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악치야, 근데 너 왜 아까부터 호요(狐妖, 여우 요괴)를 닭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순간!
사부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난!
머리가 하얘졌다.
민망했고, 창피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혼란스러웠다.
“사, 사부님. 여우라뇨? 여우 요괴라뇨? 닭이에요. 닭 요괴. 계요(鷄妖)라고요.”
사부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계효보를 향한 경계마저 완전히 풀어버리는 사부다.
시선마저 거두어 이제는 날 대놓고 쳐다본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난, 울고 싶었다.
“여우 요괴니라, 백 소저는…….”
“사부!”
“님.”
“사부님!”
“…….”
“대요괴라고 하셨잖아요.”
“그랬다.”
“십사 갑자가 넘는 내공! 그것이 저놈이 닭 요괴임을 입증합니다!”
사부가 노망이라도 났나?
그러면 안 되는데?
아니면 이 또한 닭의 요술인가?
닭의 요술이 우리 사부의 정신마저 잠식할 정도로 강해졌단 말인가?
진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부의 눈이, 사부의 눈동자가.
더없이 맑고 깊다.
사부는 지금, 지극히 높은 도사의 눈을 가지고 있다.
“오십육 갑자니라.”
“그, 그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악치야.”
나를 부르는 사부의 음성이 너무나 인자했다.
닭이 눈앞에 있는데.
계효보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후회하게 될 텐데.
사부가 계효보를 두고 계효보가 아니라 한다.
미칠 것 같았다.
내 광기가!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들린 이 음성이.
나의 그 광기를 잠재워 주었다.
대신, 눈물이 났다.
사부는.
우리 사부는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틀린 말도 하지 않는다.
사부가 그리 말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는 뜻이다.
백미호는, 계효보가 아니다.
사실, 사부가 처음 말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괜찮다.”
사부가 나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다 괜찮으니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미안하다. 사부가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미안해.”
“사부님, 엉엉엉. 엉엉엉엉.”
난 사부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마구 울고 또 울었다.
한참이 지나 내 울음이 잠잠해지자, 사부가 살포시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사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백미호를 향했다.
아까의 그 떨림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백미호.
그저 살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부가 그런 백미호를 향해 말했다.
“백 소저, 현신(現身)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주 살짝, 정말 찰나의 순간 고민하는가 싶던 백미호.
그러나.
번쩍!
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뭔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백미호를 중심으로 하얀 안개 같은 것들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모습이었다.
대신, 그녀의 뒤로…… 쉰여섯 개의 하얀 꼬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요계에서 왔습니다. 마 도사가 말한 계효보라는 계요를 쫓는 중입니다.”
* * *
내가 이런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고려에서 여객선을 타고 백미호를 처음 만났을 때.
처음 보는 백미호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우리 세 녀석을 두고 이리 표현했었다.
‘의제며, 한해북은 물론 천무휘까지 그냥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백미호를 향해 쉬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가고 있다.’
또 해적들을 물리치고, 복건에 도착하기 바로 하루 전 배 위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했었다.
‘열여드레 사이, 우리 세 녀석 말이다. 백미호에게 완전히 홀려 버리고 말았다.’
이런 비슷한 말들은 몇 번이고 있었다.
이 표현 중 핵심은 ‘홀리다’이다.
왜 옛날부터 그런 말 있지 않은가?
‘여우에게 홀리다’라는 말.
하!
그런데 진짜 여우였을 줄이야.
어젯밤, 백미호는 자신의 정체와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여러 의문이 있었지만, 백미호가 자세한 사연은 나에게만 말하겠다고 하였다.
몇몇이 처음 보는 요괴의 모습과 그 존재에 의심을 품고 약간의 적의까지 드러냈지만, 사부가 말렸다.
사부는 ‘백 소저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으니, 일단 제자와 이야기할 수 있게 기회를 줍시다.’라고 말했다.
그 누구도 사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진이 지나 아침이 찾아왔고.
지금 나는 갑돌산 정상 부근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아침 햇살을 맞으며 백미호와 나란히 앉아 있다.
좀, 아주 조금 어색하고 창피하고 쑥스럽고 미안하고 그랬다.
아니, 내가 그랬고, 백미호의 분위기는 살벌 그 자체였다.
내가 알던 백미호는 온데간데없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백미호는 과거의 백미호가 아닌, 대요괴급, 그러니까 오십육 갑자의 요공을 가진 대요괴다.
기침 한 방에 날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저…….”
오랜 시간 이어지는 정적이 너무 어색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랬더니.
“야!”
“네?”
나도 모르게 존대를 했다.
아! 어제까지 오빠라고 불렀는데.
감히 그 이야기는 꺼낼 생각도 못 했다.
“야!”
“네.”
“왜?”
“네?”
“오빠라고 불러 줘?”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내가 아직도 닭으로 보이냐?”
“아닙니다. 아름다운 여우…… 그러니까 호요로 보입니다. 지난밤에는 죄송했습니다. 저도…… 사연이 좀 있어서.”
“억겁의 굴레?”
“아! 아세요? 그것까지도요?”
“억겁의 굴레 아니야. 지금 네 몸에 걸린 힘.”
“그것도…… 아세요?”
“야!”
“네. 넵!”
아나!
자꾸 얘가 부르면 나는 놀라서 대답을 하는 걸까?
돌겠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살포시 쥐고 무릎 위에 올려 앉은 차렷 자세까지 한다.
쪽팔려.
“계효보 어디 있는지 알아?”
“모릅니다. 그래서…… 어젯밤에도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서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부님들과 고수분들을 모신 것입니다.”
“휴우, 인간계에 그토록 강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나도 좀 놀랐다. 뭐, 동영이나 고려에서 이미 놀라긴 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맞아.”
왠지 우리 사부를 칭찬하는 것 같아서, 주눅이 든 상태에서도 어깨가 살짝 으쓱해졌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 계효보는 내가 잡을 테니까.”
“가, 가능하십니까? 계효보가 요계에서 넘어올 때의 계효보가 아닙니다. 이곳, 인간계의 무공이란 것을 익히고, 이미 그 내공이 어제 말했듯 십사 갑자가 넘습니다. 그것을 요공으로 전환해 요술로 부릴 수도 있고요.”
“야!”
“넵!”
아이씨!
쪽팔려.
또 앉은 차렷 자세 해버렸다.
“너, 내가 왜 너한테 접근한 줄 알아?”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뭔데?”
“계효보가 제 주변에 있지 않을까 해서, 만약 제 주변에 놈이 있다면 잡으려고 그러셨던 것 아닙니까? 제 몸에서 억겁의 굴레라는 요술의 힘을 감지하시고요.”
“맞아. 그런데 너.”
“네.”
“왜 그때는 의심 안 했어?”
“네? 뭘요?”
“내가 너 좋아하는 척하며 접근했잖아.”
“넵.”
“그건 왜 의심 안 했냐고?”
“그야…… 그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야!”
“넵!”
“너 동경 안 봐? 아이참, 난 그것 때문에 걸린 건 줄 알았는데. 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하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동경부터 봐.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사이한 요괴를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래?”
백미호.
얘가…… 얘가 지금 나 욕하는 거 맞지?
“야!”
“넵!”
“너 지금 나 한 대 칠 기세다?”
“아닙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렇지 않으면 계효보에게 먹혀 버리고 말 테니까.”
“그런데 호요님?”
“그냥 백 소저라고 불러. 다른 데서 실수하지 말고.”
“넵, 백 소저.”
“왜?”
“계효보가 강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은 몰라도, 어젯밤에 봤던 고수 중 한 명 이상은 충분히 상대하여 이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둘이나 셋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를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야!”
“넵!”
“너 고려에서 이곳으로 오던 배 위에서 나랑 함께 있던 네 사람 봤지?”
“넵.”
“우리 요계에서도 최고의 요괴라는 사대요가(四大妖家)에서 차출해 온 무요(武妖)들이야. 따로 전요(戰妖, 전투 요괴)라고 부르기도 해. 모두 오십 갑자가 넘는 요공을 인간계의 무공과 비슷한 무력으로 부릴 수 있어.”
그들이 무공을 조금도 감지 못 했던 이유가 다 있었던 거야.
바로 이것이었어.
하하하!
돌겠네.
오십 갑자란다.
내가 지금 웃겨서 웃는 게 아니다.
“아! 그분들이…… 그렇군요. 그럼 혹시 그분들을 집으로 먼저 가라고 했던 게……?”
“맞아. 계효보 잡으라고 보냈어. 너는 내가 맡기로 해서 남은 거고. 넷 중 둘이 추적에 매우 뛰어난 요괴들이야.”
“이건 제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혹 그분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백미호가 저 먼 하늘에 떠오르는 해를 보다가,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염치도 없는 놈이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휴우, 계효보를 잡는 목표가 같으니, 한심해도 한편이니까 설명해 준다.”
“감사합니다.”
“나와 함께 온 네 명의 요괴는 말했듯, 우리 요계에서도 가장 강한 요괴라 불리는 무요들. 각기 낭요(狼妖, 늑대), 응요(鷹妖, 매), 호요(虎妖, 호랑이), 웅요(熊妖, 곰). 이름은 흑랑, 천응, 적호, 대웅이라고 불러. 낭요는 천 리 밖에서도 물의 종류를 구분할 정도의 후각을 갖고 있고, 응요는 일천 장 하늘 위에서도 땅 위의 모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시력을 가지고 있어.”
“두 분이 추적을 담당하는 거군요.”
“아니. 보는 즉시 바로 사살할 거야. 우리가 인간계에 오자마자 계효보가 금기의 요술인 억겁의 굴레를 시전한 것을 확인했으니까. 낭요와 응요는 계효보를 발견 즉시 죽일 거야.”
“말씀드렸듯, 계효보의 경지가 이미 대단한 수준에 올랐습니다.”
“쯧쯧, 나도 말했잖아. 요계에서 최고의 무요들이라고. 둘 다 오십 갑자가 넘는 요공으로 무력을 부릴 수 있어. 계효보는 둘 중 한 명의 열 합도 받아 내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아, 네. 그럼 호요랑 웅요 분들은요? 그분들도 어떤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나요?”
“아니. 둘은 그냥 무요들이야. 호요는 칠십 갑자, 웅요는 팔십 갑자가 넘는 요공으로 무력을 부릴 수 있어.”
“아…… 칠십, 팔십…… 실감이 안 되는 무지막지한 능력이네요. 근데 다섯 분 중 누가 대장이에요?”
백미호가 또 빤히 날 쳐다본다.
한심한 놈이라는 눈빛이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오십육 갑자의 요괴 앞에서.
“나. 내가 그들을 직접 차출해서 데리고 왔어.”
“백 소저께서…… 요계에서도 대단한 신분이신가 봅니다.”
“이건 너만 알고 있어. 알았어?”
“넵. 넵!”
“난…… 요왕의 딸이야. 우리 아버지께서 요계의 왕이시라고.”
놀라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간 내가 백미호에게 가끔씩 느꼈던 고아한 품격이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걸까?
“야!”
“넵!”
“매일 아침 뭐 한다?”
“넵! 매일 아침 동경을 보며,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관철하겠습니다.”
“그래, 꼭 그리하도록. 계효보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그런데 이쯤 되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백 소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이제 서로 협력해야 하니까.”
“계효보 말입니다. 그놈 말에 따르면, 놈의 신분이 요계에서도 최하층의 천민이라고 하던데, 어찌 요왕의 딸이신 백 소저께서 친히 그놈을 잡으러 인간계까지 오신 건가요?”
“그 닭대가리…….”
오! 백미호도 나랑 같은 표현을 쓴다.
“그 닭대가리가 겁대가리를 상실해서, 시공간의 벽을 부수려는 시도를 했어. 우리는 어떻게 된 일인지 빠르게 조사를 했고, 일천 수백 년 전 어린 요괴들의 장난, 그중 홍요(鴻妖), 그러니까 기러기 요괴의 요술로 닭 요괴 한 마리가 시공간을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일천 수백 년 전이라고?
닭이 인간계에 온 게 벌써 그렇게 됐나?
“기러기 요괴는 이미 극형에 처해졌고, 다른 요괴들도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지. 그런데 닭대가리가, 이 미친 닭이 또 한 번 시공간의 벽을 허물려는 시도를 한 것이야.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힘이 짧은 시간 엄청나게 강해진 것이지. 네가 말한 것처럼 말이야.”
“요계에서도 놀랄 만큼의 힘인 게 맞아요?”
“아직은 아니야. 그런데 그 시간이 문제였지. 이대로 방치하다간, 계효보가 실제 시공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게 됐어. 사태가 심각해진 것이지.”
“시공간의 벽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녀가 나를 보며 웃었다.
비웃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치 않다.
궁금증이 더 중요했다.
“마계와 천계, 외계, 요계, 인간계, 용계, 율계, 선계, 옥계, 수계 등등등. 수억 수천만 개의 시공간의 존재들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겠지. 그리고, 시공간의 전쟁이 벌어질 거야. 우주의 멸망이 시작되는 날이 되는 것이야.”
아니다.
이건 백미호가 틀렸다.
계효보는 그런 꿈을 꿀 정도의 그릇이 못 된다.
간사한 건 맞지만, 새가슴이다.
닭도 새 아니겠는가.
날지 못하는 새.
시공간의 전쟁이라, 어쩌면 닭의 의도와 다르게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말해.”
“제가 지금까지 겪었던 계효보에 관한 일에 대해서요?”
“그래.”
“말로 듣기보다는…… 이걸 보시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난 그녀에게 광마일기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