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나와 천무휘, 의제, 한해북 그리고 언묵과 언갈.
우리 여섯 명은 새벽까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계책을 수립해갔다.
처호가 서신으로 전한 계책은 큰 틀을 제시할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또 흉수를 잡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다시 십합단을 거두어야 할지 말지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세한 계획은 우리가 수립해야 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내가 한다.
그렇게 벌써 몇 시진째, 뭐 사실 나와 한해북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중이다.
천무휘는 다시 멍한 얼굴이 됐고.
의제는 꾸벅꾸벅 졸고.
언묵과 언갈은 미안함 때문인지 고마움 때문인지, 내내 어색한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아침이 다가오려고 할 때였다.
뚝.
뚝.
내 귀에 이상함이 감지됐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살며시 옆을 돌아봤다.
언묵과 얼갈.
이 두 녀석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 죽여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나와 한해북은 열띤 토론을 잠시 멈추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의제도 놀란 눈을 떴고.
툭.
천무휘를 내가 툭 치니 녀석은.
“앗! 죄송합니다. 제가 또 정신을 다른 데 팔…… 어? 언묵 단주님, 언갈 무사님, 왜……?”
녀석도 두 형제가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때.
언묵, 언갈 형제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향했다.
그러더니 이내.
툭! 툭!
형제가 동시에 우리를 향해, 아니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신 언묵.”
“신 언갈.”
“주군께 목숨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쿵!
큰 외침과 함께 이마를 바닥에 찧는다.
“일어나.”
격한 감정 때문인지 어깨를 떨기만 할 뿐.
둘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라도 들어.”
그제야 형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사이,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목숨 구걸하러 온 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충성 맹세야?”
“그게…… 그게…… 죄송합니다, 주군! 공 선생께서…… 저희를 무림맹과 신창양가로 보낸 것을 후회하며 사과한다고 서신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군을…… 주군을 새 주군으로 섬길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내 의심하며, 주군께서 저희 형제와 본 단을 도와주실 것일지 의심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주군께서 이렇게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주실 것이라고는…… 흑흑흑.”
“됐어. 일어나. 너희를 도우려고 하는 일 아니야. 어차피 어떤 마두를 잡으러 갈까 고민하던 중이었어. 그러니 오해하지 마. 너희를 수하로 거둘 마음은 없으니까.”
있다.
어찌 없겠는가?
녀석들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수하가 될지 뻔히 아는데 말이다.
그냥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번 해 봤다.
원래 무엇을 흥정할 때도, 한 번쯤 튕기어 보면 더 좋은 값을 받기도 하지 않은가.
“주군!”
쿵!
다시 형제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됐어. 그만해. 어차피 너희 지금 살기 위해 우리 밑으로 들어오려는 거잖아.”
“맞습니다, 주군!”
“목숨을 구걸한다고 할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뻔뻔하군.”
“계기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함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단 주군께 충성 맹세를 한 이상,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맹세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묵의 저 말.
천무휘나 의제, 한해북은 어떻게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돋고 말았다.
진심인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미 튕기었으나 한 번 더 튕겨야 했다.
“됐어. 그 맹세. 어차피 무림맹에서도 했을 거 아니야? 한 번 맹세를 어긴 사람이 두 번이라고 못하겠어?”
“아닙니다, 주군! 저는 절대 무림맹의 그 누구에게도 충성 맹세를 한 적이 없습니다.”
언묵이 시뻘겋게 물들어 버린 눈을 부릅뜨며 나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말이 돼?”
그런데 그때, 한해북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언묵, 언갈 형제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말이 됩니다, 마 형.”
“그건 무슨 말이오, 한 형?”
“무림맹은 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수백 수천 개의 문파와 세가에서 사람들을 모아 만든 조직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 막강해진 권력이 한 사람이나 한 세력에 쏠리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지요. 무림맹에서 마교의 침입만큼이나 중요시 다루는 문제입니다.”
맞는 말이고,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한해북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무림맹에서는 각 문파나 세가에서 보내온 무인 외, 무림맹에 직접 입맹한 이들에게는 충성 맹세를 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오랜 관례며 절대 주요한 맹규이기도 합니다. 언묵 단주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음, 그런가. 뭐, 그렇다면…… 어험.”
난 헛기침을 하며 슬쩍 언갈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번엔 의제가 나섰다.
“아니, 형님. 저 친구는 제일 불쌍한 놈 아니오? 열심히 충성했는데, 그 대가로 마두로 몰렸으니 오죽 억울하겠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쇼.”
“어험, 뭐 그것도 그렇긴 하지.”
우리의 목소리가 너무 컸나?
늦은 저녁까지 고기며 밥이며 술이며 먹고 일찍 곯아떨어진 십합단 오십여 명이 어느새 모두 깨어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내.
다다다다닥.
처처처처처척!
이 녀석들이 일제히 언묵과 언갈 뒤로 가 무릎을 꿇더니.
“주군! 목숨을 바쳐 충성을 맹세합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주변의 대기가 통으로 흔들릴 정도의 커다란 목소리로 저렇게 외쳤다.
“일단!”
내가 입을 열자, 주위는 곧바로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일단 생각해 볼게. 자던 놈들은 다시 자고. 언묵, 언갈 형제도 들어가 자. 계책은 이미 다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존명. 주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흑흑흑.”
그렇게 모두 초가 주변의 마당 곳곳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방이 두 개뿐이라, 방으로 들어가 잘 엄두를 내는 자는 애초부터 없었다.
언묵 형제와 십합단 단원들이 모두 마른 흙바닥에 누웠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게 고스란히 기감으로 전해졌다.
곳곳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와 우리 녀석들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천 형.”
“네, 마 형. 이번엔 다 들었습니다.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어요.”
“괜찮겠어요? 화산파의 힘이나 그 명성을 들먹이길 좋아하지 않는 거 다 알아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계책을 강구해 봅시다.”
“아니에요, 마 형. 제가 화산의 힘을 이용하는 게 싫고, 그 힘에 기대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좋은 일이고, 악인을 처벌하는 바른 일이잖아요. 저는 당연히 찬성이고, 화산파에서도 크게 기뻐하며 이 일을 도울 것입니다. 확신합니다, 마 형.”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요. 그런데 천 형.”
“네, 마 형.”
“어험, 그러니까……. 기왕 돕기로 한 거, 제대로 좀 도와주죠. 저 녀석들 많이 불쌍해 보이는데요.”
“물론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겠습니다.”
“그럼, 화산파도 화산파인데…… 하하. 천 형 얼굴이랑 이름도 좀 같이 팝시다.”
“네? 그게 무슨……?”
내 말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천무휘.
고개를 갸우뚱한다.
너 잘생겼으니, 그 잘생긴 얼굴 좀 쓰자고!
* * *
“주군!”
달호다.
나와 천무휘 그리고 언묵 형제와 십합단이 산서에 도착하자마자, 전령 달호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와 나에게 부복했다.
“오! 달호구나.”
“넵, 주군.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응, 그래. 무슨 일이야?”
“주군께서 지내실 곳을 마련해 놨습니다. 십합단 전원이 은밀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알고 있었어? 내가 이 녀석들 도울 것을?”
“전 잘 모릅니다. 처호 선생이 주군께서 그리 가실 수 있으니,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준비하라며 저에게 이것저것 많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렇군. 가자.”
“넵! 모시겠습니다. 그전에…….”
나와 천무휘 그리고 십합단은 모두 변용을 해야 했다.
열두 대의 수레를 끌고 움직이는 상인의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의제와 한해북도 잘하고 있겠지?
두 녀석에게는 특별 임무를 주어 다른 곳으로 보냈다.
지금 한참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을 것이다.
* * *
대명장(大明莊).
으리으리한 대장원이었다.
우리는 매우 이른 아침, 밤새 물건을 싣고 이동하여 도착한 상인의 모습으로 그 대장원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언묵 형제와 십합단은 대명장 일꾼들의 눈에 띄는 것까지 최대한 조심하며 곧바로 대명장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나와 의제는 대명장의 장주 방백이란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마 도사님, 천 대협. 방백이라 합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았다.
나이가 환갑을 넘은 노인이었으나, 우리를 매우 극진히 대해 주었다.
처호의 지인이 아닌 공손병의 지인이라 했다.
공손병은 아직 내 수하가 아니다.
당연히 방백 역시 내 수하가 되려거나 그러한 제안을 받은 적도 없는 눈치였다.
공손병의 부탁을 받고 돕는 중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나와 천무휘에게 매우 공손하며 줄곧 존대를 하였다.
천무휘의 명성 때문에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 짧은 대화를 잠깐 나누며 궁금한 게 생겼다.
신뢰에 관한 문제였다.
“방 장주님, 이곳 산서에 무림오대고수 중 일인인 유령신검의 황룡회가 있다지만, 신창양가 역시 제법 대단한 세력이라 알고 있습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신창양가와 무림맹에서 마두라 명명한 이들을 숨겨주고 그들의 일을 돕는 것이요.”
“우선 한 가지 부분에 관해 정확히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지요?”
“이곳 산서에 말씀하신 유령신검의 황룡회가 있지만, 산서는 신창양가의 영역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황룡회는 산서의 북쪽 끝 대동에 위치해 있는데, 산서 무림의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음, 그렇군요.”
“반대로 신창양가는 산서의 중심, 태원에 위치해 있습니다. 태원 이남의 땅은 모두 신창양가에서 관리하고, 그 북쪽 지역도 황룡회의 눈치를 살피며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신창양가의 힘이 대단하군요.”
“네. 산서가 중원의 가장 북쪽이라 변방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감숙의 공동파, 청해의 곤륜파, 그리고 운남의 점창파의 정보가 많이 알려지지 않듯, 이곳 산서 무림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이곳 현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건가요?”
“마 도사님께서 방금 저에게 한 질문. 그것에 대한 답입니다. 신창양가가 두렵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친구를 잘못 둔 덕에, 무서워 덜덜 떨면서도 이 일을 맡아 버렸지 뭡니까? 허허허.”
이 노인네, 제법 농담도 할 줄 안다.
덕분에 나와 천무휘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신뢰해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뭐, 더 알아봐야겠지만 말이다.
이내 방백 장주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곧 신중한 음성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공손병 그 친구의 서신을 받고, 곧바로 은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생존자를 찾았습니다. 두 번째 마을에서는 젊은 부부가, 또 최근의 세 번째 마을 학살 때는 어린 남매 셋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겠네요?”
“그게…… 도통 입을 열지 않습니다. 저희 장원에서 철통같이 지켜 주고 있음에도, 이들은 절대 입을 열지 않습니다.”
“신창양가 때문이군요?”
“맞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렸듯, 이곳 산서에서 신창양가의 힘은 절대적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신창양가를 절대적 힘이라 믿고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니라고 하고, 거기에 더해 무림맹에서까지 이를 인정하니, 두려운 것이겠죠.”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습니까? 아무 말도 못 들은 건가요?”
“아주 어렵게,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두 마을에 혈겁을 일으킨 흉수가 사용했던 무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