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천 대협,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긴히 가 봐야 할 일이 생겨서. 잠시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신창양가로 향하는 길.
네 번째다.
차렵방 방주의 딸이라는 이이민이 가장 먼저 우리 무리에서 이탈했다.
곧바로 산검문의 금지옥엽이라는 여여경과 태연세가의 소가주 태연황한에 이어, 마지막으로 목문의 소문주 목정종이라는 녀석이 천무휘에게 굽실굽실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어디론가로 떠났다.
특히 이이민과 여여경이란 여인들은 발걸음을 재촉해 떠나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며 천무휘와 잠깐의 헤어짐조차 크게 아쉬워했다.
그나저나, 이것들이 나는 무슨 투명 인간인가?
참자.
우리가 식사를 했던 녹평각에서 신창양가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모두 태원의 중심에 위치한다.
녹평각을 떠나 신창양가로 가는 길, 양아치와 함께 있던 이남이녀까지 떠났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은 더 늘었다.
녹평각에서부터 천무휘의 정체를 알아보고 따라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양아치를 잡으러 왔던 신창양가 섬쾌예창대(閃快銳槍隊)의 대주 연강이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녹평각에 자리했던 손님들에게 천무휘에 관해 함구를 부탁했다.
하지만 이미 새어 나간 말을 어디 그리 쉽게 막을 수 있겠는가?
다른 이도 아니고, 환장하도록 잘생긴 이십 대 초반의 초절정 고수 수룡검 천무휘가 이곳에 나타났다는데 말이다.
녹평각을 막 떠날 때, 우리를 따르던 무리는 열셋이 전부였지만, 신창양가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새 육십이 훌쩍 넘는 인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창양가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따르는 무인은 기백을 넘어 거의 일천 명에 다다르고 있었다.
겪을 때마다 천무휘 녀석의 명성이…… 개부럽다.
천무휘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구경하려는 사람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덕분에 신창양가의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까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우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천 대협! 이곳이 저희 집입니다. 누추하지만 들어가시지요, 하하하!”
누추하다니?
대궐이 따로 없다 할 정도로 신창양가는 으리으리했다.
그 정문의 높이만 해도 다섯 장을 넘으니, 이건 뭐.
연강 대주가 앞서고 우리가 그 뒤를 따르자,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자세가 되었다.
그렇게 신창양가의 정문을 막 통과했는데.
찰싹!
털썩.
정문을 막 넘어서자마자 우연히 만난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양아치를 보자마자 내공까지 실어 뺨을 후려갈겼다.
연강 대주조차 주저하며 그 공격을 막지 못했다.
털썩 쓰러진 양아치가 크게 당황하면서도 또 두려워하는 얼굴.
그가 수치스러움이 가득 묻은 얼굴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일어섰다.
“작은……형님.”
신창양가의 둘째 공자 양아돈.
대명장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신창양가의 삼형제 중 무공에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살기까지 마구 흘리며 자신의 동생 양아치를 향해 말했다.
“또 한 번만 더 가문을 망신시킨다면, 그때는 내 손으로 직접 널 죽일 테다.”
양아돈은 그 말만을 하고 몸을 휙 돌려 가 버렸다.
우리라는 손님이 있고 없고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명장의 정보에 따르면 제법 대단한 경지의 창법 고수라 하였는데 틀렸다.
하수다.
손님이 안중에 없는 게 아니라, 나나 천무휘의 경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자이다.
“죄송합니다, 천 대협. 못 보일 꼴을 보여 드리고 말았습니다.”
양아치가 씁쓸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아니 근데 이 새끼들은 진짜 날 무슨 투명 인간으로 아는 거 아니야?
외원을 지나 내원으로 향했다.
길을 지나며 만나는 무인과 일꾼, 시비들 모두 양아치를 크게 두려워하며 과한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또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는 양아치, 양아돈과 비슷하지만, 그 분위기가 꽤 다른 인물이었다.
무인보다는 학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양아치는 양아돈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큰, 큰형님.”
신창양가의 첫째 양아갑이다.
그는 양아치를 잠시 보는가 싶더니, 이내 뒤에 있는 천무휘와 나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곧, 다시 양아치를 향하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심한 새끼.”
아나!
이 녀석은 그래도 뭔가 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역시나 용을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다.
이거, 생각해 보면 무림 영웅전은 죄다 거짓말 같다.
보통 이런 경우 둘째는 무공에 천재고, 첫째는 문무를 겸비하여 심계까지 능통하고.
뭐, 이런 설정이지 않은가?
무림 영웅전이 거짓인지, 아니면 이 집안 꼴이 한심한 건지.
아무튼 첫째고 둘째고 죄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양아치 이 녀석.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번엔 짙은 미소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조금 전 큰형 앞에서 보여 줬던 그 비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어쩌면, 그나마 이 집안에서 제일 난놈이 이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가시죠. 이곳이 바로 내원이고 저희 신창양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신창전(神槍殿)이 있는 곳입니다.”
양아치가 다시 앞장을 섰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녀석, 확실히 승부수를 던지려는 모양이다.
제 나름의 반전을 꾀하는 것이겠지.
천무휘를 이용해서.
* * *
신창전.
쾅!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신창전의 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문을 부술 듯 열며 튀어나왔다.
신창양가의 가주 진창왕(振槍王) 양북달이다.
별호 뒤에 왕(王) 자는 함부로 붙일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창왕(槍王)이다.
창을 쓰는 무림의 고수가 거의 없기에 그리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네 이노오오오오오오오오옴?”
당장에라도 사자후를 터뜨려 오공에서 피를 흘리게 할 것 같은 기세의 창왕 양북달.
그러나 그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또 그의 시선이 양아치에서 뒤에 있는 나와 천무휘에게로 옮겨졌다.
그나마 우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것이다.
“어험! 네 이 녀석! 그렇게 자중하라 일렀거늘,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외유를 했느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긴히 중요한 분들을 만나야 해서 그랬습니다.”
“그, 그래. 함께 오신 분들은 뉘시냐?”
확실히 나와 천무휘를 알아본 게 맞다.
말은 양아치에게 하며, 우리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는 양북달이었다.
그리고 곧.
양아치가 더없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우리를 소개하……?
내원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헐레벌떡 신창전 앞,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둘 다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신창양가의 첫째와 둘째, 양아갑과 양아돈이다.
아마 뒤늦게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저리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이내 양아치가 그런 두 형을 한 번 쓰윽 돌아보고는, 다시 아버지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천하에 그 명성을 진동하고 있는 수룡검 천무휘 대협이! 무림삼대신투 중 일인인 오영투를 잡는다고 하여! 우리 신창양가가 수룡검 천무휘 대협과 그 뜻을 함께해 무림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모시고 왔습니다, 아버지!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양아치는 말끝에 자신의 가슴까지 쾅쾅 쳐 가며 지붕이 들썩일 정도의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가주 양북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반대로 양아갑과 양아돈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다시 양북달은 우리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또 양팔을 활짝 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천 대협! 천하의 수룡검께서 우리 신창양가와 뜻을 함께해 대마두를 잡으려 한다니, 나 창왕 양북달이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을 약속드리오. 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아무래도 양아치는 양북달을 닮은 듯하다.
그리고 그때.
“양 가주님!”
“양 가주님!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창왕 형님! 우리 태연세가를 빠뜨리시면 안 되죠!”
아까 우리와 헤어졌던 목정종, 이이민, 여경경, 태연황한이 급히 향했던 곳.
바로 자신들의 집이었다.
수룡검 천무휘가 왔고, 그가 오영투를 잡기 위해 신창양가에 머문다는 소식을 급히 전하려고 그리했던 것이다.
네 사람 모두 자신의 아버지들을 불러 급하게 달려온 모습이었다.
“어서들 오시오, 여러분. 이분이 바로 수룡검 천무휘 대협이시오, 하하하하!”
“천 대협! 반갑습니다.”
“천 대협! 차렵방의 방주 이돌락이라 하오, 하하하!”
네 사람은 누구에게 빼앗기기라도 할까, 서둘러 천무휘를 포위하듯 둘러싸 인사 건네기 바빴다.
둘이 더 있다.
조금 전까지 나와 천무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양아치의 두 형들 말이다.
“천 대협. 조금 전에는 제가 실수를…… 하하.”
“천 대협, 제가 소가주 양아갑입니다. 반갑습니다, 헤헤헤.”
두 녀석까지 천무휘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새끼들!
아나! 진짜 뭐야?
난 투명 인간이냐고!
왜 아무도 나한테는 인사를 안 하는데?
* * *
신창전 안의 대청.
“진즉 말씀하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그러게요. 현화검존의 태사손이셨군요.”
“이거 영광입니다, 마 도사님, 하하.”
응, 하나도 영광인 얼굴 아니야.
이 인간들 말이다. 나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만큼도 쳐다보지 않다가, 천무휘가 자신의 둘도 없는 친우며 형제라고 소개를 하자 저렇게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다.
가주 양달북, 셋째 양아치, 그리고 신창양가와 더불어 산서 태원의 가장 힘 있는 문파와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세력의 수장 넷이 모였다.
신창양가의 첫째와 둘째는 이 자리에 끼지도 못했다.
양달북은 아까까지만 해도 죽일 듯하던 양아치를 더없이 인자하며 자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고.
양아치도 한없이 당당한 승리자의 얼굴로 자리하고 있다.
그나저나 우리 천무휘, 잘해 주는가 싶더니 또 멍한 상태에 돌입하고 말았다.
-천 형. 천 형! 정신 차리세요.
-엇? 아! 죄송해요, 마 형.
-아니에요. 이제 슬슬 우리가 온 목적과 협조를 구해 주세요.
-네.
“도움이 필요합니다.”
멍하게 있던 천무휘가 입을 열자, 연신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가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이들의 입이 쏙하고 닫혔다.
모두가 침 넘기는 소리까지 죽여 가며 천무휘의 입에 집중하는 것이다.
어찌 아니겠는가?
천무휘와 함께 마두를 한 명이라도 잡았다는 소문이 번지면, 그 즉시 그 문파와 가문의 위상이 달라질 텐데 말이다.
어쩌면 이번 일은 저들에게 있어서 향후 십 년 혹은 그 이상 자신의 가문과 문파의 향방을 결정 짓는 일이 될지도 모를 중차대한 문제일 것이다.
아니, 그렇게 착각하고들 있을 것이다.
“그 피해가 막심합니다. 오영투를 꼭 잡아야 합니다. 산서의 영웅이신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신다면, 이곳에 산재하는 악인들도 함께 일망타진하고 싶습니다.”
거룩하다고 해야 할까?
분위기가 그랬다.
천무휘의 말에, 이들 모두 생사 대전을 앞둔 장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끓어오른 피가, 그 벅차오르는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실로 거룩함마저 느낄 수 있는 감동이 그들의 얼굴에서 흐르고 있었다.
천무휘라는 이름의 힘이, 실로 어마어마한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 태연세가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넘기고, 무인 전원을 동원하여 천 대협의 뒤를 바치겠습니다.”
“차렵방은! 우리 차렵방은 최소한의 인원 따위도 없습니다. 문을 지키는 수문 무사는 물론, 제 딸의 호위무사까지 총출동해 천 대협의 마두 사냥을 지원하겠습니다.”
“목문도 함께하겠습니다. 호위무사는 당연한 것이고, 우리는 아들과 저까지 모두 수룡검 천 대협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어마어마하다.
갈수록 태산이란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산검문은 아예 화룡점정을 찍었다.
“저희 산검문은 무인 전원, 호위무사에 제 딸과 저까지 출정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십 년 전에 큰 병으로 지금까지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까지 함께 참전하겠습니다!”
미친!
십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노인네를 왜 데려오겠다는 거야?
아무튼 이날 이들 태원 사대문파 수장들의 천무휘에 대한 충성 경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도를 넘어섰다.
결국 나중에는 서로 멱살까지 잡아가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됐다, 이 정도면.
신창양가에서도 전력을 다해 우리를 돕기로 했고, 이 일은 태원을 넘어 산서 곳곳으로 소문이 번질 것이다.
* * *
어느 세가나 문파도 손님들을 위한 전각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신창양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창양가처럼 그 규모가 대단한 세가나 문파는, 보통의 손님을 대접하는 전각과 귀빈을 모시는 전각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만에 하나, 무림맹의 맹주나 천하제일인같이 엄청난 인사가 찾아올 경우, 일반 손님들이 묵는 방을 내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무림에서 고수와의 인연은 그 자체로 기연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창양가도 혹시 모를 귀빈을 위한 어마어마한 전각을 하나 마련하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곳에서 묵을 수 있었다.
시비가 준비해 준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하고, 황제 부럽지 않을 진수성찬도 받고.
좋았다.
내가 자신들에게 겨눌 칼을 숨기고 있음을 모르고, 이토록 극진히 대접해 준다.
살짝 양심의 가책도 좀 느꼈다.
그리고 그날 밤.
술에 거하게 취해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한 양아치가 주제도 모르고 우리를 찾아왔다.
놈은 술주정을 했다.
나와 천무휘를 잡고, 아니 천무휘를 향해 지난날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버지에게 무시당하고, 큰형과 작은형에게도 무시당하고, 세가와 태원 사람들 모두가 자기를 망나니라 부른다고 하였다.
무재도 없고, 머리도 나쁘고, 성질만 못된 놈이라 욕했다며 끝없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이제.
그 억울했던 지난날들을 모두 되돌릴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이번 마두 잡는 일에 천무휘와 함께 큰 공을 세워, 역전의 명수가 되어 세간의 평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겠다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 녀석.
살인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이 저지른 지난날의 끔찍한 죄업은 조금도 생각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화창한 미래만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신창양가의 막내공자’, ‘창술명가 막내아들’, ‘신창양가 개망나니’뭐 이런 무림 영웅전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실컷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기뻐해라.
그래야 네가 저지른 죄의 값을 받을 때, 그 고통이 더더욱 깊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