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혹시…… 흉수가 썼다는 무기에 대해……?”
“네, 맞습니다. 창(槍)입니다. 혈겁을 조사한 신창양가와 무림맹 산서 지부의 공표와 전혀 다른 사실이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방백 장주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무림인은 아니지만, 무림에 창을 쓰는 무인이 많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창양가다.
“흉수의 인상착의 같은 것은요?”
“다섯 명 모두 공통되게 창에 관하여 말하였지만, 그 외 다른 것에 대해서는 횡설수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어린아이는 머리에 뿔이 달렸다는 말까지…… 아마도 극도의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기억을 왜곡하게 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혹, 지금 만나 보겠습니까?”
“지금요? 가능할까요?”
“네. 이곳에 온 지 며칠 되어, 그나마 많이 마음을 추스른 상태입니다. 조심스럽게만 대해 주신다면, 젊은 부부나 아이들이나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 천무휘는 방백 장주의 안내를 받아, 목격자들이 숨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 * *
대명장 내원에서도 가장 은밀한 심처.
작은 정원까지 딸린 전각을 목격자 다섯 명이 쓰고 있었다.
원래 방백 장주의 외동딸이 시집가기 전까지 사용하던 전각이라 하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꺄르르 웃으며 뛰놀던 아이들과 젊은 부부의 동작이 일시에 멈추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 테다.
툭.
내가 천무휘를 툭 쳤다.
뭐,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럴 땐 잘생긴 천무휘가 나서는 게 더 효과가 좋지 않겠나.
“안녕하세요. 안녕, 얘들아.”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천무휘와 방백 장주를 번갈아 보며, 그저 두려워할 뿐이다.
방백 장주가 나섰다.
인자한 미소로 나와 천무휘를 소개해 주었다.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님이시고, 이분은…… 음, 아마 들어 보았을 테다. 수룡검 천무휘 대협이시…….”
“꺄아아악!”
“꺄아아악!”
어린 삼남매 중, 첫째와 둘째.
여아들이다.
두 손으로 얼굴까지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방백 장주와 천무휘는, 아이들이 놀란 것이 아닌가 하여 크게 당황하였다.
그런데, 하아!
내 눈엔 보였다.
저게 놀라긴 놀란 건데, 그런 의미의 놀람이 아니다.
숱하게 봐 왔지 않겠는가?
천무휘를 본 여자들의 반응.
똑같다.
신패에 먹물도 마르지 않은 꼬꼬마들이, 벌써 잘생긴 남자를 밝히다니!
나도…… 나한테도 관심 좀 달라고!
그냥 또 한 번 천무휘 녀석이 부러웠을 뿐이다.
그나저나 어쩌면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수월하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형, 시간은 많습니다. 사고에 관해서는 천천히 묻고, 오늘은 그냥 친해지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는 게 확실히 좋을 것 같습니다.
“얘들아, 나 알아? 하하. 이거 좀 쑥스러운데?”
여전히 수줍어하는 아이들을 향해, 천무휘 녀석 아주 능청스럽게 다가갔다.
세 아이도, 또 젊은 부부도 그런 천무휘를 신기함과 반가운 얼굴로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맞아주었다.
이제 시작이다.
* * *
녹평각(綠平閣).
산서 태원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
녹평각은 그 거리에서도 가장 화려한 삼 층 높이의 식당이다.
나와 천무휘는 녹평각에서 가장 비싼 음식만 파는 삼 층에서 식사를 마쳤다.
식사하는 내내, 삼 층의 다른 손님들이 천무휘 녀석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어찌 아니겠는가?
그냥 대충 하고 다녀도 잘생긴 놈이, 오늘은 작정하고 멋있게 꾸미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도 오랜만에 새 옷도 입고 좀 멋있게 꾸미고 왔는데.
뭐, 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로, 어험!
“휴우, 걱정입니다, 마 형. 다 잡았던 놈을 놓치고 말았으니, 이제 어쩌죠?”
식사를 다 마친 천무휘가 이미 세운 작전대로 나에게 대사를 말했다.
천무휘 이 녀석, 진짜 많이 늘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능청스럽게 바뀔 수 있는지 모르겠다.
뭐, 녀석도 열심히 하는데 나도 최선을 다해서.
“정말 큰일이에요, 천 형. 이곳 산서는 처음 오는 곳이라 지리도 낯설고,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으로선 막막하기만 하네요.”
“산서 하면 유령신검의 황룡회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곳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건 어떨까요? 한번 놓친 오영투(五影偸)를 다시 찾으려면, 아무래도 우리 힘만으로는 버거울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만, 황룡회는 정사지간의 문파라 알려졌잖아요. 쉬이 도움을 줄지도 걱정입니다만, 무엇보다 그 위치가 산서 북쪽 끝자락이라 오영투의 행적을 찾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이곳 태원 어딘가에 숨어 있을 법한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아! 난감합니다. 난감해요, 마 형.”
“저도요, 천 형.”
보인다.
내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게 아니지만, 환히 보였다.
저 멀리, 녹평각 삼 층에서도 가장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창가 측 자리.
삼남이녀의 귀가 아주 우리에게 쏠리다 못해 넘어올 것 같이 열려 있음이 훤히 보이고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걸렸다.
우리 미끼를 문 것이다.
한 녀석,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 자리에 있던 두 여인의 재촉을 못 이긴 면도 없지 않아 있고.
“실례합니다.”
“아, 네.”
우리 또래의 젊은 자다.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있다.
“일부러 들으려던 것은 아니지만, 두 소협께서 나누시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오영투를 추격하고 있으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 이곳 근방에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순간 사내의 눈에 놀라움이 크게 일었다.
사내뿐만이 아니다.
우리 측을 주시하고 있던 남은 이남이녀는 물로, 다른 식탁의 손님들마저 크게 놀란 얼굴을 하고 말았다.
놀리던 젓가락질까지 멈추며 놀란 모습들이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오영투라 하면, 현존하는 무림삼대신투(武林三大神偸) 중 한 명을 말한다.
크게 인명을 해한 일은 없지만, 굳이 마두에 비교해 분류한다면 대마두 중에서도 상급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런 엄청난 놈을 젊은 우리 둘이 쫓고 있다고 하니 놀라고 만 것이다.
물론 오영투는 여기에 없다.
본 적도 없고, 인명도 해치지 않은 잡기 힘든 놈을 쫓을 생각도 없다.
오영투는 그저 미끼일 뿐이다.
“정, 정말…… 제가 알고 있는 그 삼대신투의 오영투를 쫓는 게 맞습니까? 신법을 펼치면 그림자가 다섯 개로 보인다는 오영투요.”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개방과 하오문에서 건넨 오영투에 관한 정보에 따르면, 소문처럼 그림자가 다섯 개로 보이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분신술(分身術)의 일종이다.
도둑질하다 걸렸을 때, 당연히 도망간다.
그러다 만만치 않은 신법의 고수가 뒤쫓을 때, 비장의 수를 쓴다.
자신의 몸을 다섯 개의 형상으로 분리하여, 각기 다섯 방향으로 도주한다고 한다.
무림맹, 구파일방, 오대세가에서 쫓고 쫓았음에도 이십 년 가까이 놈의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이유며, 놈이 무림삼대신투에 이름을 올리게 한 절기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천무휘 녀석이 왜 그러한 걸 묻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로 연기를 하자, 사내는 뭐라 대답도 못 하고 계속 놀란 상태로만 있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다른 사내가 다가왔다.
녹평각 삼 층으로 올라왔을 때부터, 놈이 삼남이녀 중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자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놈의 손에 단창(短槍)이 들려 있다.
“실례합니다.”
“아, 네. 그런데…… 누구신지?”
천무휘가 짐짓, 자기소개도 없이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에 대해 은근히 지적하였다.
하지만 녀석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신창양가의 양아치라고 합니다.”
아나!
놈의 이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니, 뭐 이름도 이름이지만, 그걸 알면서 저렇게 소개하는 건 뭔데?
나 어디 어디의 양아치요!
나는 혀까지 깨물어가며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천무휘는 확실히 많이 변했다.
놈도 분명 웃겨 죽을 것 같은 게 뻔한데,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태도로 포권하며 말했다.
“아! 신창양가의 셋째 공자님이시군요.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천무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친우인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입니다.”
쨍그랑.
쿠당탕.
“허걱!”
“헙!”
삼 층 여기저기서 짧은 소란이 일고 말았다.
차를 마시던 처자는 찻잔을 바닥에 떨구어 깨뜨렸고.
몸을 잔뜩 기울여 우리의 대화를 엿듣던 중년의 여인은 결국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또 곳곳에서 얕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천무휘의 명성이 실로 대단하긴 엄청나게 대단하다.
그리고 그 명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드높아지고 있다.
천무휘의 소개에 놀란 것은 양아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시골 변방에서 삼공자 놀이나 하던 녀석이, 칠룡사봉 중 수좌며 중원 전역에 명성을 진동시키는 진짜 대협 중의 대협을 만났는데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신창양가의 세가주인 양아치의 아비보다 천무휘가 더 고수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미 무림에서의 명성과 그 위치는 아예 비교 자체가 안 되고 말이다.
꽤 여유로운 척 미소까지 짓고 있던 양아치가, 좀전의 사내와 다를 바 없이 몸이 굳어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타타타타타타탓.
이곳 삼 층으로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단창을 든 스무여 명의 무인들이 마치 우리를 포위라도 하듯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나와 천무휘가 아닌 양아치를 향한 것이다.
“삼 공자! 또 가주님의 명을 어기고 외유를 하면 어쩌자는 말이오! 지금 가주님께서 매우 화가 나셨습니다. 당장 저희와 함께 세가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따르지 않을 시…… 무례를 범하게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오십 대의, 제법 흰 수염까지 난 노고수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정말 무력이라도 쓸 것처럼 분위기를 잡으며 양아치에게 엄포를 놓았다.
조금 전까지 천무휘의 이름을 듣고 놀란 얼굴을 했던 양아치.
노고수의 엄포에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번뜩이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그 미소를 간직한 채 시선을 우리, 아니 천무휘에게 돌려 말했다.
“천 대협, 일부러 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네. 현재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막막한 상태라…….”
“혹, 지내실 곳은 마련하셨습니까?”
“아니요. 아직요. 이제 막 도착한 참이라 구하지 못했습니다. 주변 객잔을 알아볼 생각입니다.”
“천 대협께서 태원에 오셨는데, 어찌 객잔 같은 곳에 머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함께 가시죠. 태원에 계시는 동안, 저희 신창양가에서 천 대협께서 지내는 데 조금의 불편함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또 우리 신창양가가! 무림의 정의와 안녕을 위해 천 대협의 일을 도울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악적을 쫓는 일이 어찌 천 대협 혼자만의 일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정파의 사람들이고, 의와 협을 위해 평생을 싸워 온 당당한 무인들입니다. 혹시 저와 저희 신창양가가 못 미더워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제가 어찌 천하의 신창양가를 그리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럼 됐네요. 저와 함께 가시죠. 천 대협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저의 아버지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전력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천무휘가 고개를 두 번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당분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네! 하하하! 하하하하!”
양아치는 정말 기분 좋게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노고수.
조금 전까지 당장에라도 무력을 써서 양아치를 잡아갈 태세였다.
그러나 일단 양아치와 천무휘가 대화를 시작하자, 멀뚱멀뚱 서서 빠르게 눈알만 굴리는 게 아니겠는가.
그는 곧, 천무휘가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한 모양이다.
그가 세 걸음 양아치에게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천무휘를 향해 짧게 목인사를 하고는 양아치에게 은밀히 물었다.
“삼 공자, 이 천 대협이시라는 분은…….”
“연 대주님! 이분이 바로 천하의 명성이 자자한 수룡……. 아닙니다. 일단 집으로 가시죠. 집에 가서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장서세요,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삼 공자님.”
확실히 노회한 고수가 다르긴 다르다.
조금 전까지 양아치를 향해 그냥 삼 공자라 칭하다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는 뒤에 ‘님’ 자를 붙인다.
그래도 자기네 집 공자라고, 우리 앞에서 그 위상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 그리한 것이다.
뭐, 상관없다.
우린 이미 양아치의 진면목을 구 할 이상 확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양아치 이놈 말이다.
대가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듣던 대로 신창양가에서도 개망나니로 통하는 것 같은데, 천무휘의 명성을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는 심산인 것이다.
뭐, 놈이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먹고 싶은 음식 한 가지는 해 준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고.
가자!
산서 땅에 우리의 명성, 아니 천무휘의 명성 좀 실컷 드날려 보자!
그래야 진흉(眞兇, 진짜 흉수)를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