승의 소리 음공이 퍼졌다.
장내를 수습하던 무사들과 후기지수들, 그리고 우리까지 일제히 시선을 소리가 퍼진 방향으로 향했다.
아미파장로원의 아미장로와 고수들이 일제히 현묘한 신법을 펼치며 빠르게 장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우리 곁으로 왔다.
“임지령이 속화 사고님을 뵙습니다.”
“금예지가 속화 사고님을 뵙습니다.”
자신을 향해 예를 갖추는 두 사질을 바라보는 속화 사고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 보였다.
황궁 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돌아온 자식을 대견히 보는 그런 부모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그 기쁨을 억누르며 종남장로를 향했다.
“본 파에서 급전(急轉)으로 서신이 왔네요.”
말과 동시에 사문에서 왔다는 서신을 종남장로에게 건넸다.
“속화 장로님, 이걸 왜 저에게……?”
“이 아이에 관한 일이에요.”
“금 소저……. 어험, 그런데 아미파에서 온 서신을 제가 읽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곧 무림맹에 정식으로 보고할 서신인데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잠시…….”
서둘러 서신을 펼쳐본 종남장로.
조금 전에도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경악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 그것은 그만이 아닌 자리에 있던 모두를 동시에 경악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대제자 금예지. 초절정 극상 등극……. 허걱!”
우리들의 첫사랑 예지.
나와 우리가 아닌 천하를 심쿵 하게 만들 그녀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