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던 중, 그 길을 지나던 지금의 아버지, 독고검문 문주님의 눈에 뜨이게 됐습니다. 저를 매우 예쁘게 봐 주셔, 독고검문으로 데려가길 바란다고 저희 분타주에게 말했고…….”
이번엔 내가 끼어들었다.
“혹시 분타주 이름이……?”
“아갈개 분타주라고 합니다. 좋은 분입니다.”
역시나 구지개가 맞군.
휴우, 이건 또 무슨 인연이람?
광천마제 시절에는 없던 인연인데.
어찌 된 거지?
“저는 개방에 남고 싶었지만, 아갈개 분타주나 다른 거지 아저씨들이 미쳤냐며, 고기랑 밥이랑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부잣집에 가는 건데 왜 거부하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결국 등에 떠밀려 독고검문에 가게 됐고, 기왕 독고검문 사람이 되기로 한 것,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 모습이 부모님 보시기에 좋으셨는지, 독고검문에 간 지 일 년도 안 되어 양자로 입양해 주셨습니다.”
“다른 혈육은 없었고?”
한해북이 물었다.
“네.”
“독고검문의 모든 것이 자네 것이 되는 순간이었겠군. 혹시라도 혈육이 없던 독고검문의 재산을 탐하던 자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겠고.”
“아마도 그것 때문인 듯합니다.”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독고검문은 처음 들어 보는데, 독고검문이 그리 대단한 가문인가?”
한해북이 물었지만, 대답은 사마준이 아닌 의제가 했다.
“우리 우각당이 있는 남창은 강서 북쪽, 독고검문이 있는 신양은 하남 남쪽. 도보로도 닷새밖에 걸리지 않고, 말을 타면 하루 이틀 안에 닿을 거리라, 독고검문에 대해선 나도 제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네, 한 형. 시조가 오륙백 년 전 독고신검이란 대협으로, 그 검법의 이름이 곧 별호였다고 합니다. 당시 십대무림고수에 이름을 올렸다고 하며, 일부에서는 세력을 만들지 않아 그랬지, 어쩌면 당시 천하제일인이 독고신검 대협이었을지 모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신양에 자리를 잡고, 독고검문이란 가문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 후세 중에는 그렇게 이름을 알린 고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왜죠? 검법이 실전이라도 됐나요?”
한해북의 질문에 의제가 사마준을 슬쩍 본 후 답을 했다.
“검법 자체가 과장됐다는 말도 있고, 그 후예들이 야망이 없었기에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양에서는 함부로 독고검문을 건드릴 세력은 없고, 작은 가문이지만 가뭄이나 홍수가 나서 굶주리는 자들이 생겼을 때, 막대한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돕는 부유한 가문이라 들었습니다.”
“돈을 노린 것이군.”
한해북이 말을 하며 시선을 사마준에게 옮겼다.
“네. 그런 듯합니다. 복면을 쓴 자들은, 독고검문의 재산을 집요하게 노리며 아버지와 저를 고문했습니다. 저는…… 사실 저는 고문은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아버지께서 오백 년 동안 이어진 독고검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그놈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날 밤 자결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
“고문에 지친 아버지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지하 뇌옥 벽에 머리를 박아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뇌옥 밖에서 경계를 서던 그들이 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수룡검 천무휘 대협과 여러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어쩌면…… 어쩌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결을 포기하고 탈출을 감행한 것입니다.”
음.
녀석의 말대로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말이다.
광천마제 시절 사마준, 그러니까 구지개는 그때 그냥 자결을 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가 바뀌었다.
또 현재가 바뀌었다.
내가 바뀌어 그리된 것이다.
내가 마두가 되지 않고, 또 대마두가 되지 않았기에.
다시 협행을 하여 그 이름을 널리 알렸기에.
물론, 천무휘 녀석 덕이 훨씬 더 크겠지만.
아무튼 내가 그리 바뀌었기에, 미래와 현재가 바뀌었고, 그래서 구지개가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이다.
나라는 한 사람의 변화가, 생각지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곳의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그 파급력이.
정말 내가 조금도 알지 못했던 곳까지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놀람과 감동이었다.
그로 인해 구지개는 나의 광천마제 시절과 다른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늘이 도와 가까스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아버지가 잡혀 있던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신양에서 그 세력이 가장 크고 강한 정륭방이었습니다. 저희 독고검문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는데…….”
침울한 얼굴의 사마준이 말을 이었다.
“저는 곧바로 제가 살던 개방 허창 풍평분타로 달려갔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신양에 도움을 요청할 문파는 없었나? 독고검문은?”
한해북이 계속하여 물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정륭방에서 벗어나고 도주하며, 탐색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제가 사라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또 독고검문의 정문은 우리 독고검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독고검문을 장악하고, 독고검문과 관련된 소문마저 누군가 차단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륭방 혼자 한 일이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정륭방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나, 신양에는 그에 못지않은 문파와 가문에 꽤 여럿 존재합니다. 그중 누가 정륭방과 작당했는지, 저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풍평분타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개방에서 도움은?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에서 나선다면, 이건 뭐 그냥 쉽게 해결될 일이잖아. 굳이 어렵게 우릴 찾아올 필요도 없고.”
“아무리 개방이 크고 강하다 하지만, 천하의 모든 일을 개방 혼자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제 일이 아니더라도, 개방의 고수들은 거지가 된 것을 후회할 정도로 바쁘고 부지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현재 개방의 방도가 아닙니다. 저 한 명 때문에 신양이라는 한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는 정륭방과 싸울 고수를 보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우리다?”
“네. 아갈개 분타주는 잘못이 없습니다. 대협들의 위치를 저에게 유출한 것에 대한 죄는, 추후 제가 모두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저희 아버지만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사마준이 우리를 향해 부복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게, 참아 왔던 울음이 터진 모양이다.
한해북과 의제가 동시에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도와주자는 눈빛이었다.
당연하다.
도와줄 것이다.
생판 모르는 남도 돕는데, 열일곱 번째 회귀 때 이 녀석은 일부러 나를 쫓아와 도움을 주려 했던 적도 있지 않은가.
“갑시다!”
“형님, 당장 신양으로 가서 그 정륭방인가 뭔가를 부수어 버릴 참입니까?”
“아니, 일단 거지 소굴부터 찾아가자.”
“네? 갑자기 거지 소굴은 왜요?”
“가 보면 알아.”
*
호남 악양 변두리의 폐가.
거지 소굴이다.
개방의 분타이기도 하다.
“그, 그러니까…… 쿨럭. 아이쿠. 죄송합니다, 마 도사님.”
“괜찮소.”
“그러니까 지금 정보를 얻으러 오신 게 아니라, 정보를 주러 오셨다고요?”
“그렇소.”
개방 악양 분타주.
거지 치고는 매우 뚱뚱하다.
한자리에 앉으면 밥을 다섯 그릇이나 먹는다고 그 이름까지 오완개(五碗丐)다.
그가 눈알을 마구 굴리며, 내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고 있다.
“깊이 생각할 것 없소, 오완개 분타주님. 말 그대로 정보를 드리러 온 것이오.”
“음,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주고자 하시는 정보가……?”
“정확히 열흘 뒤. 나와 의제 그리고 한 형이 하남 신양 정륭방의 방주를 죽일 것이오.”
“그…… 그게……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을…….”
“말 그대로요.”
뚱뚱한 거지의 볼살이 떨리고 있다.
그 눈동자는 볼살보다 더 심하게 떨린다.
하지만 그 떨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지 신분으로 저렇게 피둥피둥 살을 찌울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구걸을 잘한다는 의미.
구걸을 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눈치가 좋아야 한다.
오완개가 딱 그랬다.
“휴우, 마 도사님의 뜻, 알겠습니다. 주신 정보는 잘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이 거지 놈들 입이 가벼워, 여기저기 흘릴 수 있음은 감안해 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처음 봤을 때부터 오완개 분타주가 마음에 들었소. 그렇게 잘 흘려 주시오!”
“넵! 마 도사님.”
*
말을 타고 하남으로 이동 중이다.
하남 신양까지 열흘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중간 지점.
허허벌판의 마른땅이 나왔고, 그 땅 위 유일하게 존재하는 초라한 국숫집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간단히 점심을 때우기 위함이다.
그렇게 나와 의제, 한해북, 사마준까지 식사를 마치고.
“음, 독이 들었군. 의제, 한 형!”
툭. 툭.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제와 한해북 그리고 사마준까지 거의 동시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냥 그렇고 그런 독이 절대 아니다.
대단한 독이다.
내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을 정도의 최상급의 독이다.
이 정도면 거의 무형지독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음, 누가 이렇게 대단한 독을 나에게 하독한 것일까?
사방이 마른땅으로 이어지는 허허벌판의 평지다.
건물이라곤, 흙으로 만들어진 이 초라한 국숫집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땅을 밟고 서 있는 사람은 나와 조금 전 우리에게 국수를 삶아 준 빼빼 마르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대머리 노인네밖에 없다.
“누구냐, 넌?”
내가 슬금슬금 기운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초라한 국수 노인네는 표정의 변화가 조금도 없이 답했다.
“이십 년 전까지 사람들은 나를 살왕(殺王)이라 불렀다.”
“나에게 왜 이러는 것이지?”
“한 달 보름 전, 산서에서 네게 죽임당한 혈철마관(血鐵魔觀) 육시경이 내 동생이다.”
“씨팔.”
퍼퍼퍼퍼퍼퍼퍽!
콰콰콰콰콰콰쾅!
갑자기 마른 땅이 열리며 다섯 개의 인영이 튀어나와 나를 공격했다.
바로 내 발아래였다.
이들이 튀어나올 때까지,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다.
너무 급박했다.
또 위험했다.
그래서 내가 끌어낼 수 있는 내공을 모조리 끌어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검강이 쏟아졌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아! 내가 너무 흥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폭발의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 뿌연 먼지 사이로 뾰족한 쇠꼬챙이가 내 목을 꿰뚫을 때까지.
나는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는 마른 땅 위에 쓰러졌다.
푹.
내 목에서 뽑힌 쇠꼬챙이를, 살왕이란 놈이 쓰러진 내 머리 바로 옆 땅에 꽂았다.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계속 뿜어져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천무휘가 떠나고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죽는다.
간신히 허벅지에 두 글자를 문신할 수 있었다.
‘살왕(殺王)’
이것이 나의 스물두 번째 죽음이었다.
*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이상한 동굴에서 깨어났……
-아, 아, 들려?
“끄아아아아악! 귀신이다!”
-야! 들리냐고?
“살려 줘! 끄아악! 귀신이 말한다!”
-야! 마악치! 안 들려? 대답 좀 해 봐!
“부처님! 원시천존님! 옥황상제, 염라대왕님! 살려 주세요! 귀신에이요.”
-아직 각성 전이야? 야! 마악치! 심장에 기운을 불어넣고 말해 봐.
“귀신이 계속 말을 해요! 살려 주세요! 착하게 살게요! 엉엉엉.”
-음, 이 녀석 아직이군. 야, 마악치! 지금부터 내 말 똑똑히 들어. 네 눈앞에 작은 석탁 보이지? 그 위에 책자 한 권 있고. 우선 그거 읽어! 그러면 네가 누군지, 또 네가 왜 여기에서 깨어났는지 알게 될 거야. 내가 누군지도 알 테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 한 가지는…… 미리 말해줘야 할 것 같아. 낭요(狼妖)하고 응요(鷹妖)가…… 죽었어. 계효보가 둘을 죽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