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혼란스러움 때문에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백미호가 하얀 그녀의 손으로 덜덜 떨고 있는 내 손을 살포시 잡아 주었다.
요기(妖氣) 따위가 왜 이렇게 따뜻한 거야?
그녀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내 떨림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놀라고 혼란할 필요 없어. 응요와 낭요의 희생으로 계효보가 숨기고 있던 힘에 대해 알 수 있게 됐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것을 대비하며 놈을 죽이기만 하면 돼.”
백미호의 말이 맞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
후회해 봤자 득이 될 건 없다.
문제의 답은 간단하다.
계효보를 죽이면 된다는 것.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하던 대로 계속해. 대신 조금의 이상이 감지되면 곧바로 내게 연락을 줘.”
“천무휘를 만날 때까지 만리연통석을 쓸 수 없잖아.”
“다른 사람에게 기운을 조금만 불어넣어 달라고 해도 되고, 영약 같은 것의 힘을 잠깐만 빌려도 돼. 정말 좁쌀만큼의 기운만 심장에 불어넣으면, 나와는 언제나 연락할 수 있으니까.”
“응. 알았어. 그리고 이거.”
난 백미호에게 광마일기의 마지막 장을 펼쳐 보여 줬다.
계효보가 적다가 만 글귀 부분이다.
그녀는 계효보가 적은 글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얼굴은 더 깊게 구겨질 뿐이었다.
“이건……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나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놈이 내 광마일기에 글을 적은 건 알다시피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건 내가 미리 놈에게 서신을 써서 답을 남긴 거고. 하지만 이번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알 수 없는 이런 글들을 적어놨네.”
“하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남긴 것인지…….”
백미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녀라고 뭔가 딱히 떠오르는 게 있을 리 없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해두고 있을게.”
“이제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야? 응요와 낭요가 없으니 추적하는 것도 힘들 텐데.”
“그러게. 훨씬 힘들어지겠지.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힘은 들어도, 어떻게든 해야지. 우리가 닭을 잡을 거야.”
“따로 움직이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백미호가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고 생각해 그리 보는 것이다.
맞다. 걱정하는 거.
“웅요와 호요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함께 움직일 거야. 계효보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라,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
“괜찮을까? 네가 말한 대로 계효보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잖아.”
“호요를 보고 도망간 것을 보면, 아직 호요의 힘에는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만약 그게 아니라 응요나 낭요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커서 도망쳤을 수도 있는데. 어차피 응요나 낭요에게 치명상을 당했다는 건, 그 역시 호요나 웅요의 무위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해. 호요나 웅요,는 응요나 낭요가 둘이 덤벼도 상처를 내기 힘들거든.”
“호요와 웅요가 그렇게 강해?”
“응.”
일말의 고심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백미호였다.
저 멀리,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 서서 경계를 서는 호요와 웅요를 슬쩍 봤다.
믿음직스럽긴 하다.
그래도, 걱정을 다 덜 수는 없다.
나를 감쪽같이 속인 계효보다.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다.
그런 닭을 상대해야 할 백미호가 계속 걱정되었다.
“혹시 말이야.”
“뭐?”
“내가 죽고 회귀하면, 다시 살아날 수는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너…… 진짜 나 걱정하는구나? 아직도 내가 그렇게 좋아?”
“뭐, 뭔 소리야? 지금 심각한 이야기 하고 있잖아.”
“풋. 응, 그래. 우리도 고심 중이야.”
“고심 중?”
“응.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너무 위험해. 계효보가 너무 강력한 요괴가 됐어. 네 회귀와 함께 우리도 시간을 거스르면, 어쩌면 계효보가 시전하는 억겁의 굴레에 우리가 먹힐 수도 있어.”
“그건 무슨 말이야?”
“네가 광천동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을 해?”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맞아. 그거야.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여분의 생명을 준비하려면 회귀와 동시에 계효보의 요술에 먹힐 위험이 있고, 계효보의 요술에 완벽한 대비를 하려면 하나의 생명만으로 놈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나 할까?”
“어렵네.”
“응. 이건 우리 문제야. 너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엇보다, 아직 계효보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어. 그러니, 너는 내 걱정 그만하고, 네 걱정이나 해.”
“내가 언제 네 걱정을…….”
부끄럽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본 그녀가 웃는다.
역시나, 온몸이 녹아내릴 듯 아름다운 그녀다.
죽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너마저 곁에 없으면, 나 진짜로 미쳐버릴지 모른다.
도사 마악치가 아니라, 다시 광천마제 마악치가 되어 계효보를 상대하게 될지 모른다고.
그러면, 그렇게 된다면!
계효보와 함께 이 세상도 피로 물들게 되어 버려.
그러니, 제발, 살아 줘.
계속 이렇게 웃어 줘.
부탁이야.
“이만 간다. 이상한 낌새 있으면, 곧바로 연락하는 거 잊지 마. 알았지?”
“응. 잘 가. 몸조심하고.”
그녀는 떠났다.
환히 웃고, 나를 향해 손까지 크게 흔들어 주며 그렇게 떠났다.
그런데 왜?
그녀의 뒷모습이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그녀가 아니라 내가 불안할 것일까?
휴우, 빨리 사부님을 만나야겠다.
사부님을 만나면, 거짓말처럼 이 불안한 마음이 사라질 테다.
*
“사부님, 그 노래 있잖아요.”
“무슨 노래 말이냐?”
“왜, 제가 어렸을 적에 밤에 측간 혼자 가는 거 무섭다고 사부님한데 같기 가 달라고 했었잖아요.”
“그렇지, 허허. 그때 너는 귀신을 제일 무서워했었지, 허허허.”
“그때 사부님이 저 변 보고 있으면, 측간 앞에서 항상 불러 주던 노래요. 당, 당, 당, 당다다다당당당당당. 이렇게 부르는 노래요.”
“아! 그거. 그렇지. 생각난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는 왜 하느냐?”
“저는 지금까지 그 노래에 멸귀의 힘이 담겨 있는 줄 몰랐어요, 하하. 귀신을 쫓을 수 있는 힘이 있는 노래였으면, 진즉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사부와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다 지난번 회귀에서 이 노래로 귀신을 쫓았던 광마일기의 내용이 생각나 사부에게 물은 것이다.
그런데.
“멸귀?”
사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거…… 당당당. 그 노래에…… 귀신을 쫓는 힘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금시초문이구나. 그건 그냥 밤에 측간 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몇몇 마을에서 어른들이 불러 주는 노래일 뿐이란다.”
“사…… 사부님?”
“그래.”
“아니에요?”
“아니다.”
“조금도. 아주 쬐에에에금도 그런 힘 없어요?”
“없단다.”
“제가…… 제가 분명…… 그 노래 불러서, 춤이 저절로 나서…… 그랬더니…… 귀신이 사라지던대요?”
“꿈을 꾸었느냐?”
“아니요. 실제로요.”
“며칠 전, 비싼 옷 입고 돌아왔을 때. 단전까지 사라지고, 심장에 이상한 기운을 품고 왔을 때 말이다. 그 사흘 동안 집을 나가서 귀신을 쫓고 온 것이더냐?”
“그게…… 비슷해요.”
“어허, 허허허.”
“분명, 분명 그 노래로 귀신을 쫓아냈다니까요.”
“믿는다, 허허허.”
“그 노래를 불렀더니 귀신이 쇳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며 소멸됐어요. 진짜예요!”
“하지만 그건 그 노래의 힘이 아니다.”
“당, 당, 당. 그 노래 맞다니까요.”
“노래는 그저 노래일 뿐이다.”
“그럼 귀신이 어떻게 소멸된 건데요?”
“네가 하지 않았느냐?”
“제, 제가요? 저 귀신 쫓는 법 모르는데요? 사부님이 가르쳐 준 적도 없잖아요.”
“허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도 조금 놀라긴 했다. 네가 이미 훌륭한 도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귀신까지 쫓을 정도의 도사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로, 정말 제가 귀신을 쫓은 거예요? 그 노래가 아니라요?”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네 의지가 귀신을 쫓아낸 것이니라. 네 수양이 그만큼 깊어졌고, 네 도력이 그만큼 쌓였다는 의미니라.”
“제, 제가요? 제가 진짜 도사에요?”
“허허허! 어허허허허! 네가 도사가 아니면 무엇이더냐? 오늘따라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는구나, 허허.”
“아, 그렇죠. 제가 도사 맞죠.”
“그렇다. 귀신까지 쫓을 수 있는 깊은 도력의 참 도사니라, 허허.”
그게, 그게 아니었어?
당당당이 귀신을 쫓는 노래가 아니었던 거야?
하! 돌겠네.
아니지,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이지.
내가 내 의지만으로 귀신을 쫓았다고 하니.
나도 사부님이나 우리 사조님들처럼 벌써 어마어마한 도사가 된 건가?
요괴도 의지만으로 쫓아 버릴 수 있는 건가?
“그런데 악치야.”
“네, 사부님.”
“무리는 하지 말거라.”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마 네가 쫓았다는 귀신은 작은 귀신일 것이다.”
“잡귀요?”
“보통 그렇게들 부르지.”
“음…… 사실, 잡귀 맞아요.”
“큰 귀신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 네 본능이 위험을 알리는 귀신을 만나거든, 혼자 소멸시키려 하지 말고 항시 나에게 말해야 하느니라. 큰 귀신을 쫓아내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느니라.”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요?”
“약관도 되지 않은 네가 작은 귀신이라지만, 그래도 엄연한 귀신을 쫓아 버린 것은 이미 훌륭한 도사라는 뜻이다.”
“사부님께서는 몇 살에 귀신을 쫓아냈는데요?”
“나는…… 어험.”
“몇 살 때요?”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허허허.”
“그러니까 몇 살 때요?”
“배고프지 않니?”
“몇 살 때요!”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사람 몸에 씌운 귀신을 쫓아냈단다.”
“…….”
우리 사부 말이다.
타고났다.
천무휘가 천재면, 우리 사부는 천재 할아버지 정도 되시겠다.
이건 뭐, 격차가 너무 커서 질투고 뭐고 할 수도 없었다.
사부 왈.
어떤 사람이 괴로운 비명을 질러서 가봤더니, 그 사람 몸에 귀신 씌운 게 눈에 보이고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었단다.
그래서 속으로 ‘귀신아! 물러가! 이 아저씨 괴롭히지 마!’라고 외쳤더니, 귀신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고 한다.
이게 우리 사부의 여덟 살 퇴귀(退鬼)의 첫 경험이었다고 한다.
“약속해야 한다, 악치야. 큰 귀신은 아직 네가 상대할 수 없으니, 그때는 꼭 이 사부에게 말해야 하느니라.”
“네, 약속할게요, 사부님.”
“그래, 우리 악치 착하지, 허허허.”
“그런데, 사부님.”
“그래, 악치야.”
“큰 요괴를 만나도 사부님께 말씀드려야 해요?”
“그렇다. 큰 요괴도 만나거든 이 사부에게 말하도록 하여라, 허허허.”
*
사부와의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다 스물한 살이 됐다.
사부와 함께 절강 항주로 갔다.
초향과 실컷 놀아 주고, 사부를 무적 할매에게 맡겼다.
귀정사로 가 작은 사부를 만난 후, 다시 의제가 있는 강서 남창으로 떠났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똑같은 일상이었다.
그렇게 강서 남창 만리현에 도착했다.
남창 만리현의 서쪽 산.
의제의 부모님 묘가 있는 곳이다.
산을 오르기 전, 시전에 들러 이것저것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비싼 값에 사 준비했다.
의제와는 한바탕 칼부림을 해야 의형제가 되겠으나, 의형제를 맺은 후에는 언제나 의제와 함께 부모님의 제사를 정성스레 지내 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산을 올라 의제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묘에 도착했…… 어?
의제가 있다.
그런데.
봉분을 다듬고 있어야 할 의제가 왜?
봉분 옆에 누워 있다.
아니다.
쓰러져 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쓸 수도 없는 신법까지 발휘해 봉분을 향해 미친 듯 달렸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며, 하늘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의제를 향해 미친 듯 달려갔는데.
의제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