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돌격!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일천 명의 무림인과 팔백 명의 해군 정예.
총 일천팔백 명의 선봉대는 거침없이 왜구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간혹 왜국의 해적들 사이에 닌자들이 갑작스레 튀어나오고, 또 동영의 언어로 사무라이 불리는 진짜 검객들이 큰 위협을 가했다.
사무라이 중에는 나를 놀라게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들도 몇 있었다.
내공 없이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른 진짜 검객이며 무사였다.
어찌 그게 가능한지 의아할 나름이다.
뭐, 백두산에서 백두신령을 통해 축지법이라는 중원 무림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신법을 보기도 했으니, 왜국이라고 그런 게 없을 리 있겠다 싶기도 하고.
하지만 닌자도, 또 사무라이도.
한해북과 복건 무림의 고수들에게는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천무휘의 명성이 실로 대단하긴 한 게, 이번 출정을 앞둔 막바지 날들에, 이미 큰 타격을 입어 출정을 거부하던 복건 쌍곤마가와 절강 단목세가 그리고 광동의 광동진가에서 다시 고수를 파견했다.
또 수없이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출정을 원한다며 대두장으로 몰려들었다.
그 수가 실로 엄청나, 이번 선봉대의 일천 명은 추리고 추려 구성된 고수들이다.
사무라이 중 몇몇이 신검합일의 경지에 올랐다지만, 내공 없는 반쪽짜리 신검합일이다.
닌자가 아무리 신출귀몰한다고 해도, 그래봐야 살수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작정하고 매복하여 틈을 발견하여 엄습한다면 모를까,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 복건 무림의 고수들은 그들이 그 힘을 발휘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용맹하게 싸우는 이가 바로 한해북이다.
-한 형! 뒤쪽 커다란 산의 기슭에 통나무로 만든 오두막 감옥이 스무여 채 있습니다. 그곳에 잡혀 온 여인들 이백여 명과 해수장위사 장군의 오대독자가 갇혀 있습니다.
-넵!
"일소단, 삼소단, 오소단, 그리고 단목세가의 고수들은 나를 따르시오!"
"넵!"
한해북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며 적들의 중심을 뚫었다.
그 뒤로 삼백여 명의 해군 정예와 단목세가 고수들이 따랐다.
인질들을 구하러 가는 것이다.
때마침 천무휘가 도착했다.
-천 형.
-네, 마 형. 도주한 놈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제거했습니다.
-한 형을 도와주세요. 해수장위사 장군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약속한 게 있으니 그 오대독자란 아들놈은 꼭 살려 데려가야 합니다.
-네, 마 형!
천무휘까지 한해북의 뒤를 쫓았다.
됐다.
이곳은 더 볼 필요도 없다.
난 곧바로 몸을 날렸다.
* * *
-형님!
의제가 새벽의 그 바다 위에 작은 배에 탄 채로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떠 있었다.
난 등평도수로 바다를 달려 작은 배에 올라탔다.
눈만 껌뻑껌뻑하는 소증승과 달리, 대두장주가 추천해 노를 젓는 다섯 명의 뱃사공은 나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쳐다봤다.
"출발하시죠."
"넵!"
의제의 말에 나이도 제각각인 뱃사공들이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는 열심히 노를 저어 거친 바다 위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그곳 상황은 어떻습니까?"
"한 형이 제대로 한 건 하는 중이다."
"우리 한 형 부모님께서 무척 좋아하시겠네요."
"그렇겠지."
나와 의제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시선을 저 먼바다 위에 고정했다.
이백 수십 척의 함대가 눈에 들어왔다.
해수장위사 대장군이 이끄는 황제의 전함이다.
곧이어 고산도의 각기 다른 세 곳에서도 수십여 척의 배들이 몰려나왔다.
근거지를 세 곳으로 나누었던 왜국의 해적들이, 황제의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세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다.
곧, 양측에서 화포전이 시작되었다.
쾅!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벽력탄이고 진천뢰를 쏘아대는 화포다.
그리고 그 위력은, 역시나 황제의 군대가 쏘는 화포가 월등히 강했다.
아니, 이를 지휘하는 해수장위사.
이 노인네 말이다.
바다 위에서는 자기가 왕이라더니.
오!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수적으로도 우위요, 화력 면에서도 월등한데, 자만하지 않는다.
중심에 있는 장군선에서 이백여 척의 전함에 지시를 내리니.
그 많은 배들이 마치 한 마리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여 적의 공격을 피하며 약점만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래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좋지 않겠나.
"의제, 잠깐 다녀올게."
"네, 형님."
곧바로 몸을 날렸다.
이미 왜국 해적들의 우두머리가 타고 있는 배 세 척이, 어는 배인지 확인했다.
밤샘 싸움으로 내공이 많이 고갈됐…… 아니.
아직 많다.
사 갑자 넘는 내공 아니겠는가?
고수들과 밤새 싸웠다면 모를까, 아직 차고 넘친다.
바다 위를 열라게 달렸다.
이건 확실히 힘들긴 하다.
그 거리도 눈으로 보는 것보다 한참이나 멀어, 중간에 괜히 왔나 싶은 생각도 살짝 들 정도였다.
내공이 아직 여유롭다고 해도, 내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근육은 찢어질 것같이 아팠다.
그래도 열심히 달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화포전을 멈추고 배와 배가 부딪혀 선상에서 백병전을 막 벌이기 시작할 때였다.
남은 내공을 상당 부분 끌어 올렸다.
딱 세 척.
커다란 함선을 침몰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해야 했다.
곧바로 첫 번째 왜국 해적의 장군선으로 몸을 날렸다.
바다를 딛고 몸을 날려, 다시 갑판을 디딤돌로 재도약했다.
그렇게 높디 높게 하늘을 향해 올랐고, 천근중추공(千斤重錘功)이라고 달리 천근추(千斤錘)라 부르는 수를 썼다.
내 다리에 마치 억만 근의 쇳덩이라도 달린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발검을 하며 남은 기운을 모조리 광천검에 쏟았다.
멸마파악(滅魔破惡)의 초식으로, 우리 현화문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이며 파괴적인 초식이다.
사 갑자의 내공에서 터져 나오는 멸마파악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려 열 장에 달하는 용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젠장!
검고 핏빛의 검강이다.
아무튼, 그 위력만큼은 실로 무지막지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세 척의 대장선 중, 한 척이 곧바로 폭발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얽히고설켜 한참 백병전을 치르던 이만여 명의 해군과 일만 명에 육박하는 왜국의 해적들이, 순간 싸움을 멈추었을 정도다.
난 곧바로 다시 움직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검붉은 용의 검강이, 나머지 왜국의 해적 대장선마저 부수어 버리고 말았다.
이미 싸움의 기세가 일방적으로 쏠린 상태였는데, 내가 거기에 쐐기까지 박아 버린 것이다.
이제는 싸움이 아닌 학살이었다.
왜의 해적선들은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고, 해수장위사는 함선을 지휘하며 도주하는 적들의 배를 한 척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승리를 확신한 늙은 대장군, 해수장위사의 시선은 왜선에서 나에게로 닿아 있었다.
-아들이 살아 있음은 확인했소. 천무휘와 한해북 그리고 단목세가의 고수들과 당신이 선별한 정예가 이를 구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오는 중이오. 살아서 만날 테니, 남은 싸움에 전념해 주시오.
해수장위사는 내 전음을 받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곧 시선마저 다시 왜적들을 향했다.
하아!
이 노인네.
오늘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렇게 근엄하고 멋있어?
엊그제만 해도 질질 짜면서 목매달아 자살하려던 그 한심한 노인네는 온데간데없다.
됐다.
이곳도 승리가 확실하다.
난 다시 바다를 향해 몸을 날렸고, 이제는 정말 간당간당해진 내공에 의지해 의제가 있는 배로 열라게 달렸다.
사실, 힘이 너무 들어서 중간에 그냥 헤엄쳐서 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지쳤고 내공이 고갈됐다.
그래도, 쪽팔릴 순 없진 않겠나?
단전에 남은 내공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갈기갈기 끌어모아, 간신히 배까지 등평도수를 펼칠 수 있었다.
* * *
무인도.
나와 의제, 그리고 소증승만이 남았다.
고산도 주변에는 수많은 무인도가 있고, 그중 한 곳을 대충 골라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미 이곳 무인도에 온 지 한나절이 지났다.
소증승은 한나절 내내 의제에게 두들겨 맞았다.
양쪽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고 탱탱 부어올랐다.
눈물과 콧물, 침 그리고 피가 그의 얼굴과 온몸을 적신 상태다.
그 와중에도 소증승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댔다.
상처야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만, 목숨은 잃으면 되살릴 수 없다는 걸 놈은 안다.
또, 내가 놈을 바로 죽이지 않고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은, 분명 그가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제가 저 멀리 가고, 나와 단둘이 남게 된 소증승.
"야, 너 맷집 대단하다. 한나절이나 두들겨 맞으면서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하냐?"
"끄으으윽. 꾸윽. 끄으으윽."
"엇? 의제가 아혈 안 풀어 줬었어? 아이 참, 의제 녀석도."
능청스럽게 그리 말하며 다가갔다.
짐짓,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말을 뱉으며 소증승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하아아! 보물! 보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엄청난 보물이 있습니다."
막힌 둑이 뚫리면 저렇게 물을 쏟아낼까?
소증승은 정말 거친 물결이 몰아치듯 그렇게 나를 향해 간절한 말들을 쏟아냈다.
걸렸다, 늙은 대마두.
"보물? 나도 돈은 많은데?"
"투명의(透明衣)라고 아십니까? 그 옷을 입으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투명 인간이 되는 겁니다."
"에이, 너 살고 싶어서 막 지어내는 거 아냐? 그런 게 어딨어?"
"진짜입니다. 아니면 비천융단(飛天絨緞)은 어떻습니까? 융단이 하늘 훨훨 날아다닙니다. 말을 타는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스읍! 너 자꾸 거짓말할래?"
"진짜입니다, 대협! 그것들 말고도 한쪽 눈에 가져다 대면 사람의 내면과 그 단전의 내공까지 파악 가능한 투시독안(透視獨眼)이라는 기물이 있고, 변신항련(變身項鍊)이라 하여 착용만 하면 사람이건 동물이건 변신을 하게 해 주는 목걸이. 역귀보갑(逆歸寶匣)이라는 상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해 줍니다. 그리고……."
"야!"
"넵!"
"너 자꾸 거짓말하면 그냥 죽인다."
"진짜입니다!"
"그거 다 실제로 해 봤어?"
"네? 그, 그게……."하아!
뭔가 기분이 쌔하다.
이 새끼, 눈알을 마구 굴린다.
"네가 가진 그 기물 중 실제로 네가 해 본 거 있냐고."
"그러니까 저는…… 분명 그렇게 듣고 그것들을 훔친…… 아니, 얻은 것이긴 한데. 아직 사용법이나 뭐 이런 것들……."
"그냥 죽자."
"대에에에혀어어업!"
이 노인네, 다급했나 보다.
내가 다 깜짝 놀랄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뭐? 왜?"
"무형비침(無形飛針), 빙정(氷晶), 요괴경(妖怪鏡)은 진짜입니다."
"그럼 앞서 말한 건 다 가짜야?"
"진짠지 가짠지 모릅니다. 아니, 가짜…… 죄송합니다, 대협. 하지만 무형비침과 빙정 그리고 요괴경은 진짜입니다. 대협께서 제 칠연절명침을 파훼하셨지만, 대협이니 가능했던 것입니다. 칠연절명침은 암암리 무림십대암기로 인정받는 암기입니다."
맞다.
이건 사실이다.
"그리고! 무형비침이야 말로 칠연절명침에 버금가는 암기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 아는 장보동에요."
"음…… 그래? 그런데 난 암기는 별론데?"
이 인간, 또 눈알을 마구 굴린다.
"빙정은 어떻습니까? 음공(陰功)을 익히는 무인에게 이보다 더 귀한 영약이며 기물은 없을 것입니다."
"나 음공 안 익혔어. 봐! 음양오행이 아주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도가(道家)의 무공을 익혔다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증승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무언가 확실하게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 모양이다.
"요괴경! 제게 있습니다. 도사님이시면, 악귀며 잡귀며 요괴들을 물리쳐야 하실 것 아닙니까? 요괴경을 통해 그 상대를 보면, 인간으로 변신해 있는 요괴들의 본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이 이제야 나왔다.
닭아, 닭아, 닭대가리야.
요괴경으로 보면 보인단다.
네가 무엇으로 변해 있건, 네 참모습이 요괴경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하는구나.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응.
곧 닭 잡는다는 소리다.
기대하고 있어라.
내가 곧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