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용봉지회의 지루한 닷새가 지났다.
용봉지회 개최 이전의 연회까지 포함하면 총 팔 일이나 된다.
됐다.
오늘 용봉렵마만 마치면 무림맹을 떠날 수 있다.
천예휘는 첫날 그 사건 이후 몇 번 마주쳤지만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난 그럴 때마다 콧방귀를 뀌고 비웃음을 마음껏 날려 주었다.
그렇게 용봉렵마가 시작되었다.
용봉렵마는 후기지수들의 수가 워낙 많아 두 조로 나뉘어 치러졌다.
첫 번째 조는 무림맹 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청룡검무대의 대주를 비롯한 몇몇의 고수가 이끈다.
나와 의제, 한해북이 두 번째 조를 이끌게 됐다.
어느 조에 편입되어 용봉렵마를 나갈지는 순순히 후기지수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우리 조에 삼백여 명이 지원을 했고, 청룡검무대 쪽은 이백여 명이 고작이다.
하하하! 이놈의 인기란.
칠룡사봉 중 소림 단장, 남궁세가 남궁무기, 황보세가 황보치산, 그리고 검각의 반종려와의 싸움에 이겨 이제는 당당하게 사봉의 일인이 된 화산의 천예휘가 포함됐다.
우리 조는 오중체, 표필공, 칠성검문의 기월제, 아미파 임하령, 황룡회 장위지, 삼악파 허시가 포함됐다.
검각의 반종려도 우리 쪽으로 왔다.
아미파의 임하령을 제외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칠룡사봉은 모두 일조에 포함된 것이다.
이를 따르는 후기지수들 역시나 거의 그렇게 갈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추종 문파 출신의 후기지수들은 일조에, 중소방파 위주의 후기지수들은 우리 이조에 지원한 것이다.
아마 아미파의 임하령도 꽤 고심이 컸던 모양이다.
우리 조에 들어온 후에도, 슬쩍슬쩍 일조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이 그래 보였다.
무림맹에 상주하고 있는 아미파 어른들의 입김 때문에 왔을 수도 있고.
뭐, 상관없다.
나는 마두 한 명 후딱 해치우고 빨리 무림맹을 떠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맹주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좀 답답하지만 그것도 잊기로 했다.
떠나면 그만이니까.
다시는 광천마제 시절처럼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
“원 대협.”
“네, 마 도사님.”
우리 이조의 후기지수들은 나와 의제, 한해북이 이끈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우리만 보내지 않았다.
원소를 딸려 보냈다.
맹주의 전령이자 심복인 그 인간 말이다.
“맹주님이 저를 감시하라고 보내신 건가요?”
“네?”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는 원소.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내. 안내하기 위해 왔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는데요.”
“아, 그렇죠. 안내해 주신다고 하셨죠?”
“네. 네. 그렇습니다.”
식은땀까지 한 줄기 흘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원소다.
뭔가 있는데, 그걸 모르겠단 말이다.
잊으려 해도 계속 생각나네.
-마두는 어디쯤에 있습니까?
-곧 도착합니다. 저 절벽을 지나면 판당협이라는 협곡이 나오는데, 그곳에 숨어 내상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금방 끝나겠네요.
-네. 아마 그럴 것입니다. 마 도사님은 뒤에서 후기지수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마음 편히 구경만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다 왔네요. 바로 이곳만 돌아서 일백 장 정도 더 협곡으로 들어가면 놈이 있을 것입니다.
“마두가 어떤 놈이라고 하셨죠?”
짐짓 후기지수들이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내 뜻을 파악한 원소도 역시나 큰 목소리로 답했다.
“그 유명한 삼십이마적단의 일원입니다. 흑룡강에서 광동까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활개치던 무시무시한 놈들이었고, 무림맹에서 오 년간의 추적 끝에 열 명을 추살하고, 나머지는 스물두 명은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그러다 최근 그중 한 명이 이곳에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늘 급하게 출동하게 된 것입니다.”
“강한가요?”
“강하지요. 삼십이마적단이 원래 모두 강합니다. 대부분 절정의 고수라 알려진, 이 시대 최악의 마두들이고 마적단이었습니다. 고작 열 명을 추살하는데, 무림맹의 고수 일백팔십 명가량이 희생됐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슬쩍 후기지수들을 봤다.
제각각의 얼굴이다.
누군가는 떨림, 누군가는 두려움, 누군가는 부푼 꿈을 꾸고 있다.
하지만 이는 소수고, 대부분은 두근두근 들뜬 얼굴들이다.
“우리 용봉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겁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염려를 했습니다. 하지만 맹주님께서 단언하셨습니다. 이번 용봉지회에 모인 후기지수들은, 역대 최고의 인재들이라고요. 분명 그 악적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무림의 평와와 안정을 위해 이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악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하셨습니다.”
몇몇 녀석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다.
또 몇몇 녀석들은 눈에 힘을 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맹주라는 말이 이들에게는 역시나 큰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판당협의 깊은 골짜기로 계속 진입하였다.
그리고 그때, 내 뒤를 바싹 따라붙던 이들 중 한 명인 칠성검문의 기월제가 다급하면서도 은밀히 말했다.
“누군가 있습니다.”
동시에 내가 왼손을 들었고, 삼백에 달하는 우리 이조는 전원이 그 자리에 멈추며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후기지수들은 긴장감이 고조가 된 상태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저 멀리 수풀 사이로, 한 중년의 사내가 턱벅터벅 걸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 인간 맞아요?
-네, 맞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수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네. 애들만 보냈다간, 몇 명은 기필코 죽을 겁니다.
원소가 상대를 주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은 찢어져 넝마가 되었고, 머리는 산발했으며,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얼굴은 물론 온몸에 땟국물이 가득했다.
그런데 아니다.
눈빛은 성난 맹수의 그것을 닮아 있었고, 은연중 흘러나오는 기운은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다.
뭔가 잘못됐다.
이게 맹주의 계획인가?
그러기엔 너무 부족한 것 같기도 한데.
“형님! 제가 나서 저 마두를 상대하겠습니다.”
“제가 나서게 해 주십시오.”
“저도 나서겠습니다.”
오중체를 시작으로 출발할 때부터 들뜬 얼굴을 했던 녀석들이 서둘러 나에게 저리 말했다.
하지만 아니다.
나가면 다 죽는다.
상대는 원소의 말마따나 진짜 절정의 고수다.
그것도 독을 잔뜩 머금은 위험한 상태다.
그리고 그때.
우리에게 십여 장까지 다가온 상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림맹에서 왔나?”
난 상대를 좀 더 관찰하고 싶었다.
그래서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중체가 나섰다.
“내가 바로 화양문의 오중체다! 네 목을 따러 왔다.”
상대가 오중체를 보더니 웃는다.
비웃음이다.
분명 뭔가 있다.
아무리 자기보다 하수라 하여도, 무려 삼백 명이 넘는 기재들이다.
심지어 이곳은 양쪽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싼 협곡.
도주도 쉽지 않다.
거기에 놈은 분명 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의 존재까지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다.
생을 포기한 자의 눈빛 또한 아니다.
그리고, 젠장!
내 기감에 그것들이 잡혔다.
스물한 명.
지금 바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저 더러운 몰골의 사내 말고도, 수풀과 바위 사이사이에 스물한 명이 더 있다.
“좆된 것 같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원소도 이쯤에서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모양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삼십이마적단의 생존자가 스물두 명이라고 했죠?”
“그…… 그렇습니다, 마 도사님.”
“오늘 여기서 무슨 소꿉 모임이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설, 설마…….”
내가 앞으로 나섰다.
꼬맹이들이 나서 봤자 개죽음일 뿐이다.
“모두 물러서라! 저자들은 우리가 상대한다.”
“형님!”
오중체가 큰 목소리로 억울한 듯 외쳤다.
“명령이다. 적은 한 명이 아니다. 모두 뒤로 물러서 등을 맞대고 서로를 지켜라. 비무가 아니다. 실전이다! 흩어지면 죽는다. 어서!”
내 외침에 후기지수들도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모양이다.
오중체와 몇몇 녀석들만 빼고 서둘러 한곳으로 뭉쳐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의제와 한해북도 상황을 파악하고,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서 있었다.
“원 대협.”
“네, 네.”
“저 아이들을 지켜 주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원소도 크게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도 어른이라고, 무리에 섞이지 않은 오중체와 표필공 등을 잡아끌어 다른 후기지수들과 합류하게 하였다.
그렇게 후기지수들의 어설픈 방어진이 세워진 후, 여전히 홀로 서 있는 적을 향해 말했다.
“그만 다 나오라고 해.”
“큭큭큭. 뭔가 좀 있는 녀석인가 싶었더니. 용케도 알아챘군. 형제들! 모두 나오십시오!”
휘이이이이익.
툭.
투투투투툭.
휘이이이익.
투투투투툭.
나오라는 삼십이마적단은 안 나오고, 사방의 수풀과 바위 사이에서 붉은 덩어리들이 쏟아졌다.
피 묻은 시체다.
수십 구에 달하는 시체는, 팔과 다리 그리고 목과 몸통이 분리된 상태였고, 하나같이 무림맹 무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에 긴장과 의심, 그리고 혼란함을 겪고 있던 후기지수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비명까지 질러댔다.
그들 사이로,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용봉지회의 행사 따위가 아닌 목숨이 걸린 현실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스물한 명의 삼십이마적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좆 된 것 같다.
과장인 줄 알았더니, 진짜로 스물두 명 중 일곱 명이나 절정급의 고수다.
대부분이 중년이었고, 절정급 고수 중 셋은 대충 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였다.
의제가 한 명, 한해북이 한 명, 내가 다섯 명을 상대해야 하나?
저놈들이 아이들을 공격하려 하면, 그것도 막아야 하고.
골치 아프게 생겼군.
“더러운 무림맹 잡종들. 오늘 그 혈육들을 다 죽여, 먼저 간 우리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겠다.”
모르긴 몰라도, 맹주가 저놈들 화를 단단히 돋우어 놓은 모양이다.
스물두 명 모두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그렇게 살기를 뿌려 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어렵더라도 싸워야 한다.
그리고 싸움에 임해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선공이다.
내가 사 갑자의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적들을 공격하려던 그때.
“마 도사님! 조심하십시오. 삼십이마적단에는 독공의 고수가…….”
쉬이이이이이이익.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원소가 나를 향해 경고를 하자마자, 마적단 중 가장 늙어 보이는 인간이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서 검은 구슬 같은 것이 수십 개 쏟아져 나왔고, 곧 우리와 후리지수들 머리 위에서 폭발하며 녹색의 가루가 뿌려졌다.
“독이다! 독이 몸에 퍼지지 않게 운기를 조절하라!”
원소가 후기지수들을 향해 외쳤다.
말이 쉽지.
몇몇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의 혈도를 모두 막아 버렸다.
내공 운용 자체를 막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내공을 쓸 수 없고, 싸움 자체를 할 수 없다.
또 몇몇은 자신의 사문이나 가문에서 가져온 해독약인지 환단을 꺼내 복용하기도 했고, 또 몇몇은 귀해 보이는 피독면을 착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방비.
고수급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일류와 이류의 아이들이다.
독의 침투를 막을 제대로 된 혈도의 조절이 불가능할 것이다.
의제와 한해북마저도 완벽히 이를 조절할 수 없는데, 당연한 일이다.
아니다 다를까.
의제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내게 말했다.
“형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만 불리하겠는데요.”
“그래, 가자.”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가 몸을 날렸다.
사 갑자의 검은색 검강이 적들에게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피해!”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노고수의 외침이 있기도 전, 적들은 사방으로 몸을 날려 내 검강을 피했다.
온전히 다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확실히 집 안에 틀어박혀 무공만 익힌 그렇고 그런 놈들이 아니다.
중원 전역을 돌며 수많은 싸움을 치른 진짜 싸움꾼들이며 고수가 맞다.
적지 않은 내상과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하지만 이 또한 최소한으로 줄인 적들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우리도 마두들을 상대로 이미 엄청난 싸움을 치러 왔다고.
내가 검강을 날리면, 십중팔구 마두들은 저렇게 양쪽으로 흩어진다.
이미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다.
내 검강을 피해 사방으로 몸을 날린 마두들.
그 양측에서 각각 의제와 한해북이 무지막지한 도강을 뿜어 대며 이들을 덮쳐 나갔다.
지금껏 열 번 써 열 번 모두 성공한 우리의 합공 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