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내가 어디를 가건, 사람들은 나를 피했다.
아니, 그저 내가 어디로 간다는 말만 나와도 사람들은 미리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도주했다.
스물세 살 끝 무렵, 나는 극악무도한 대마두가 되어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울던 아이까지 내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뚝 그쳤다는 소리까지 들리곤 했다.
이제 감히 날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몇 없다는 생각에 안도할 수 있었다.
처선의 말처럼, 더 이상 비참하게 도망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 하나 있다.
더 이상 도주 다니지 않아도 됐지만, 내 마음은 매일 쓰리고 아팠다.
내가 대마두가 됐다는 사실이.
내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나를 매일 아프게 했다.
갑자기 돌아가신 사부님이 보고 싶다.
-광마일기 中
*
“와아아아아! 진짜 사나이 우각도협 곽우적 대협이다!”
“와아아아! 저 멋진 대협이 바로 구절협 한해북이다!”
“정륭방은 죄가 없습니다. 부디 오해를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신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와아아!”
“와! 진짜 곽우적 대협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구절협 한해북 대협 맞지?”
“저분은 독고검문의 사마준 공자 아니야? 왜 대협들과 함께 있는 거지?”
“와아아아!”
“엇? 수룡검 천무휘 대협이 없네?”
“이 친구 산속에 틀어박혀 귀를 닫고 사나? 천무휘 대협은 지금 화산파에서 폐관 수련 중이시라네. 곧 검선이 되신다는 소문이야.”
“어이쿠, 그랬나? 그런데 저분은 또 누구신가?”
“예끼, 이 친구야. 그만 집에 가시게.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님도 모르나? 쯧쯧. 한심한지고.”
“아! 저분이 마악치 도사님이셨군. 어째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얼굴이셔서 말이야.”
“조금 그렇긴 하지?”
이 인간들아!
다 들린다고!
거기서 얼굴이 왜 나와!
젠장.
하남 신양에 도착했다.
이미 도읍 밖에서부터 우리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실 가득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꽤 많은 인파가 몰린 건 사실이다.
개방에서 정보를 제대로 흘린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광천마제 시절 이맘때의 나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이젠 이렇게 많은 이들이 환영해 주고 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말을 타고 이동하던 우리의 길을 일단의 무리가 막아섰다.
무인은 아니다.
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도 아닌 것 같이 보이긴 하는데.
나이도 제각각이다.
남녀노소.
할머니도 한 명 있고, 어린아이가 다섯 명이나 있었다.
총 스물셋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더니 이내.
선두로 길을 가던 내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마 도사님, 흑흑흑. 감사합니다, 흑흑.”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울기 시작하자, 바로 옆에 있는 할머니부터 모두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둘러 말에 내려 사내와 할머니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저는 종도상단의 상단주 여운식이라 합니다. 제 동생…… 흑흑흑. 고려에 상행을 다녀오는 길에 해적을 만나 죽었고, 제수씨가 해적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때 마 도사님께서 제수씨를 구해 주시고…… 흑흑흑. 제 동생과 고인이 된 사람들의 제사까지 극진히 지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흑흑흑.”
“아이고, 마 도사님. 엉엉엉.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 늙은이가 이렇게 큰절을 올리겠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모두 일어나 주세요. 부탁입니다.”
고려 앞바다에서 나와 천무휘가 물리치고, 또 내가 제사까지 지내 주었던 그 사람들의 가족들이었다.
상행을 갔던 아들이자 동생이 늙은 어미와 형의 꿈에 처참한 모습으로 계속 나타나 근심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며느리가 돌아와 겪었던 일을 모두 말했고, 그 날짜를 비교해 보니 정확히 내가 배 위에서 제사를 지내 주었던 날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오열을 하며 내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중들까지 눈시울이 빨개지며 눈물을 훔쳐야 했다.
그렇게 그들을 달랜 후에야 우리는 다시 정륭방을 향해 움직일 수 있었다.
*
정륭방으로 향하는 길.
갈수록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신양의 중심부에 위치한 정륭방이었고,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륭방 앞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군중은 큰 싸움이 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고, 또 그 오해가 풀릴 것이라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아마도 정륭방에서 일부러 신양에 그런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긍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륭방 정문 앞.
와! 많이도 모았네.
대충 봐도 삼천 명이 훌쩍 넘는 무인들이 도검을 허리에 차고 날 선 기운을 뿌려 대고 있었다.
곧, 내가 선두로 나서 그들과 마주하게 됐다.
상대측에선 정륭방의 방주가 나섰다.
아직까진 여유로운 모습이다.
그게 무엇이든 단단히 준비했기에 그랬으리라.
“어서 오시오, 마 도사, 곽 소협, 한 소협.”
미친놈이다.
대뜸 한다는 소리가 저 소리다.
여유롭게 웃기까지 한다.
마치 무림의 존장으로서 한참 후배인 우리를 인자하게 맞이해 주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데 보였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내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다.
난, 놈을 상대하지 않았다.
길게 늘어선 삼천여 무인들을 한차례 주욱 훑은 후,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말했다.
“지금 정륭방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독고검문의 가주가 잡혀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 마악치는 이에 정륭방과 이 일에 연관된 자들을 치죄하러 왔다. 죽일 것이다.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빠져라. 기회는 한 번뿐이다.”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공이 실린 음성이었기에, 삼천여 무인들은 물론 어느새 일이만 명을 훌쩍 넘은 군중들까지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군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것은 나와 대치하고 있는 여러 문파로 전염되었다.
“네 이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가 어린 나이에 작은 명성을 얻었다고 하여, 눈에 뵈는 것이 없느냐!”
정륭방주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난 깔끔히 그를 무시하고 나머지 문파의 수장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정륭방을 빼고도 총 다섯 개의 문파가 모였다.
어느 이는 갈등하고 있었고, 어느 이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한 늙은 사내가 나섰다.
“녹각당의 당주 조비라고 합니다. 마 도사님께서는 증거가 있으십니까?”
“증인이 있소. 나오시오, 사마준 소문주.”
사마준이 내 옆에 섰다.
다시 조비가 물었다.
“사마준 공자, 진짜인가?”
“며칠 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정륭방 뇌옥에 갇혀 고문을 받다가 탈출했습니다. 저들은 저희 가문의 재산과 비급을 노리며 끔찍한 고문을 했습니다.”
“음…….”
조비가 잠시 깊은 고뇌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정륭방주를 향했다.
“정륭방주, 우리 녹각당은 이번 일에서 빠지겠소.”
“조…… 조 당주님!”
“가자! 우리 녹각당은 퇴각한다.”
“넵!”
팔백 명에 달하는 녹각당이 일제히 자리를 떠나 군중들 틈에 섞였다.
큰 싸움을 예견했는지 조비는 군중들을 뒤로 물리며 질서까지 잡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나머지 네 명의 문파 수장들.
결국.
“법문도 빠지겠소. 마 도사님, 우리 법문은 이번 일과 전혀 관계가 없소. 모두 퇴각한다. 녹각당을 도와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도와라.”
“넵!”
“성불파도 빠지겠소. 가자!”
“넵!”
결국 세 개의 문파가 빠졌다.
정륭방과 두 개의 문파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숫자만 해도 일천오백 명이 넘었다.
정륭방주는 떠나는 세 개 문파의 수장들을 노려보며 훗날 복수를 다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수룡검의 명성을 믿고 까불더니, 이제는 잠자는 호랑이의 콧수염까지 뽑으려 드는구나.”
“죄가 없다면, 문 열어. 녹각당과 법문, 성불파와 우리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 확인할 테니.”
“갈! 어떤 미친놈이 자신을 농락하고 핍박하는 놈에게 자기 집 대문을 열어 준다는 말이냐!”
“그럼 죽어야지.”
“네가…… 네가 진짜로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무서워. 하늘은 무섭지. 하지만 너는 안 무서워. 재물과 무공을 탐해 수백 년 이어져 온 가문과 가문 사이의 의리마저 깨 버리고, 끔찍한 범죄까지 저지른 너 같은 놈은. 정말 하나도 무섭지 않아.”
“아직 어린놈이라 최대한 관용을 베풀려 했거늘. 네 명은 네가 재촉한 것이니 원망하지 말아라.”
“말이 많군. 모두 물러서시오!”
군중들을 향해 경고를 담은 사자후를 외친 후 몸을 날렸다.
정륭방주를 향해서였다.
놈들이 확실히 단단히 준비한 게 맞긴 맞는 모양이다.
내 무지막지한 속도와 기운에 순간 당황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곧바로 체계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정륭방주를 향한 내 검을, 무려 서른두 명이 진법의 힘까지 빌려 동시에 막은 것이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뜻은 가상했으나, 사 갑자의 내공이란 게 그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사 갑자도 아니고 일 갑자만 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단 한 번의 출검에 현장은 곧바로 지옥도가 되어 버렸다.
-한 형, 지금입니다.
-네,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의제!”
“내가 바로 곽우적이다!”
엄청난 사자후를 터뜨리며, 의제가 허공으로 열다섯 장이나 몸을 날렸다.
양손으로 대도를 잡아 치켜든 상태로, 그 자세 그대로 대도를 내리쳤다.
어마어마한 도강이 쏟아져 나왔다.
의제의 도법 중 가장 화려한 초식인 대오응결식이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쾅! 쾅! 쾅!
다시 세 방의 도강이 연이어 적들의 중심부를 타격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적들도 놀랐지만, 군중들의 놀람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소림사와 무림맹이 있다는 하남이지만, 그 끄트머리에 있는 신양 사람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검강과 도강을 본 적이 있겠냔 말이다.
사방으로 군중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하기 시작했고.
나와 의제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적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놈들은 내공을 다 써 버렸다. 더 이상 남은 내공이 없다. 공격하라! 저놈들의 목을 베면, 약속한 모든 것을 주겠다. 아니 그 두 배를 주겠다. 죽여라!”
“죽여!”
정륭방주와 나머지 두 개 문파의 수장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무인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덜덜 떨며, 자신이 나설 생각들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이놈들도 근자에 만났던 마두들과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천무휘가 없으니, 우리 뜨내기 셋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한 게 아니다.
나와 의제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적들은 피를 뿌리고 비명을 질러 대며 땅을 굴렀다.
웬만하면 죽이지 않으려고 그나마 엄청나게 애를 쓰는 중이다.
의제의 대오응결식이 의제의 도법 중 가장 화려한 초식이지만, 달리 말하면 화려하기만 한 초식이기도 하다.
다치고 죽어 쓰러진 적은 극히 소수고, 대부분 놀라고 두려워 주저앉은 적들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결국, 순식간에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서 도검을 손에 쥔 자는 삼 할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정륭방주의 인상이 왈칵 구겨졌다.
극도의 두려움과 놀람이 화로 변하였고, 끝을 보려 결심한 모양이었다.
“놈을 끌고 와라!”
“방, 방주님. 하지만…….”
“어차피 다 죽는다. 독고검문주를 끌고 와!”
“넵!”
정륭방주의 명령에, 그를 지키던 고수 중 다섯 명이 일제히 정륭방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때.
콰콰콰콰쾅!
그들이 몸을 날렸던 정륭방의 문이 큰 폭발을 일으키며 터졌다.
다섯 명 역시 정문과 함께 폭발에 휘말려 몇 장이나 뒤로 날아가 땅을 구르는 신세가 됐다.
곧이어, 정륭방의 터져 버린 정문으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해북과 끔찍한 몰골의 독고검문주였다.
“독고검문주를 찾고 있나? 어쩌지? 내가 이미 구했는데? 참고로 내가 바로 구절협 한해북이다.”
“죽여라!”
다급한 얼굴의 정륭방주가 외쳤지만.
콰콰콰콰콰쾅!
한해북의 도가 허공을 갈랐고, 그를 향해 몸을 날렸던 서른 명가량의 정륭방 무인들이 다시 피를 뿌리며 날아가 땅에 곤두박질쳤다.
한해북이 독고검문주를 구한 이상, 정륭방에 승산 따위는 없었다.
아니, 살아날 일말의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렸다.
결국.
툭.
정륭방주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껏, 피를 뒤집어쓴 채로 나름대로 열심히 싸우고 있던 사마준이 검을 한 손에 쥔 상태로 서럽게 울며 정륭방주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의도가 분명했으나,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모두가 숨죽여 지켜볼 뿐이었다.
정륭방의 대부분 방도들도 독고검문의 문주가 자기네 방파에 잡혀 있는 사실을 몰랐던 듯했다.
모두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혼란함이 뒤섞인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마준이 하얗게 질려 바닥에 주저앉은 정륭방주 앞에 도착했다.
곧 그가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멈추시오. 무림맹에서 왔소!”
저 멀리 군중들 사이로 서른 명가량의 제법 고수라 불릴 만한 이들이 몸을 날리며 빠르게 다가왔다.
어? 쟤들은 내가 부른 게 아닌데.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