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번쩍!
내가 건넨 광마일기를 왼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또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번쩍.
뭐야? 요술이야?
책을 저렇게 읽어?
아니다.
인상을 구긴다.
큭큭큭.
뭔가 잘 안 된 모양이다.
인상을 잔뜩 구긴다.
그러더니 똑같은 행동을 다시 한번 한다.
번쩍!
이번 빛은 조금 더 강하게 번쩍였다.
하지만, 인상 역시 더 깊이 구겨졌다.
“음…… 역시 이 책이 문제였던 거군.”
혼잣말을 한다.
쪽팔린가 보다.
마구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차마 죽을 거 같아서 그러진 못했다.
곧 백미호가 광마일기를 펼쳤다.
후두두두두두두두두둑.
뭐야?
책장을 저렇게 빨리 넘기면 글씨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뭐 하는 짓이지?
그런데…… 허걱!
읽었나 보다.
눈 몇 번 깜짝할 사이, 내가 광천동에서 하루 넘게 다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을 모두 읽어 버렸다.
분명하다.
그녀가 미세하지만 떨고 있다.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다.
잠시 고개까지 숙여 북받친 감정을 억누르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바뀌었다.
그녀의 눈빛이.
나를 경멸하고 무시하던 그녀의 눈빛에, 부드럽게 또 연민이 가득 차 있다.
“악치야.”
어?
왜 이래?
더 무섭잖아!
그냥 ‘야!’라고 불러.
“너…….”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야?
금세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나를 쳐다보며, 목소리마저 떨고 있다.
하긴, 내 처절한 몸부림과 지독하리만큼 슬픈 고뇌가 그 일기에 모두 담겨 있으니.
감동할 만도 하겠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입술마저 떨고 있는 그녀다.
“너…….”
“네, 백 소저.”
“너…… 나 진짜로 좋아했어?”
개X! 쪽팔려!
아나! 그게 적혀 있는 걸 깜빡했네.
“매일 나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너도 모르는 사이 내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어?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내가 좋았어?”
“그…… 그게…… 그게요…….”
아 씨! 눈물만 난다.
도망치고 싶다.
쪽팔려.
“내 입술에 뽀뽀를 그렇게 하고 싶었어?”
“죄, 죄송합니다, 어험!”
짐짓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헛기침까지 해 봤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옆통수가 화끈거린다.
진짜로 도망갈까?
너무 창피해서 미칠 것 같다.
“나, 이백 살 넘어. 정확히 이백열 살이야.”
“아, 네. 네. 넵.”
“그래도…… 한 번 해 줘?”
“네? 뭘요?”
“뽀뽀.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랐잖아. 여기 그렇게 적혀 있던데? 그녀와 단 한 번만이라도 입맞춤을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그녀는 아름답다고.”
“저…… 그건 그냥…… 그냥 그때는 제가…… 어험. 어험.”
“아니야.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한 번 해 줄게.”
그녀가…… 그녀가!
얼굴을 천천히 나에게 가져다 댄다.
아름답다!
이백 살이고 삼백 살이고, 그녀는…… 미치도록 아름답다.
난, 나는 말이다.
“전…… 그런 의도가 아니만, 백 소저께서 굳이 원하신다면…….”
나도 모르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심장이, 정말로 송두리째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
한참이 지나고, 다시 정말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 입술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아!
더 쪽팔려.
그녀가, 고개를 한참이나 뒤로 뺀 상태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런 요망한 것!
또 당했다.
여우에게 또 홀려 버리고 만 것이…… 허걱!
그녀가 갑자기 나를 안아 줬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이건 진심이야.”
그녀의 그 말에, 난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 * *
그녀와의 포옹이 있은 후에도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녘에 떠오르던 태양이 어느새 중천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요괴들의 왕인 아버지와 자신의 오라버니에 대해서도 말해 줬다.
아버지는 꼬리가 일백 개.
오빠는 일흔한 개라 한다.
호요, 그러니까 여우 요괴의 꼬리는 무림의 내공 일 갑자와 비교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오라버니는 칠십일 갑자.
요왕인 아빠는 일백 갑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원래 자신의 이름이 백미호(白美狐)인데.
궁극의 경지인 일백 갑자, 그러니까 꼬리 일백 개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호요들은 자신의 성을 흰 백(白)이 아닌 일백 백(百)이라 쓸 때도 있다는, 별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다 해 주었다.
그리고.
“혹시, 제 추혼책이나 각혼필에 걸린 힘도 제거해 줄 수 있어요?”
“아니. 그건 못해. 아버지라면 모를까, 내 힘으로 어쩔 수 있는 힘이 아니야.”
“아!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억겁의 굴레는요? 이것도 제 몸에 걸려 있긴 한 거 같은데요.”
“맞아. 확실히 걸려 있어. 하지만 그것도 내 힘으로 안 돼. 시간의 요술은 계요들만이 부릴 수 있는 요술이야. 그것을 파훼하는 것도 계요들만 가능하지.”
“그럼 어떻게 해요?”
“말했잖아. 닭. 죽이면 돼. 계효보가 죽는 순간, 네 몸에 걸린 억겁의 굴레는 자연스레 사라질 거야.”
“아! 그렇군요. 그런데 백 소저.”
“응.”
“혹시, 그냥 요계에서 다른 계요를 불러서 억겁의 굴레를 파훼시켜 주면 안 돼요? 광마일기 봐서 아시겠지만, 제가 죽을 때마다 계효보 녀석이 내공을 일 갑자씩 꿀꺽해서 강해지고 있거든요. 제 무공 경지가 올라가면, 그것까지 다 흡수해 버리고요. 이 문제 때문에 오신 거잖아요. 그러니, 요계에서 다른 계요를 불러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도 어려워.”
뭐야!
뭐가 다 안 된대?
“말했듯, 시공간을 넘는 요술은 홍요, 그러니까 기러기 요괴들의 고유 요술이야. 계효보가 이곳으로 넘어오게 된 것은 정말 번개를 연달아 수십 번 맞을 극히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었지.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여 시공간을 넘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해.”
“백 소저와 사대무요도 이미 왔잖아요.”
“우리 다섯 명이 오기 위해서, 요계에서 가장 강력한 요술을 가진 홍요 수십 명이 죽기 직전까지 힘을 썼어. 그것도 확신할 수 없어서 목숨을 걸고 넘어온 거야. 돌아갈 수 있을지, 믿기는 하지만 장담하기 힘들어. 시공간을 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아…… 그렇군요.”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미 억겁의 굴레와 추혼책, 각혼필, 또 여러 알 수 없는 힘들…… 그러니까 광천마제였던 네 힘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계요들이 설사 온다고 해도, 그렇게 얽히고설켜 버린 억겁의 굴레를 파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결국…… 계효보를 잡아야 끝난다는 소리네요.”
“맞아. 그리고 잘 알아 둬. 만약 네가 네 업보를 모두 씻는다고 하여도, 무한회귀는 끝나지 않을 수 있어.”
“억겁의 굴레 때문에요?”
“응.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계효보를 반드시 없애야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끈질긴 악연이다.
나와 계효보.
“그런데 악치야.”
“네, 백 소저.”
“왜 이 일을 네 사부와 의논하지 않은 거야?”
“사, 사부님요?”
“그래. 혹시 네 사부님께서 이곳의 황제? 아니면 무림의 왕? 뭐, 그런 존재 아니야?”
뭔 개뼈다귀로 관우의 청룡언월도를 부숴 버리겠다는 소리야?
“그냥 시골에서 수양 쌓는 도산데요?”
“말도 안 돼.”
“우리 사부가 그렇게 대단해요?”
백미호는 대꾸 대신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사부님도 조금 눈치를 챈 거 같은데, 일단 자세한 내용은 비밀로 해 줘요. 부탁이에요.”
“……?”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의 백미호다.
“광마일기에 적혀 있잖아요. 사부는 지금 행복해요. 사부가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계효보를 발견하면, 어제 그랬던 것처럼 도움을 요청할 거예요. 그때만 나서 주면 돼요. 그때까지만이라도…… 사부가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백미호가 조금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우리가 온 이상, 그럴 일도 없을 거야. 네 사부에게는 비밀로 할게.”
“고맙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와 계속 함께 다니실 거예요? 전 찬성입니다.”
“풋! 태세 전환 봐라. 그렇게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헤헤, 제가 다른 생각에 그랬던 거 이젠 아시잖아요. 광마일기 다 봤으면서요, 하하.”
“그래. 알아. 그런데 이젠 같이할 수 없어.”
“왜요?”
“네 곁에 계효보가 없는 걸 확신했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온 것을 놈도 이미 알고 숨었을지 몰라.”
“하아! 일이 복잡하게 꼬여 가네요.”
“아니. 복잡하지 않아. 응요와 낭요라면, 멀지 않아 놈을 잡을 거야. 동영의 귀신들과 고려 신령들의 기운이 너무 강해 계효보라 착각해, 거기에서 시간을 낭비해 그렇지. 일단 중원에 계효보가 있다는 걸 안 이상,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아.”
“아, 네.”
“혹시 모르니, 이거 받아.”
그녀가 나에게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예쁜 초록색 돌, 아니다.
보석이다.
그것을 건넸다.
“만리연통석(萬里連通石)이란 거야.”
“뭐 하는 건데요?”
“자 봐 봐.”
어느새 그녀의 손에 내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모양의 만리연통석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에 약간의 기운을 주입하자.
“아, 아. 들리지?”
“허걱! 이게…… 이게 뭐예요?”
“네가 어디에 있건, 내가 어디에 있건, 이렇게 기운만 주입하면 너와 나를 연결시켜 줄 거야. 나 아흔아홉 살 생일 때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주신 거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어. 요계로 돌아갈 때 다시 가지고 갈 거니까.”
“아…… 물론, 그렇긴 한데. 백 소저.”
“왜?”
“저 죽었다가 다시 회귀하면, 이거 제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도 잃어버릴 텐데요.”
“음, 그것도 문제네.”
그녀가 고심에 빠졌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있다.
“백 소저, 그런데 제가 혹시라도 죽었다가 다시 회귀하면, 방금 했던 설명 다시 해 드려야 해요? 아! 광마일기 읽으시면 다 아시겠네요. 다시 만나면, 제가 잘 설명해서 광마일기 보여 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인간들에겐 치명적이지만, 우리 요괴들에겐 억겁의 굴레 따위는 그렇게 대단한 요술이 아니야. 인간이 오랜 시간을 통해 일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스스로 만들었듯, 우리도 우리 요괴들끼리의 요술에 비슷한 면역력을 갖게 되었어. 억겁의 굴레는 절대로 내 기억을 지우지 못해.”
“추혼책과 각혼필의 힘에 의한 회귀는요?”
“그것들은 억겁의 굴레와 함께 시간을 되돌릴 거야. 난 억겁의 굴레에서 흐르는 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만 따라가면 돼.”
“함께 회귀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것도 아니야. 난, 만약 네가 죽으면 이곳의 시간이 역행하는 순간에도 나 자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거야.”
“좀 어렵네요.”
“깊게 생각하지 마. 이건 우리 요계의 요괴들도 쉬이 이해하기 힘든 지식이니까.”
“아, 넵. 뭐, 그냥 이 모습 그대로, 또 생각까지 모두 간직한 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이시죠?”
“맞아. 어차피 네가 죽기 전에 계효보가 먼저 죽을 거고, 그러면 나는 요계로 떠나겠지만…… 에휴.”
그녀가 갑자기 나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이 처음의 그 눈빛으로 돌아왔다.
살벌 말고, 한심하게 나를 보는 그 눈빛 말이다.
“너…… 광마일기 보니까, 진짜 너무 어이없게 죽는 경우가 많더라.”
“그, 그게…… 광마일기에는 간단히 적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피치 못할 뭐 그런 사정으로 죽었던 겁니다.”
“응. 지난 일 말해서 뭐 하겠니. 문제는…….”
“문제요? 무슨 문제요?”
“우리가 금방 계효보를 잡아서 처형하겠지만, 네가 너무 뜬금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니, 너라면 진짜 당장 오늘 밤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그것도 무슨 힘이 걸려서 그런 건가?”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내 기분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이다.
대놓고 나더러 멍청하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네가 또 언제 죽을지 모르니, 만리연통석에 대한 대비도 하긴 해야겠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음…… 근데 어떻게…… 악치야.”
“네.”
“그래도 네가 참을성은 좀 있잖아?”
“참을성요? 갑자기 참을성은 왜요?”
불안하다.
뭔 짓을 하려고 참을성을 말하는 걸까?
“네 몸에 박아 두려고.”
말을 마침과 동시, 내 의견 따위는 애초에 구할 생각이 없었나 보다.
내 손에 들린 만리연통석을 뺏더니, 이내 그것을 내 심장에.
퍽!
박아 넣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난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
“야! 그렇게까지 아픈 거 아닌 거 다 알아. 엄살 그만 떨어.”
“아, 넵. 조금 따끔하네요.”
“다시 해 볼게.”
“뭘, 뭘요?”
또 뭔가를 내 심장에 쑤셔 넣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자신의 손에 들린 만리연통석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내.
“아, 아. 내 말 들려?”
-아, 아. 내 말 들려?
“오! 신기해요. 귀로도 들리고, 머리로도 들려요.”
“성공이네. 됐다. 이러면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다.”
-성공이네. 됐다. 이러면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다.
“저는 어떻게 연락해요?”
“심장으로 기운을 불어넣어 봐.”
-심장으로 기운을 불어넣어 봐.
“아, 아. 제 말도 들려요?”
“응. 잘 들려.”
그녀가 만리연통석을 내려놓은 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한 것이다.
예쁘긴 예쁘다.
그녀가 여우 요괴인 걸 뻔히 알면서도, 심장을 내달라면 주저 없이 내줄 만큼 예쁘고 아름답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떠났다.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