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화경(化境).
검을 한 번이라도 잡아 본 무인이라면, 아니다. 무림을 한 번이라도 꿈꾸어 본 자라면,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궁극의 경지다.
대자연의 기운을, 초인의 단계마저 넘어서 극한의 한계까지 품을 수 있는 게 바로 화경의 고수다.
검 한 자루만 손에 쥐여 준다면, 그 적이 천이고 만이고 십만이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먹 한 방에 바다를 가르고, 손짓 한 번에 산을 무너뜨린다.
한마디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인간이 바로 화경의 고수다.
지고하고 지고하며 또 지고한 곳에 화경이란 세계가 있다.
어험!
자랑은 아니지만, 어험! 어험!
난, 광천마제 시절 스물다섯 살에 그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
일천 년 무림사를 통틀어도, 나같이 젊은 나이에 화경의 벽을 깬 고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한마디로, 내가 확실히 무(武)에 있어서는 천재라는 소리지.
하하하하하!
하지만 이렇게 자랑하는 것도, 또 웃을 수 있는 것도.
오늘까지인가 보다.
천무휘 이 녀석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내 옆에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녀석.
하아!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아무튼 이 녀석.
아직 스물세 살이다.
나랑 동갑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녀석이 글쎄!
(상략)
놀랍구나.
그 아이가 천재인 건 알았지만, 벌써 화경의 벽을 깨려고 하다니.
(하략)
-작은 사부의 서신 中
(상략)
보내주어야 한다.
홀로 마음의 수련을 쌓을 시기다.
수룡검 정도의 천재라면, 곧 화경의 벽을 깰 것이다.
(하략)
-무적 할매의 서신 中
돌겠다.
부러워 미칠 것 같다.
스물세 살에 화경이라니.
내가 말이다.
사실, 알고 있었다.
녀석의 상태가 그러하다는 거,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면 꼭 녀석에게 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작은 사부와 무적 할매가 똑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제는 녀석의 상태를 제대로 인정해 줘야 한다.
사실 꼭 녀석이 부러워서만 이러는 게 아니다.
이제 우리 네 사람.
가족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녀석들이야 나를 본지 이삼 년밖에 안 됐다지만, 난 이미 여러 회귀를 거치며 이십 년 이상 녀석들과 함께하는 중이다.
내 친구고, 형제고, 전우가 바로 이 녀석들이다.
가족이다.
그래서 헤어지기가 너무 싫다.
그게 아무리 잘난 천무휘라고 해도.
또 있다.
솔직히 이것도 조금 자존심 상해서 인정하긴 싫지만, 이 마당에 인정해야겠다.
나 말이다.
천무휘랑 함께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 죽음의 횟수가 확연하게 줄었다.
내 무공의 일부를 되찾은 것도 있고, 의제나 한해북의 도움도 분명하게 있다.
하지만 확실히 천무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그것도 아주, 매우 많이.
그래서 솔직히 겁도 난다.
천무휘 녀석이 없으면, 내가 녀석을 보내 주면.
아!
또 언제 어떤 칼에 맞아 죽을지 모르지 않겠는가.
갑자기 슬퍼지네.
광천마제라 불렸던 나, 마악치가.
천무휘가 떠나고 나면 죽을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에휴.
하지만 방법이 없다.
작은 사부나 무적 할매의 말마따나, 또 내가 진즉 보고 느낀 바에 의하면, 천무휘는 지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보내 줘야 할 시간이다.
“천 형.”
“앗! 네. 아…… 죄송해요, 마 형. 제가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하하.”
미안한 듯, 멋쩍게 자기 머리를 긁어대는 천무휘.
난 녀석을 향해 방긋 웃어 줬다.
* * *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다.
그래서 한참 수련에 빠져 있던 의제와 한해북까지 불러, 우리 넷 모두가 자리했다.
난 이들에게 현재 천무휘의 상태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의제와 한해북은 스물세 살에 화경의 벽을 깨려 한다는 말에, 거의 실신 직전까지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천무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인 게 전부였다.
녀석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나보다 더 먼저 깨달았을 테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천 형?”
천무휘가 아주 짧게 고민한 후 답했다.
“아무래도 화산으로 가야겠지요.”
예상했었다.
가족이라곤 여동생 천예휘 한 명뿐인데, 그 여동생이 화산에 있다.
또 화산은 그에게 마음의 고향과 마찬가지인 곳이다.
열일곱 번째 회귀 때 화산파의 일장로 극혼검왕 범철승이 그랬고, 이번에 무림맹 화산장로 이석계가 천무휘에게 그리 대해 줬듯 말이다.
나와 의제, 한해북 모두 알고 있다.
거기에 더해, 화경의 벽을 깨기 위해서는 무아지경, 몰아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게 분명하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다.
든든한 호법도 있어야 할 테고.
천무휘가 화산을 선택한 것은, 두 번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그냥 정답이다.
“마 형, 곽 형, 한 형, 함께 가실래요?”
“화산파로요?”
“네!”
천무휘 녀석이 갑자기 들뜬 얼굴로 저리 말했다.
슬쩍 의제를 봤다.
녀석, 즐겁게 웃기만 한다.
천무휘를 만나고 지금까지 줄곧 저래 왔다.
천무휘가 화산파 소속이건 아니건, 그건 의제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듯 그렇게 진심으로 천무휘를 대해 준 의제다.
의제 녀석.
어쩌면 저 녀석이 나보다 더 도사 같기도 하다.
어찌 아니겠는가?
의제의 아버지, 의제의 가문.
화산파에 의해 멸족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의제는, 단 한 번도 그런 티를 낸 적이 없다.
광천마제 시절의 나.
검후에게 맞은 칼빵 아흔여덟 방 정도는 의제의 아픔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화산과 우리는 정말 지독한 악연이 아닐 수 없다.
광마일기에도 정확히 적혀 있다.
나와 의제가 사패천을 만들고 군림천하를 하게 된 후, 의제의 복수에 대하여 말이다.
나와 의제는 사패천의 고수를 구름같이 이끌고 화산에 올랐고, 화산파는 항거를 포기했다.
그리고 의제는, 아버지를 죽인 원흉인 감붕과 감붕의 사부인 화산파 장문인 자하검군(紫霞劍君) 이백면 두 사람의 목을 베는 것으로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복수를 끝냈다.
내가 다 화가 풀리지 않아, 의제를 먼저 화산 아래로 내려보낸 후 장로들을 비롯한 수십 명의 목을 잔인하게 베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뭐, 그게 훗날 정사연합대의 추격대에 언제나 화산파와 화산검후가 선봉에 서게 되는 결과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에이, 됐어요, 천 형. 형님이 그랬잖아요. 천 형은 지금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요. 괜히 우리가 가면 화산파 전체가 시끌벅적할 거예요. 제 인기가 어디 좀 많아야죠. 천 형 수련하는 데 방해만 될 거예요, 하하.”
의제 녀석.
역시나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아픔은 조금도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함께 가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형들께 화산파 구경도 시켜 드리고 싶고요. 지난날 제 여동생이 무례하게 굴었던 것도 따끔하게 혼내서 사과시켜 드리고도 싶어요. 함께 가요. 네?”
천무휘는 모른다.
의제의 사연은 나만이 알고 있다.
이쯤에서 내가 나서야 한다.
의제를 더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천 형, 그건 의제 말이 맞아요. 괜히 소란스러운 건 저도 질색이에요. 화산의 산구(山口, 산의 입구)까지만 함께 가고. 거기서 깔끔하게 헤어집시다. 화경의 벽을 깰 때까지, 우리 얼굴 볼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열심히 수련에 임해요.”
“음, 그래도 아쉬운데.”
천무휘 녀석.
천하의 수룡검이 입을 대 발 내밀고는 뾰로통한 표정까지 짓는다.
그 모습에 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은 작별의 시간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천 형,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부탁 좀 합시다.”
“무슨 일인데요?”
“십합단 녀석들에 관한 일이에요.”
* * *
척!
처처처처처처처처척!
대명장 내원의 멋들어진 전각 앞마당.
그곳에 십합단 녀석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천무휘의 일이 결정된 다음 날 아침이며, 화산으로 가기 위해 대명장을 떠나기 바로 전이다.
“신 언묵과 그 형제 오십사인! 주군을 모시기 위해 모든 채비를 마쳤습니다.”
대명장에서 준비해 준 무복에 검집까지 새로 갈아 제법 그럴듯한 무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내가 언묵을 향해 물었다.
“무림맹은?”
“넵! 이미 열흘 전 화산장로 이석계 대협께 탈맹서(脫盟書)를 제출했습니다. 이제 저희는 오롯이 주군의 명만을 따르고 주군을 위해서만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충!”
“충!”
언묵에 이어 언갈을 포함한 오십삼 인이 일제히 우렁찬 목소리로 충성을 외쳤다.
하지만 아니다.
“이거?”
난 품속에서 언묵이 화산장로에게 제출했다는 탈맹서를 꺼내 들어 그들에게 흔들어 보였다.
어젯밤, 천무휘는 폐관 수련을 위해 화산파로 가겠다는 말과 인사를 하기 위해 화산장로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때 내가 부탁한 일들을 잘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녀석들의 탈맹서를 회수해 오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화산장로에게 건넨 탈맹서가 내 손에 들려 있자, 언묵과 녀석들 모두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네? 주, 주군…… 하지만 저희는 이미 주군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맹세를…….”
“그만.”
“주, 주군…….”
“스읍! 그만하라고.”
“존명!”
“묻겠다.”
“하문하십시오, 주군!”
“너희는 진심으로 나를 주군으로 받들겠는가?”
“충!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충!”
언묵의 맹세와 함께 십합단 전원이 큰 목소리로 제창했다.
“내 명령에 무조건 따를 수 있겠느냐?”
“충!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 명하셔도,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뛰어들겠습니다.”
“충!”
“진짜?”
“충!”
“충!”
이 녀석들.
다 안다.
얼마나 내게 충성할지.
그냥 이 녀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좋다. 그럼 나도 정식으로 너희를 수하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나 마악치의 수하다.”
“추우우우우우웅!”
“추우우우우우웅!”
감격에 겨워 지붕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충성을 외치는 녀석들이었다.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충!”
“내 첫 번째 명령은…….”
녀석들,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죽여가며 내 입에 집중하고 있다.
“내 명령은…….”
녀석들의 비장함이 너무 과하다.
저러다 눈알 빠지겠다.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은, 무림맹주에게 충성하라는 것이다.”
내가 내린 첫 번째 명령.
그 말에 비장함마저 감돌던 언묵과 십합단 녀석들의 얼굴이 순간 어리둥절하게 변해 버렸다.
눈동자마저 향할 곳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주, 주군, 하지만 저희는 이미 주군께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는데, 어찌 또 다른 주군을 섬기라 하십니까? 우매한 신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첫 번째 명령부터 거부할 셈인가?”
“아닙니다, 주군! 그저…… 그저…… 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됐다. 모를 때 묻는 건 좋은 자세다. 설명해 주지.”
“…….”
“지금까지 너희들이 했던 협행. 그것의 열 배, 스무 배, 서른 배를 행하라.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오롯이 무림맹과 백성들을 위해 검을 휘둘러라. 너희의 협행이 먼 곳에 있는 내 귀에까지 들릴 수 있게,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악적들을 물리쳐라.”
다시 녀석들에게서 비장함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너희는 화산장로원 직속의 무력단으로 재배정될 것이다. 화산파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뛰어난 검법까지 익힐 기회를 줄 것이다. 수련에 수련! 근육이 끊어지고 똥이 입으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검을 휘둘러라! 강해져라! 무당파와 아미파에서도 너희를 암중에서 지원할 것이다. 그러니 더 강해져라! 약한 자를 돕고, 억울한 자의 원한을 풀어 줘라! 그래서 너희 모두! 당당한 무림의 대협객이 되어라!”
녀석들.
이젠 비장함을 넘어 벅찬 감정에 눈물까지 쏟을 기세다.
화산은 천무휘가 화산장로에게 직접 부탁했고, 또 무당과 아미에는 내가 따로 서신을 보냈다.
분명 광천마제 시절 내가 버리듯 던져 주었던 검법보다 더 괜찮은 검법이 저들 손에 들어갈 테다.
화산이나 무당, 아미의 검법은 아니다.
적게는 수백 년에서, 많게는 일천 년 가까이 무림에서 군림하던 세 문파다.
자파의 무공 말고도, 그들의 장서각에 보관되고 있는 타파의 무공은 모르긴 몰라도 수천 권 이상일 터다.
그리고 이들은, 그 무공 중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검법을 얻게 될 것이다.
그 검법을 얻은 후 강해지고 말고는 오로지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렸다.
물론, 난 이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또 얼마나 강해질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첫 번째 임무의 궁극적 목표는! 맹주전의 맹주 직속 무력대가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