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절강 항주를 떠나기 닷새 전.
“우르르 까꿍!”
시큰둥하다.
인상까지 찌푸릴 필요는 없잖아.
초향이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불과 이 년 만에 어쩌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니?
그래서 예전에 했다 하면 배꼽을 잡고 뒤집어지던 ‘우르르 까궁!’을 시전했다.
그랬더니, 이젠 팔짱까지 끼며 인상을 구기는 초향이다.
왜?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아니지.
우리 향이한테는 뭐든 내가 잘못한 게 맞다.
어떻게 해서든 웃게 해 주고 싶은데.
“이제 그런 거 안 좋아해.”
“응? 그래?”
“나도 이제 다 컸어. 애가 아니라고.”
“아! 그렇구나, 하하.”
아직 애 맞는데.
어쩌겠는가?
기분 맞춰 줘야지.
내가 지은 죄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고 깊은데 말이다.
“그 언니랑은 무슨 관계야?”
“응? 누구? 백미호?”
대꾸 대신 도끼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와!
이거 뭐야?
지금 초향이 질투하는 거야?
귀엽다.
예쁘고.
“하하! 아니야. 정말 아니야. 나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냥 친구야. 사실 데리고 다니는 것도 좀 귀찮고 싫은데, 다른 녀석들이 백미호를 좋아하는 눈치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니는 거야.”
“정말?”
오!
반응이 있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응. 정말이야. 난 그런 취향의 여자 별로 안 좋아해.”
“그럼 어떤 여자 좋아하는데?”
“음…… 우리 초향같이 예쁘고 깜찍하고 밝은 아가씨?”
찢어진다.
우리 초향의 입꼬리가 드디어 귀에 걸렸다.
“헤헤헤.”
심지어 내 팔짱까지 끼며 좋아하는 게 아니겠는가?
하하하!
성공이다.
“오빠, 우리 놀자.”
“소꿉놀이할까? 내가 남편하고 아들 역할하고, 향이는 엄마 역할.”
“아이! 나 이제 그런 거 안 한다니까.”
“그럼 뭐 하고 싶은데?”
“숨바꼭질.”
그거나 그거나.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반대로 짐짓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재밌겠다. 어서 하자.”
뻔하다.
뻔한 곳에 뻔하게 숨어서 뻔히 날 쳐다보며 숨을 테다.
“대신 내공 사용하기 없기야. 기감 펼쳐서 찾으면 안 된다고.”
“당연하지.”
응, 내공 안 써도 다 알아.
어디 숨을지.
아니, 그건 숨는 것도 아니지.
“약속.”
“응, 약속.”
우린 손가락까지 걸며 그렇게 약속을 했다.
당연히 술래는 나다.
“백까지 세.”
“응. 얼른 숨어.”
“하나, 둘, 셋…….”
백까지 셌다.
뻔한 곳으로 갔다.
역시나…… 엥?
없네.
당황하지 않는다.
여기 없으면 저기…… 엇?
여기도 없어?
마지막 한 곳…… 아!
여기에도 없네?
약속을 했으니 기감을 펼쳐 찾을 수도 없고.
뭐, 그래 봐야 열 살 어린아이다.
난 그렇게 초향을 찾아…… 허거거걱!
난 그날 무려 두 시진이나 초향을 찾아 헤매야 했다.
우리 아이가 변했어요.
* * *
“주사위 놀이하자.”
“주사위?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돈내기 말고. 이마 맞기.”
“숫자 적은 사람 이마 때리기야?”
“응. 대신 나는 낭군님 이마 때리고, 내가 지면 낭군님은 내 이마에 ‘호’ 하고 바람 불기.”
“왜 너는 나를 때리고, 나는 바람만 불어?”
“그럼, 낭군님도 나 때릴 거야? 나 아직 열 살 어린아이야.”
자기가 불리할 때만 어린아이다.
무섭다.
우리 아이가 변했는데, 무섭게 변했다.
잠시 후.
빡! 빡빡!
“갸르르르르르.”
빡! 빡빡!
이건 어린아이 손맛이 아니다.
손바닥에 쇠망치를 붙여 놓은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아프다.
“꺄르르르. 낭군님, 많이 아파? 향이가 호오 불어 줄게. 호오오오.”
이제는 병 주고 약 주고.
우리 아이가, 진짜 무섭게 변해 버렸어요.
* * *
항주에서 닷새.
밤마다 운기조식을 하지 않았다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마와 손목은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고, 온종일 뛰어다녀 다리의 근육이 찢어질 듯하다.
향이는 지치지 않았다.
여덟 살 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그런다.
아니, 체력이 더 늘었다.
무공이 아니다.
그냥 체력이 늘었고, 그 활동량도 늘었다.
내공도 없이 열 살 아이와 놀아주는 이 땅 위의 모든 아빠, 엄마, 삼촌, 이모들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우리 향이가 변한 줄 알았는데, 뭐 사실 변한 건 맞지만.
그래도 아직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다.
그게 고맙고 기뻤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주 아주 중요한 사실.
나를 더없이 기쁘게 한 일이 있다.
우리 초향 말이다.
하하하!
천무휘 녀석이 좀 친해지려고 몇 번이나 수작을 걸었는데, 푸하하하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연신‘낭군님, 낭군님’이라 부르며, 나만 따라다닌다.
또 어딜 갈 때면 항시 내 손을 꼭 잡고 다닌다.
난 일부러 천무휘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며, 그렇게 우쭐해질 수 있었다.
우리 향이가 아직 어린아이지만, 그래도 천무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는 처음 아니겠는가?
사실 감격에 겨워, 밤에 남몰래 눈물도 한번 찔끔 흘렸다.
역시 우리 향이가 최고다.
* * *
항주를 떠나는 마지막 날.
“네가 얼마나 깊은 수양을 쌓았으면, 그냥 요괴도 아닌 대요괴를 친구로 삼을 수 있었겠느냐? 허허. 사실 대요괴마저 친구로 삼을 수 있는 너를 보며 크게 반성까지 하게 됐단다. 훌륭하다, 정말 훌륭한 참 도사가 되어 주었구나, 허허허.”
사부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난 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요괴라니? 요괴를 친구로 삼다니?
아니, 그냥 요괴도 아니고 대요괴?
그렇다.
십사 갑자가 넘는 내공, 요공을 가지고 있으니 그냥 대요괴라 불릴만 하다.
계효보라면 말이다.
충격과 떨림.
난 그렇게 반쯤 정신이 나가 사부에게 물었다.
“사, 사부.”
“왜 그러느냐, 악치야?”
“방금 한 말이요. 방금…… 방금…… 정말이에요? 제 친구 중에…… 진짜로 요괴가 있어요?”
순간, 사부도 뜨끔한 얼굴을 했다.
“몰랐느냐?”
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숨이 턱 하고 막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허. 난…… 어허허. 네가 알고 사귄 줄 알았더니. 어허허. 이를 어쩐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러려면 진짜 내 머리의 능력치를 백분 발휘해야 한다.
깨어나라, 마악치!
정신 바싹 차려라, 마악치!
닭, 이번엔 반드시 잡는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 친구 중에 요괴가 있다는 사실을요?”
“요기를 품고 있으니 알지.”
“요기요? 무인이 단전에 품고 있는 내공 같은 거요?”
“그렇다. 대단한 요기를 품고 있더구나. 그렇게 대단한 요기는…… 음…… 확실히 어마어마한 대요괴가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많이 놀랐다. 그래도 너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는데, 어허허.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어허.”
“그 요기가 보여요? 아니면 기운처럼 감지되는 거예요?”
“보이고 감지된다. 악치야, 넌 그 기운이 감지되지 않느냐?”
“그, 그게…… 네. 전혀 몰랐어요.”
아!
내 수양이 많이 부족하다.
사부가 많이 실망했겠다.
“괜찮다. 괜찮아. 꾸준히 수양을 쌓다 보면, 언젠가는 너도 그것이 눈으로 보일 테고 또 몸으로 느껴질 테다.”
사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사부에게 또 걱정을 끼친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
난 서둘러 호신갑처럼 내 심장을 보호하듯 가슴에 넣어 둔 요괴경을 꺼냈다.
“사부,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사부에게 요괴경을 건넸다.
사부는 요괴경을 한참이나 구석구석 살핀 후 나에게 말했다.
“요괴경이구나.”
허걱!
이거 진짜 요괴경 맞았어?
심장이 떨린다.
그러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부!”
“악치야, 놀란 심정은 알겠으나, 자꾸 ‘님’ 자를 빼먹는구나.”
“앗! 죄송해요, 사부님.”
“그래.”
“이거요. 요괴경. 이걸로 제 친구들 다 봤는데, 멀쩡하게 보였어요. 다 사람 모습으로 보였어요. 이거 진짜 요괴경 맞아요?”
“맞다. 요괴경.”
“그런데 왜 요괴 모습으로 안 보여요?”
“음…… 네가 무공을 익힌다니 무공에 빗대어 설명하마.”
“네.”
“시전에 파는 싸구려 박도로 커다란 바위를 자를 수 없는 이치와 같느니라.”
“그게 무슨……?”
“사실 이 요괴경은 상당히 괜찮은 요괴경으로 보인다. 웬만한 요괴라면 분명 이 요괴경으로 봤을 때 그 요괴의 본 모습이 보일 테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이 요괴경의 한계다. 대요괴. 즉, 요괴들의 왕이 될 정도의 능력을 가진 대요괴라면, 이 요괴경의 힘 따위는 가볍게 제어할 수 있느니라.”
내가, 속았다.
빌어먹을 닭대가리 새끼.
감히, 또 나를 속이다니!
그렇게 나를 속이고 내 주변에 붙어 있었다니.
간도 크다.
하지만 그건 네 최고의 악수가 됐다.
너, 이제 죽는다.
이번엔 진짜다, 닭대가리야.
“사부.”
“님.”
“사부님.”
“그래, 악치야.”
“도와주세요. 부탁이에요.”
사부가 나를 가만히, 또 조용히, 그리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문제가…… 있었구나. 그것도 너를 매우 힘들어할 만큼 큰 문제가…….”
사부가 저 말을 하는데, 괜스레 눈물이 흘러나왔다.
입을 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사부가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또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어렸을 적,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부가 이렇게 내 머리를 많이 쓰다듬어 준 것 같다.
그랬다.
사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내 마음을, 그간 스물한 번이나 죽어 가며 처절하게 싸워야 했던 내 삶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그런데 사부님. 그 요괴요. 내 친구 중 누가 그 대요괴에요?”
* * *
항주를 떠났다.
초향은 눈물을 그렁그렁했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아니, 내게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떠나는 마지막 순간, 고개를 돌려 무적 할매 품에 안기고 말았으니.
난 사부에게 백두산 만년산삼의 사 등분 한 것 중의 한 뿌리.
그러니까 백두산에서 우리 녀석들이 똑같이 나누어 먹자고 해서 내 몫을 챙겼고, 그걸 다시 반으로 갈라 잘 말려 두어 간직하고 있던 것 말이다.
그걸 사부에게 주었다.
초향과 예지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렇게 항주를 떠났고, 아니 떠나기 전.
항주의 개방 분타와 하오문 지부를 찾아갔다.
친구들을 바깥에 둔 채, 나 혼자 방문했다.
약속한 대로 엄청난 양의 정보, 현존하는 마두와 대마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조차 일부라 했다.
꾸준히, 또 계속 나에게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귀정사, 무당, 그리고 아미파에 전서구도 아닌 전서응을 각기 세 마리씩 보냈다.
* * *
“형님! 잡았습니다. 크하하하!”
호북에서 적귀쌍마라는 쌍둥이 마두를 잡았다.
의제 녀석이 맹활약을 펼쳤다.
의제의 우각당이 있는 지역 인근이었다.
의제는 어느새 오백 명이 넘는 규모로 커진 우각당의 수하들을 불러 일을 돕게 했는데, 그들이 큰 힘이 되었다.
광천마제 시절처럼 우각당도 곧 우각회라 불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의제의 명령 때문인지, 아니면 보는 눈이 많아져서 그런지, 이제는 나쁜 짓도 안 한다고 한다.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시오! 지키시오! 적들은 도망갈 곳이 없소!”
중원 전역에 신출귀몰하여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던 극악무도한 황의적이란 마적단을 안휘에서 잡았다.
그 민첩함이 대단하여 남궁세가에서조차 여러 번 놓쳤던 마적단이었다.
무림과 관, 그리고 민간까지 합세한 대대적 연합 추격대는 일 년이 넘게 황의적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역시나 한해북이 지휘를 맡자 한 놈도 놓치지 않고 모두 생포할 수 있었다.
복건에 이어 한해북의 명성이 또 한 번 크게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네, 이놈! 이게 끝이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쾅!
콰콰콰콰콰콰콰쾅!
무려 여든여덟 살이나 먹은 독인사철이라는 늙은 대마두다.
독공을 쓰는 노인으로, 완연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실로 어마어마한 무위의 대마두였다.
형산파가 있는 호남의 형산에서 천무휘가 무려 오백여 합의 싸움 끝에 독인사철이라는 대마두의 목을 베었다.
제자 삼백 명을 잃은 형산파의 장문인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천무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천무휘의 명성은 이내 삼척동자까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오라버니들! 역시 우리 오라버니들이 최고라니까!”
마두와 대마두를 물리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백미호가 지친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 녀석들, 내공이 고갈되고 육체는 시체나 다를 바 없이 지쳤을 텐데도, 백미호만 보면 힘이 불끈불끈 솟았다.
가끔은 가까운 곳에서, 위험할 때는 먼 곳에서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그녀다.
이미 함께한 날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녀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이다.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와 함께 무림을 종횡하는 그녀다.
그리고!
이 넷 중에.
씨팔!
닭대가리가 있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이 찢어 죽일 닭대가리가!
계효보가!
매일 우리와 함께 무림행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런데 어쩌냐, 닭대가리야?
너, 내일 죽어.
내공이 이십 갑자가 아니라 이백 갑자라도, 넌 반드시 내일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