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친애하는 공주님께
공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히 최하 천민인 제가, 계요의 신분인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진심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공주님의 아버지이시자 우리 요괴들의 왕이신 요왕의 힘에 근접했습니다.
(중략)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났던 그날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그날, 저는 소문으로만 들어 왔던 당신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했습니다.
(중략)
가난하고 약한 요괴들이 모여 사는 빈요촌(貧妖村).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한 우리에게, 고귀한 당신께서 친히 와 주셨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우리의 신분으로는 평생 구경도 못 할 그 귀한 요단을 나누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요왕의 요력이 담긴 그 요단을, 공주님께서 우리 빈민가의 불쌍한 요괴들에게 친히 한 알 한 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저에게도 힘을 내라며, 환히 웃어주시며 요왕의 요단을 주셨습니다.
전 며칠이나 그 생각을 하며 홀로 울었습니다.
신분의 격차.
나약한 존재.
당신을 사랑했지만, 그러한 이유로 우리의 사랑은 완성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공주님.
신께서 저의 간절함을 아시고, 제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기회를 소중히 여겨 잡았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공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보셨습니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저의 힘으로, 인간계를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미 공주님의 아버지인 요왕의 위대함에 가장 근접한 요괴가 되었습니다.
(중략)
응요와 낭요를 죽였던 일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저를 죽이려 했고, 저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중략)
인간계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계를 통해 제가 증명하였습니다.
이는 인간계뿐만 아니라, 요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공주님께서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제 힘을 다 완성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발휘하지도 않았습니다.
(중략)
당신께서 제 사랑을 받아 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꾸미고 있는 모든 일을 멈추겠습니다.
또, 원래 계획했던 원대한 꿈마저 버리겠습니다.
당신만 얻을 수 있다면, 천하를 포기하겠다는 말입니다.
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느껴지십니까?
(중략)
제 사랑을 받아 주십시오.
오직 당신과 단둘이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정말 만약. 당신이 내 순수한 사랑을 거부하신다면.
저는 정말 슬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눈덩이처럼 쌓여 인간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계를 넘어 요계까지 제 슬픔이 전달될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이 그토록 큰 것이니까요.
인간들이, 또 요괴들이.
당신의 아버지인 요왕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당신이 제 사랑을 받아 주시기만 한다면,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비겁하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치사하다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이, 미치도록 간절하여 이러는 것이니까요.
공주님.
저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계효보
미친!
와! 이 닭대가리 새끼, 지금 제정신이야?
무슨 연서(戀書, 연애편지)를 이따위로 써?
이게 사랑 고백이야 협박이야?
아니, 그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계두교의 난이라 불리며 수만 명이 죽는 끔찍한 일을 벌인 이유가 이거였어?
백미호에게 고백하려고?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려고?
백미호를 사랑해도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이 새끼 연애 한 번도 못 해 봤나?
와! 와와와!
진짜 돌겠다.
미친 닭대가리.
너무 황당하고 미칠 것 같아 말도 안 나오고, 머리가 다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괜찮아?”
백미호가 그런 나를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괜찮은 게 아니라, 네가 걱정이지. 너야말로 괜찮아? 이거 완전 미친 변태 요괴잖아!”
“미안.”
“네가 왜 미안해?”
“나 때문에…… 인간계에 너무 큰 피해를 입혔잖아.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됐어. 나 죽었다 깨어나면 모두 다시 살아나. 그러니 네가 기죽을 필요 없어.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잖아. 계효보 그 닭대가리가 미친 거지.”
“그래도…….”
“와! 너까지 왜 이래? 당장 그 닭대가리 잡아서 목 칠 생각을 해야지. 그게 너답다고. 정신 차려, 백미호!”
하지만 백미호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더 우울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냥 나…….”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야?
왜 나까지 불안하게 그래?
“계효보에게 갈까?”
“미친! 갈! 진짜 너까지 함께 미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그래?”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알잖아. 계효보가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강해지고 있는지. 그걸 막으려고 우리가 온 건데, 지금까지 수하 두 명만 잃고 아무런 소득도 없어.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간, 정말 계효보가 말한 세상이 도래할지도 몰라.”
계효보는 직접적으로 서신에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뜻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계와 요계.
두 세계에 계두교의 난,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계두교의 난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협박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요왕인 백미호의 아버지와 왕자인 오라버니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나와 백미호 그리고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모든 이들.
수도 셀 수 없을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만에 하나 모든 것이 계효보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하지만.
“백미호!”
콰콰쾅!
내가 내공까지 가득 실어 백미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마주 앉았던 의자를 제외하고, 맹주 집무실 내부의 집기들이 모두 벽으로 날아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동시에 집무실 밖에 있던 작은 사부와 호요, 웅요 그리고 나의 호위무사들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목소리에 내 기운을 담아 백미호를 향해 말했다.
“똑똑히 들어, 백미호. 정신 바싹 차려야 해. 지금 너의 나약한 이런 모습. 결국 계효보가 바라는 게 바로 이거야. 약해지지 마. 네가 할 수 없다면, 내가 할게! 내가! 어떻게 해서든 닭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니까!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따위 나약한 말 하지 마. 알았어?”
백미호는 풀이 잔뜩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강한 어조로 말하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마주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고마워, 악치야. 흐윽.”
그녀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눈물을 마구 쏟으며 흐느낀다.
작은 사부가 슬쩍 호요와 웅요 그리고 다른 고수들을 데리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도 백미호를 꽉 끌어안아 준 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지금까지 강한 모습만 보여 줬던 백미호다.
그래서 원래 그렇게 강한 여인인 줄만 알았다.
아니었나 보다.
일부러 강한 척,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하려 애썼나 보다.
힘들고 슬퍼도, 내색하지 못했나 보다.
그녀도 여인이고, 그녀도 요계에서는 아직 젊은 요괴라는 생각을 내가 하지 못했다.
미안했다.
홀로 그녀에게 힘든 일을 모두 떠넘겼던 것 같아서.
“이제부터 내가 함께할게. 힘들면 언제든 이렇게 나에게 기대. 닭을 잡는 그날까지, 난 언제나 너와 함께할 거야.”
*
백미호는 보름이 넘게 내 곁에 머물고 있다.
호요와 웅요도 잠시 닭 사냥을 멈추고, 우리와 함께했다.
무적 할매도 닷새 전 돌아왔다.
그리고 계두교의 난은 실질적으로 종식이 되었다고 판단할 만큼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계효보의 서신을 통해 추론한 결과, 닭이 어떠한 추가 도발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천하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내 위로와 격려 때문인지, 백미호는 예전의 그 씩씩한 백미호로 되돌아왔다.
아마 예전처럼 강인한 척 애를 쓰고 있는 중일 테다.
이제 내가 그녀의 속마음을 알고 있으니, 약속한 대로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나와 백미호, 그리고 호요와 웅요는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생까지 포함하여 닭을 어떻게 잡을지에 대해 거듭된 계책을 수립하는 중이다.
머리를 맞대고 완벽한 대비와 더없이 훌륭한 함정을 팔 생각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무림의 또 하루가 지나가려던 그때였다.
쾅!
맹주전의 커다란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개방의 방주 취팔개다.
그 뒤로 처호, 처선, 공손병 그리고 구파일방을 비롯한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들어섰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일부 고수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시나무 떨듯 그렇게 덜덜 떨기까지 하고 있다.
뭐지? 왜들 저래?
계두교는 이미 재기할 수 없는데.
뿌리까지 다 뽑아 버렸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소탕했다.
그렇다면 계두교가 아니라는 뜻인데.
정말 뭐야?
왜 저래?
그리고 무림의 기라성이라는 저들이 왜 저런 얼굴로 다급하게 날 찾아왔는지, 취팔개의 입을 통해 곧 알 수 있었다.
“마교가…… 중원을 침공했습니다.”
하!
씨팔.
산 넘어 산이라더니.
진짜 이 지긋지긋한 무림은 끝이 없구…… 어?
잠깐!
마교?
“취, 취팔개 방주님.”
“네. 맹주님.”
“지금 마교가…… 어디까지 침공한 상태입니까?”
“곤륜파와 공동파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니까 어디에 와 있냐고요!”
취팔개가 놀란 얼굴로 서둘러 답했다.
“곧 아미파에 도착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씨팔!
우리 사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사부가 위험하다.
*
곤륜파(崑崙派)와 공동파(崆峒派).
점창파와 더불어 무림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도가 계열의 도문이며 무림 문파다.
이들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지리적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교 때문이다.
일천 년에 가까운 세월.
그 시간 동안 곤륜과 공동은 각기 청해와 감숙이라는 곳에 자리해 가장 먼저 마교의 중원 침공을 막아 왔다.
구파일방 중 가장 많은 화를 당한 문파 역시 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강하다.
작금에 이르러 그들은 서로 긴밀한 공조 체계까지 갖추어 마교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다.
과거보다 더 강해진 곤륜과 공동인 것이다.
하지만 취팔개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 곤륜과 공동의 오 할가량이 마교의 침공에 희생됐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마교를 도저히 막을 수 없어 사천으로 후퇴를 했고, 청성과 함께 마교를 막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성이라고 어찌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급작스레 곤륜과 공동파가 찾아왔고, 그렇지 않아도 계두교의 난 때문에 제자들 상당수가 자리를 비운 청성파였다.
그렇게 청성파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대패하여 아미파로 도주하였다고 한다.
취팔개가 내게 보고를 한 시점이 딱 그때였던 것이다.
난 곧바로 반계맹의 맹주로서 명령을 내렸다.
모든 무림의 무문에 배첩을 돌리고, 마교와 싸울 영웅들을 사천 아미산으로 소집했다.
곧바로 현 반계맹에서 중원 전역으로 수십 마리의 전서응과 수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갔다.
개방의 방도들도, 또 각 문파에서도 빠르게 인편을 천하 곳곳으로 보냈다.
사천과 가까운 귀주, 극양신장이 화양문의 고수를 이끌고 아미산으로 이미 떠났다는 보고를 받긴 했다.
하지만 극양신장은 마교주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광마일기에 분명하게 그리 적혀 있다.
내가 가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일이 생기기 전, 그곳에 도착해야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
나는 작은 사부의 등에 업혀 달렸다.
그 옆으로 무적 할매와 백미호, 호요, 웅요가 함께했다.
정말 빛의 속도로, 진짜로 빛이라고 불려도 될 그런 속도로 사천을 향해 질주했다.
사부는 강하다.
하지만 그 강함이 가끔은 엉뚱하게 또 황당하게 발휘되지 않는다.
그래서 걱정이다.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사부님 손끝에 작은 생채기라도 생기면.
마교고 지랄이고, 계두교의 난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진짜 지옥을 천하에 보여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