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런 후…… 무림맹주 창궁검제 그 양반이, 너희를 완전히 신뢰해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할 수 있겠나?”
아주 찰나.
언묵이 빠르게 생각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건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곧이어.
“존! 명! 주군의 명, 목숨을 바쳐 완수하겠습니다.”
“잠깐!”
결연한 얼굴과 목소리로 내 명령에 따르겠다는 언묵의 말을 내가 가로막았다.
다시 의아한 얼굴이 된 언묵.
아니,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당황한 얼굴이 됐다.
“너희는 다 좋은데, 그게 문제야.”
“무, 무슨 말씀이신지…… 지적해 주시면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충!”
“다 좋은데. 왜 말끝마다 목숨을 거냔 말이야. 그런 각오는 정말 좋아. 그런데 너.”
“충!”
“진짜 목숨 걸 상황 닥치면,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목숨 걸고 뛰어들 거지?”
“그, 그게…… 그렇습니다. 충!”
“아니야. 틀렸어.”
“……?”
“그게 좋게 말해서 우직한 거고, 올곧은 것이지.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짓이고 엄청나게 비합리적인 행동이야. 아니, 해결도 못 하고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왜 달려들어? 사마천의 사기에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이란 말이 있잖아. 무슨 뜻인지 알지?”
“충!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참아도 늦지 않는다고…….”
“맞아! 바로 그거야! 안 되겠다 싶으면, 뒤로 물러나. 가끔은 샛길로 가고, 뒷길로도 가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개구멍이라도 찾아. 우선 살아남으라고. 개죽음당하지 말고. 복수도! 충성도! 살아남아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야.”
“추, 충! 충! 주군의 가르침! 뼈에 새기겠습니다.”
그래, 제발 뼈에 새겨라.
광천마제 시절.
너희가 그렇게 허무하게만 죽지 않고 영리하게 행동했으면, 내가 그렇게까지 비참하게 쫓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번 생에는 잘 좀 해 보자고.
“우선 무림맹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수련에 매진해. 틈날 때마다 좋은 일하는 거 잊지 말고. 그렇게 맹주전으로 들어가 맹주의 신임을 얻게 된다면. 그때 너희를 찾는 자가 있을 거야. 처호, 처선 아니면 공손병 선생이 사람을 보낼 거고. 여의치 않으면 무당이나 아미에서 사람을 보낼 거야.”
“…….”
“어쩌면 내가 직접 갈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때까지, 그냥 다 기록해 놔. 하나도 빼놓지 말고. 무슨 뜻인지 알지?”
“존명! 모든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십합단의 일이 해결되었다.
귀정사에 잡혀 있는 원곡이 언제 입을 열지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입을 열지 않고 죽게 될 수도 있다.
만약 원곡이 입을 연다고 해도, 거대한 음모를 상대하기엔 부족하다.
최대한 내가 모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모아야 한다.
그래서 십합단 녀석들을 무림맹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사패천은 무림맹보다 훨씬 크고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십합단은 그 사패천에서도 십대무력대 안에 이름을 올린 녀석들이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분명 맹주전 직속 무력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녀석들이 맹주의 눈이 되고 귀가 될 것이며 수족이 돼 있을 것이다.
내가, 맹주가 꾸미고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가라! 무림맹으로. 그곳에서 너희의 숨겨 두었던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로 날아라.”
“존! 명!”
*
대명장을 떠났다.
산서를 넘어 섬서에 도착했다.
화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천무휘는 단 한 번도 멍한 상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또렷한 정신이었고 활기마저 넘쳤다.
아무래도 자신의 상태를 확신하고 폐관 수련까지 결심하고 나니, 마음과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아 그런 듯했다.
어쩌면 일부러 우리와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을 잊으려 그랬는지도 모르고.
아! 그나저나 진짜 싫다.
이 녀석과 헤어지는 게 이렇게까지 싫을 줄은 나도 몰랐다.
솔직히, 눈물 날 뻔했다.
간신히 참았다.
“마 형, 흑흑흑. 곽 형, 한 형, 흑흑흑. 미안해요, 엉엉엉.”
천무휘는 엉엉 울었다.
“엉엉엉.”
의제도 함께 엉엉 울었다.
나와 한해북은 눈시울이 시뻘게져 하늘을 올려다보며 흐르려는 눈물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천무휘는 그렇게 매화가 가득 핀 화산을 올랐다.
이제, 우리 곁에 천무휘는 없다.
*
쾅!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호남에서 하하마(河下魔)라는 마두와 삼백여 합의 싸움을 벌인 후에야 놈의 목을 벨 수 있었다.
민간의 어선 이백여 척을 포함해, 동정십팔채에서도 배를 마흔여 척이나 잃었을 정도로, 물 위에 떠 있는 배만 보면 미친 듯 달려들어 침몰시키는 미친 마두였다.
고작 절정의 고수인 놈과 삼백여 합이나 싸운 건, 당연히 놈이 수마(水魔)였고, 물속에서 싸워 그리됐다.
솔직히 죽는 줄 알았다.
진짜로 죽을 뻔했다.
천무휘가 화산으로 가고 한 달.
우리는 그동안 하하마를 포함 마두 셋에 마적 떼 한 무리와 인신매매 일당 한 무리를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우리가 엄청난 활약을 벌이고 있음에도 그 소문이 예전과 같이 크게 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다 천무휘 효과다.
하! 활약은 예전보다 더하고 있는데,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니.
역시 천무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더 큰 문제도 있다.
마두 놈들 말이다.
예전에는 우리가 나타났다 하면 기부터 꺾여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 미친놈들이, 그냥 죽자 살자 달려든다.
아!
이것도 역시나 천무휘 효과다.
천무휘가 없으니, 자기들도 우리와 한판 붙어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리하는 것이다.
돌겠다.
덕분에 마두 한 놈 한 놈 잡을 때마다, 정말 최선을 다해, 가끔은 목숨까지 걸고 싸워야 한다.
보고 싶다, 천무휘.
“형님, 누가 오는데요?”
마두가 숨어 있다는 정보를 받고 이동하던 외딴길.
의제의 말마따나 저 먼 곳에서 우리를 발견한 청년이 죽을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다.
곧 우리 앞에 도착한 청년.
상당히 비싼 의복을 입고 있는데, 그 비싼 옷이 너덜너덜하다.
얼마나 씻지 못하고 굶주렸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유독, 청년의 손가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열 개가 아닌 아홉 개의 손가락을 가진 청년이다.
나이도 스무 살 전후로 보인다.
어쩌면 그때 그 거지 녀석도 지금은 저 나이가 됐을 텐데.
구지개(九指丐) 기억하는가?
맑은 눈동자와 아홉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던 거지 소년.
내가 한참 제갈세가를 상대로 죽고 다시 살기를 반복하며 싸울 당시 말이다.
열일곱 번째 회귀 때였고, 나는 한 손에 검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독수리 발톱과 같은 조를 들고 싸우는 제갈세가의 숨은 고수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때 찾아간 곳이 바로 우리 갑돌산에서 가장 가까운 개남의 하남 허창 풍평분타였다.
우리 현화문에서 가까워도 사흘거리였고, 그나마 그곳이 정식 개방 분타였다.
분타주가 바로 아갈개였던 그 개방 분타.
그때 만났던 거지 소년이 바로 구지개다.
풍평분타에서 유일하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소년 거지.
광마일기에 그리 기록되어 있다.
물론, 열일곱 번째 회귀 후로는 풍평분타에 갈 일이 없었고 구지개를 만날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앞에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 청년의 눈도 상당히 맑다.
다급함 속에 그 총명함과 지혜로움이 깊이 드리워 있다.
하지만 이 청년이 그 구지개는 아니다.
찢어진 옷이라지만 굉장히 비싼 옷이다.
또, 있다.
구지개와 같은 개방의 구결제자는 거의 다 삼류고 간혹 수백 명 중 한두 명의 이류가 있을 뿐이다.
대부분 구걸하다가 개한테 물리지 않기 위해, 타구봉법 한두 초식을 익힌 게 전부다.
하지만 이 청년은 완연한 일류의 고수다.
또 자세나 기도를 보았을 때 봉법이 아닌 검법을 익혔다.
내가 구지개의 얼굴은 모르지만, 분명 이 청년이 구지개가 아니라 생각하는 이유다.
털썩.
숨을 헐떡이며 우리 앞에 다가온 녀석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님, 우각도협 곽우적 대협, 구절협 한해북 대협이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도와주십시오!”
이제는 아예 머리까지 땅에 조아리며, 금방 오열이라도 토할 것처럼 간절히 애원하는 그였다.
“음, 일단 자리부터 옮겨 이야기하는 게 좋겠소. 저쪽으로 갑시다.”
*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아름드리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커다란 바위 위에 우리 네 사람이 자리를 했다.
역시나 많이 다급했는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곧바로 입을 여는 청년이었다.
“저는 하남 신양에 있는 독고검문의 소문주 사마준이라고 합니다. 지금 문주님이신 저희 아버지께서 정륭방의 지하 뇌옥에 갇혀 있습니다. 구해 주십시오!”
의제가 나섰다.
“이봐, 사마 공자. 다짜고짜 구해 달라면 우리가 ‘그럽시다!’ 이러면서 구해 줘야 해? 뭔 사정인지 제대로 설명을 해야 구해 줄지 말지 생각이라도 해 볼 거 아니야? 꽤 다급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부터 하남 신양까지 말을 타고 가도 며칠은 걸려. 그러니 좀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을 해 보라고.”
사마준이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급해서…….”
“그래. 그렇게 호흡도 편히 하고, 아버지가 왜 갇히게 된 건지부터 설명을 해 보라고.”
“네, 곽 대협.”
의제 녀석.
사마준이 대협이라고 호칭하자,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하지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내 눈에는 보였다.
아직도 대협이란 호칭이 꽤 좋나 보다.
“어느 날 밤 그냥 갑자기 그곳으로 납치되어 갔습니다. 분명 저희 집인 독고검문의 제 방에서 잠을 잤는데, 눈을 떠 보니 습하고 어두운 지하 뇌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검은 옷과 검은 복면을 한 이들이 아버지를 고문했습니다.”
“왜지? 그리고 자네도 같이 잡혀갔다면서, 의복은 너덜너덜하지만, 몸은 멀쩡해 보이는데?”
“물고문이나 침으로 찌르는 것과 같이 몸에 거의 상처를 남기지 않는 고문만 했습니다. 채찍과 당근의 고문 수법입니다. 그들의 말에만 따르면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며 고문을 지속했습니다.”
사마준이 말을 하면서 자신의 양쪽 소매를 팔꿈치 윗부분까지 끌어 올렸다.
미세하지만 분명 수십 번 이상 침으로 찌른 자국이 보였다.
“고단수군.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데?”
“저를 파양하고, 독고검문의 모든 재산과 이권을 처음 듣는 이름의 사람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의 서류를 친필로 작성하고 수인을 찍으라 했습니다.”
“잠깐!”
한해북이 끼어들었다.
처음부터 사마준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였다.
“친자가 아니었어?”
“네, 그렇습니다. 저는 양자입니다.”
“음. 뭐, 그건 그렇다고 하고. 아까부터 의문이었는데,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웬만큼 대단하다는 정보 세력도 우리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할 텐데?”
사마준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답했다.
“개방에서 정보를 주었습니다.”
“개방? 말도 안 돼! 개방에서 자네에게 우리에 관한 정보를 넘겼을 리 없어, 절대로.”
이건 한해북 말이 맞다.
돈도 돈이지만, 개방은 꽤 정의와 협의를 중시하는 거지들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협조하는 것은, 이미 내가 지불한 금액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독고검문이란 곳의, 그것도 친자도 아닌 양자의 부탁을 받아 정보를 제공했다니.
이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사마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한때 개방의 방도였기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뭐, 뭐야?
갑자기 전개가 왜 이래?
개방도라니?
설마……?
“저는 원래 하남 허창 풍평에 있는 개방 분타에 소속된 거지였습니다. 분타에서는 제 손가락이 아홉 개인 이유로 구지개라 불렸습니다.”
이 녀석!
이 녀석이 그 구지개가 맞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