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사부님, 예지는 어때요?”
사천에서부터 이곳까지 마차를 타고 온 예지다.
사부가 계속 함께하였다.
마차 안에 누워 있는 예지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돈다.
본격적으로 남궁세가와 싸우기 전, 사부와 예지를 보러 왔다.
“계속 잠을 자고 있구나. 스스로 광분하여 날뛰려는 화기를 잠재우기 위해 무의식 속에서 열심히 싸우는 중이란다.”
“괜찮겠죠?”
사부가 미소 짓는다.
“괜찮다. 쉽지는 않겠지만, 금 소저는 잘 이겨 낼 테다. 약속하마.”
우리 사부.
거짓말 못 한다.
사부는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다.
다행이다.
우리 예지가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광마일기에 적힌 글로만 읽었지만.
그녀가 웃는 모습을, 미치도록 보고 싶다.
“사부님.”
“그래, 악치야.”
“미호나 호요, 웅요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사부님께서 나서셔야 할 수도 있어요.”
“계효보란 요괴 말이냐?”
“네. 제가 믿을 수 있는 건 사부님밖에 없잖아요.”
“그래, 염려 마라. 내 금 소저를 돌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겠느니라.”
“그래도…….”
“……?”
“혹시라도 정말 그런 상황이 닥치고. 그래서 계효보를 만나서 싸우게 되었을 때…….”
“…….”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가셔야 해요.”
“악치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약속해 주세요. 꼭 그러실 거라고.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사부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 저…… 비뚤어질 거예요.”
사부가 웃는다.
잘생기고, 신비하고, 인자하고, 따스하며 부드러운 미소다.
사실, 사부에게 마지막 말까지는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사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다시 광천마제가 될 거예요. 아니, 광천마제 때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한 악마가 되어서 천하를 피로 물들일 거예요.’
이 말을 하려다 만 것이다.
“약속하마. 절대, 네가 비뚤어지지 않게. 허허허. 녀석, 사춘기도 다 지났는데.”
“저,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장난 아니다. 혹시라도 계요를 상대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냅다 도망가겠다. 백두산으로 도망가서 백두신령께 울고불고 어린아이처럼 떼라도 쓰지 뭐. 이젠 됐느냐? 허허허.”
“네, 됐어요. 약속해 줘서 고마워요, 사부님.”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하느니라.”
“저도 약속할게요. 뭐, 작은 사부님이랑 무적 할매가 있는데, 제가 나설 일이 있겠나 싶다 만은요, 하하.”
“그래, 지금처럼 웃으며 건강하게 돌아오너라. 기다리고 있겠다.”
“다녀올게요, 사부님.”
*
마차를 나서자 엄청난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아미파 장문인, 청성파 장문인, 무림맹의 고수들을 비롯한 수많은 무림의 기라성들이 도열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일이만 명에 달하는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먼 거리, 남궁세가 측에서도 십수만 명에 달하는 고수와 무인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맹주님.”
“갑시다.”
“존명!”
내가 움직이자, 나를 기다렸던 무림의 기라성들이 일제히 내 뒤를 따랐다.
*
남궁세가, 무림맹, 제갈세가, 황보세가, 산동악가, 녹림삼십육채, 동정십팔채 등등등.
거기에 민간의 계두교 광신도들만 해도 그 숫자가 십만 명이 넘어 보였다.
황궁이 왜 긴장을 하고 무림을 주시하는지 충분히 알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분명.
저들도 사천에서의 일을 들었을 텐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럴만하다.
창궁검제를 비롯하여 벽력권패, 수룡왕, 녹림왕 등 스스로 무림의 최고수라 자부하는 자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사천당가와의 싸움과는 그 격이 다른 전장이다.
그리고 이 싸움으로, 계두교의 난이 어떻게 될지 결정 날 것이다.
계효보가 보이지 않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싸움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
이 수많은 사람 사이로 깊게 그런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누군가는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똥꼬에 힘을 꽉 주고 있으리라.
거의 열 배에 달하는 수의 차이.
하지만 무림의 싸움은 군영의 싸움과 다르다.
고수의 싸움 한 방에, 거의 모든 승패의 향방이 결정될 수 있다.
너무나도 중요한, 그래서 더더욱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남궁세가를 위시한 계두교 진영이 술렁이는가 싶더니.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쾅!
계두교 진영 깊숙한 곳에서, 하나의 인영이 마치 새라도 되는 듯 하늘을 날더니, 무려 일백오십 장을 건너뛰어 진영의 선두에 착지하였다.
무림맹의 전 맹주이자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며, 다시 당금 무림의 오대고수 중 일인인 창궁검제(蒼穹劍帝) 남궁비혁이다.
간을 보고 뭐고 없이, 첫판부터 우리 반계맹의 기세를 꺾기 위해 작정을 한 모양이다.
“와아아아아아아!”
“계신 만세! 계두교 만세! 창궁검제 천세! 천세!”
“와아아아아!”
고작 신법을 펼쳤을 뿐인데, 계두교 진영은 아주 난리가 났다.
사방에서 손을 들고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질러 대는 모습이었다.
사실 내가 봐도, 조금 전 창궁검제의 신법은 쪼끔, 아주 쪼금은 멋있었다.
됐다.
우리도 있다.
“작은 사부님.”
“그래, 알았다.”
내가 작은 사부를 불렀고, 사부는 시선을 창궁검제에게 고정한 채 걸음을 떼었다.
곧이어 우리 진영의 고수들 역시 시선을 일제히 작은 사부에게 쏟았다.
그런데.
터벅터벅.
그냥 걸었다.
웅요는 덩치라도 커서 좀 뭔가 있어 보였는데.
아! 우리 작은 사부.
어째 오늘따라 등도 작아 보이고, 조금 그러네.
기왕 하기로 한 거 좀 멋있게…… 어?
“허, 허공답보다. 전설로만 듣던 허공답보야! 진공 스님이 지금 그 허공답보를 펼치고 있다!”
“그것도 만보(慢步)로 움직이고 있어! 저건 허공답보 중에서도 전설 속에서나 있었다고 알려진 거잖아!”
“와아아아아아아!”
땅에서 한 척, 그리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다.
그렇게 허공을, 마치 무명의 노인이 평화로이 시골길을 걷듯 그렇게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갔다.
하여간 저 양반.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니까.
아닌 척하면서 사람들 시선을 은근히 의식했기에 굳이 저런 신법을 펼쳤을 것이다.
아나!
작은 사부의 저런 모습에 하하하 웃고 싶었지만, 작은 사부와 내 체면 모두를 생각해 억지로 참았다.
나중에 이걸로 좀 놀려 줘야겠다.
그리고 작은 사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창궁검제.
인상을 찌푸린다.
곧, 작은 사부가 우리 진영의 선두에 섰고, 창궁검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됐다.
둘과의 거리는 일백여 장.
잠시의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창궁검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넌?”
간단한 질문.
작은 사부 역시 짧게 답했다.
“귀정사의 진공.”
그런데 순간, 창궁검제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무언가 물었다는 증거다.
“귀정사의 진공? 원래 법명은 소림사의 원무 아닌가?”
작은 사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입꼬리를 더 올리며 창궁검제가 말을 이었다.
“사람을 때리고, 물건을 강탈하고, 온갖 패악질을 하다가 소림사에서 쫓겨난 그 원무가 당신 맞지? 종국에는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준 사부마저 죽게 만든 게 바로 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천하의 패륜아가 스님 흉내를 내는 것이냐!”
호통이고 조롱이며 꾸짖음이었다.
일백여 장의 거리를 두었지만, 또 십수만 명이 모인 자리였지만.
이들의 대화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순간 적들이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고, 우리 측 진영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
작은 사부가 걱정되었다.
작은 사부의 치명적인 상처, 그 아픔을 창궁검제가 건드린 것이다.
수십 년 전 과거의 비사까지,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사이 이미 모두 알아본 모양이다.
치밀하고 무서운 자임이 틀림없다.
난 서둘러 작은 사부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광기가 폭발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잠잠하다.
평온하다.
“그 젊은 날의 죄를 씻고자 평생 산속에 박혀 참회하였는데, 아직도 마음이 아픈 게, 허허. 내 죄를 씻으려면 더 참회해야 하나 보구나. 나무아미타불.”
“그렇다면 산속에 계속 처박혀 있지, 어찌하여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더냐? 그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러려고 했다. 평생 산속에서 참회하며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가 나를 부르지 않았느냐?”
“무슨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창궁검제가 인상까지 구기며 버럭 화를 냈다.
“소림사는 내 집이요 고향이다. 내 마음은 언제나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집과 고향 그리고 내 가족을 네놈들이 모두 없애 버렸더구나. 그 죗값을 치를 시간이다, 남궁아.”
“죗값? 크하하하하! 사천에서 네놈이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작은 재주를 믿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땡중이었구나. 기회를 주겠다.”
창궁검제는 광마일기에 기록된 것과 달랐다.
차분하고, 신중하며, 무게감 있는 겁쟁이 녀석이라 기록되어 있다.
물론, 광천마제 시절의 내가 그리 적었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런데 아니다.
계효보에게서 받은 힘 때문인가?
아니면 계효보가 창궁검제에게 저렇게 흥분할 만한 제안을 했을까?
그도 아니라면 진짜 계효보를 신으로 믿는 것일까?
그의 눈빛에, 광기가 흐르고 있다.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뭔가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반대로 사부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본 교에 투신하고 계신을 받들어라. 그리하면 자비로우신 계신께서 내게 그러했듯 네게도 축복을 줄 것이다. 보이지 않느냐? 내 몸에 흐르는 계신의 위대함이 말이다, 크하하하하!”
저 인간, 닭을 진짜로 신으로 믿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때.
작은 사부가 목소리에 내공을 조금 더 실어 입을 열었다.
“닭은…….”
“……?”
“받드는 게 아니라 먹는 거다.”
“너…… 너 지금…… 감히 네 따위가!”
“노릇노릇 숯불에 구운 닭 다리.”
“갈! 닥쳐라!”
“매콤한 고추를 넣고 볶은 사천 닭볶음.”
“네 이놈!”
“닭 뼈를 푹 고아 면을 넣고 끓인 닭국수.”
“입을 찢어 버리겠다! 닥쳐라!”
“내가 스님이지만 아주 가끔, 나무아미타불, 허허허. 국물은 조금 마셔봤다. 그 맛이 일품이더라, 허허허허!”
“곱게 죽이지 않겠다.”
“남궁! 네놈 뒤를 봐라! 계두교의 신도들조차 닭요리를 생각하며 군침을 삼키고 있지 않더냐! 닭고기는! 맛있다.”
작은 사부의 말에 창궁검제가 부들부들 떨며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십수만 명의 사람 중 제법 되는 수의 사람들이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곧, 창궁검제가 특정인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쉬이이익.
“으아아아악!”
순식간에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이 잘려 버렸다.
더 이상 닭고기를 생각하며 군침을 삼키는 이들은 없었다.
분노한 창궁검제가 다시 몸을 돌려 작은 사부를 노려보았고, 작은 사부 역시 그런 창궁검제를 직시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일인!”
“일계!”
작은 사부의 외침에, 일이만 명에 달하는 우리 반계맹 무인들이 일제히 제창하였다.
“식멸!”
“계육!”
“일인!”
“일닭!”
“닭고기를 먹어 없애자!”
“닭고기를 먹어 없애자!”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고 구호였다.
와! 이 유치찬란한 구호가, 이렇게 감격스러울 줄이야.
“죽인다.”
곧바로 반응이 왔다.
극도로 분노한 창궁검제가, 그 짧은 한마디 말을 뱉음과 동시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창궁검제가 선 자리 위로, 그 하늘로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이 소용돌이의 기둥이 되어 땅에 선 창궁검제와 이어졌다.
이건 눈으로 보고 있어도 말도 안 되는, 정말 무지막지한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쿠르르르르릉.
땅이 울리고 대기가 흔들렸다.
쿠르르르르쾅!
쾅쾅!
창궁검제의 하늘에서 천둥과 벼락이 치기까지 했다.
저것이, 바로 저것이 진정한 무림오대고수의 힘인 것일까?
그 엄청난 위력에 내 심장이 다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놀랐는데 다른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창궁검제의 엄청난 신위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경악한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곧.
창궁검제가 자신의 검을 뽑더니, 작은 사부를 향해 무지막지한 속도로 몸을 날렸다.
하늘에서 시작한 소용돌이의 기둥이 그런 창궁검제와 함께하였고.
창궁검제의 검에서는, 하!
이 또한 보면서도 믿기 힘들다.
무려 삼십 장에 달하는 용이 천둥과 번개를 머금은 채 뿜어져 나와 작은 사부를 집어삼켰다.
지금의 창궁검제를 만든 천뢰구벽신검(天雷九劈神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