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당장 파발마를 보내 복건, 절강, 광동 전역에 방을 붙여라. 수룡검 천무휘 대협과 그 친구들…… 어험. 죄송합니다, 마 도사님."
"괜찮습니다. 오히려 천 형의 이름을 앞에 적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효과가 더 클 것입니다. 그리하시지요."
"감사합니다."
대두장의 장주가 다시 대두장 사람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명령했다.
"수룡검 천무휘 대협과 복건 대두장의 구절협 한해북, 하남 현화문의 마악치, 강서 우각당의 우각도마 곽우적. 네 명의 의로운 대협께서 복건 앞바다의 해적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바로 세우려 의병을 모집한다고 모두가 보고 들을 수 있게 알리도록 하여라!"
"넵!"
삼백 명에 달하는 장정들이 대두 장주의 말에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한 후 빠르게 흩어졌다.
지난밤, 우리는 끼니도 거르고 밤샘 회의를 이어간 끝에 계책을 수립할 수 있었다.
나와 천무휘 둘이서 해적들을 직접 공격할 생각이다.
대두 장주를 비롯한 이곳 복건의 원로들은 크게 우려하였다.
하지만 천무휘의 한마디.
"가능합니다."
이 한마디로 모두의 우려를 잠식시켰다.
등평도수는 내력 소모가 굉장히 심한 신법이다.
무한대로 펼칠 수 없다.
특히나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나는 사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가지고 있기에 큰 무리가 없다.
천무휘가 문제다.
일 갑자 반이 넘는 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바다 위를 너무 오래 달리다 보면 결국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작은 배를 몰아 적들 근처까지 가고, 그때부터 등평도수로 물 위를 달려 적들을 공격할 참이다.
물론, 적들 중에도 고수가 있다고 했다.
여차하면 후퇴해야 하고, 또 어떤 고수가 얼마나 많을지 모르니 우리 둘만으로 작전을 모두 끝낼 수는 없다.
무림에서의 싸움과 대규모 전투는 확실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번 회의를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한해북에게 병법을 가르쳤다는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의 이십구 대 손이라는 손필이라는 자와 한해북이, 역시나 계책을 세우는 데에 큰 활약을 했다.
아무튼 나와 천무휘는 돌격대다.
여차하면 전멸시키고, 안 되겠다 싶어도 큰 타격까지 입히면 우리의 임무는 끝이다.
그다음은 선봉대와 본진이다.
선봉대의 대장은 한해북이 맡기로 했다.
손필의 말에 의하면, 하하하!
한해북 이 녀석 말이다.
이젠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정말 끝을 알 수 없는 녀석이 바로 한해북이다.
손자병법은 물론,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원 병법의 대표적 일곱 가지 서적)를 모두 익혔다고 한다.
이미 열일곱 살 때부터, 산과 바다에서 산적과 해적 소탕 작전 지휘를 스무 차례 이상 돕고 직접 지휘해 적지 않은 전공까지 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대두장주가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모두가 동의해 선봉대의 장군에 한해북을 임명했다.
사실 한해북하고 의제 이 녀석들.
고려 앞바다에서 해적을 만났을 때도 배에 남아서 사람들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다 이유가 있다.
이 녀석들 말이다.
큭큭큭큭큭.
아직 등평도수 못 한다.
물 위에서 달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나!
대놓고 ‘의제랑 한 형은 물 위에서 달리지 못하니 여기서 가만히 우리 활약 구경이나 하쇼’라고는 말하기 뭐하지 않겠나?
이번에도 돌격대로 같이 가면 좋긴 한데, 뭐 어떡하겠는가?
나랑 천무휘가 열라게 물 위를 달려 적들을 물리칠 때, 뭐 빠지게 열라 노만 젓고 있을 게 뻔한데 말이다.
아니면 죽어라 헤엄쳐야 할 테고.
진짜 모양 빠질 일이다.
아!
무슨 밧줄 연결해서 배를 끌고 가고 그런 거 어렵다.
바다는 바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한해북이 선봉대를 맡기로 했다.
혹시라도 나와 천무휘과 후퇴를 하게 되면, 우리를 구해야 하는 임무며, 또 우리가 적들과 치열하게 싸운다면 가장 빠르게 달려와 함께 싸울 이들이다.
당연히 해전 경험이 많은 무림의 고수들을 선봉대에 편입할 생각이다.
의제는 따로 중히 할 일이 있어서 내가 다른 임무를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대(本隊).
이게 문제다.
왜국에서 왔다는 해적선의 규모는 일백여 척.
백 명씩만 타고 있어도 일만 명이고, 이백 명씩 타고 있다면 이만 명이다.
정말 커다란 함선에는 오백 명 이상도 탄다고 했다.
뭐, 고수만 없다면 숫자가 문제겠는가?
나와 천무휘 둘이서 충분하다.
만 명이건 이만 명이건.
더군다나 바다 위라 그냥 배만 침몰시켜도 구 할 이상은 죽을 테니, 그 싸움이 더 편하다.
하지만 적 중에도 분명 고수가 있다고 했고, 싸움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진짜 싸움, 대규모 해상전을 치를 본진, 본대가 필요한 것이다.
의병을 모집한다지만, 대부분은 바다 위에서 싸움 한번 해 보지 못한 이들일 테다.
구 할 이상이 배에 승선해 적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육지에 남아 바닷가를 지킬 것이다.
그래서 결국.
황제의 군대.
황군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대두장주가 복건의 원로 그리고 복건 성독부 지휘사와 함께 다시 해수장위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절강, 복건, 광동 앞바다의 모든 해군 통수권을 지닌 자가 바로 해수장위사다.
그런데 여기에도 분명 뭔가 있다.
쉬이 해결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 * *
"오빠, 나 배부르다, 헤헤."
백미호다.
야심한 밤. 대두장주가 특별히 우리를 위해 마련해 준 전각의 후원.
환한 달빛 아래 이것저것 생각 좀 하려고 나와 있는데, 어느새 백미호가 졸졸 따라와 볼록 귀엽게 튀어나온 자기 배를 만지며 저리 말하고 있다.
"한 오라버니 부모님께서 정말 요리를 맛있게 해 주셔서 과식했지 뭐야? 살 빼야 하는데, 헤헤."
얘는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건가?
헷갈린다.
천하제일미녀가 나를 왜?
나, 너무 자괴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헷갈린다.
만약, 정말 만약.
백미호의 저런 행동들이 거짓이라고 한다면.
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나, 진짜 큰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리 무서워하고 겁먹는 거다.
"근데 오빠는 잠 안 자? 내일부터 의병들 많이 몰릴 것 같다며?"
"할 일이 있어."
"뭐? 내가 방해하는 거야?"
"아니, 지금……. 음, 나 좀 다녀올게. 늦을 테니 먼저 자."
"어디 가는……."
그녀를 뒤로하고 신법을 펼쳤다.
대두장의 높은 담장을 넘고, 또 삼명의 빼곡한 집들의 지붕을 밟아 가며, 그렇게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좀 멋있게 보였으려나?
* * *
복건해군수령부.
그래도 황군은 황군인가 보다.
경계가 엄청나게 삼엄하다.
은형술을 최대로 펼쳐야 했다.
오늘 저녁, 대두장주와 복건 성독부 지휘사 그리고 복건의 여러 원로들이 해수장위사를 만나러 이곳을 찾아왔지만, 거절당했다고 했다.
벌써 석 달째, 아무도 만나 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야심한 밤을 틈타 이곳을 찾은 것이다.
이미 새벽으로 접어든 야심한 시각임에도, 사방에 횃불이 켜져 낮과 같이 빛을 비추고 있다.
쥐 한 마리 지날 수 없는 철통 경비와 함께였다.
물론 쥐는 드나들 수 없을지 몰라도, 나는 가능하다.
왜?
사 갑자의 초절정 고수니까.
나는 바람과 동화되고, 대기와 한 몸이 되어 그렇게 어둠 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 * *
"흑흑. 엉엉엉. 미안합니다, 아버님. 조상님들…… 제가 못나…… 흑흑흑.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엉엉. 바로 찾아뵙고…… 엉엉엉. 사죄드리겠습니다. 엉엉엉."
미친! 미친놈!
내가 정말 어렵게 해수장위사의 방까지 침투했을 때.
아니, 이 인간 말이다.
다 늙은 노인네가 어린아이같이 엉엉 울며 목을 매려 하고 있었다.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숨이 자신한테 달려 있음을 모르는 것인가?
때가 어느 때인데 왜 저 지랄일까?
정말 어이가 없고, 화까지 마구 치미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툭.
밧줄에 목을 맨 해수장위사가, 밟고 있던 의자를 발로 툭 차 버렸다.
"끄어어억. 끄…… 끄으으으으윽."
진짜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터벅터벅 걸어 죽어 가는 그 앞으로 갔다.
어이없다는 눈을 떠 빤히 해수장위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이 미친 노인네가 내게 한 손을 힘겹게 뻗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게 아니겠는가?
"살…… 끄으으으으. 살려…… 끄으으으윽. 줘."
하!
진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까지 났다.
그럼에도 이 노인네, 얼굴이 시뻘게져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또 더 간절하게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냥 눈빛과 손짓으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뭐 이런 인간이 대장군이야!
하, 진짜!
짧은 시간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그냥 죽게 냅둬?
아님, 살려 줘?
휴우.
일단 무슨 사연인지 들어나 보자.
쉬이이익.
툭.
쿠당탕탕.
지풍을 날려 밧줄을 끊자, 해수장위사가 바닥으로 떨어져 곤두박질쳤다.
"헉헉헉헉! 헉헉헉헉!"
그는 막혔던 숨이 돌아오자, 아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러 안정을 되찾자,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나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넌…… 넌! 누구냐?"
하, 미친!
진짜 돌겠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딱 그 모양이다.
또 웃긴 건, 이 인간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전각 밖에 있는 병사들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뭔가 확실히 사연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난 주변을 한번 쓰윽 훑어봤다.
누가 황군의 대장군 아니랄까 봐, 방 안의 집기들이 죄다 고급이다.
그중, 그가 평소 즐겨 앉았을 법한 의자가 보였다.
아주 화려하고 또 화려해, 백성들의 피눈물로 만들어진 황금으로 치장된 의자였다.
난 여전히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해수장위사를 뒤로 하고, 터벅터벅 걸어가 그 황금 의자에 몸을 깊이 누여 앉았다.
해수장위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에서 일어나 의자를 가지고 오더니 내 앞에 앉았다.
여전히 눈빛은 나를 백번 천번 죽일 듯했다.
"누구냐…… 넌? 그가 보낸 것이냐?"
"그?"
내가 되묻자, 해수장위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말았다.
"황궁에서…… 오신 것입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 의복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의심이다.
황궁에서 왔다면, 도사 복장을 하고 있지는 않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조금은 안도하는가 싶더니, 다시 두 눈을 부릅뜨는 해수장위사.
조금 전 목매어 자결하려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보시오, 장군."
"이보시오? 네놈이 정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냐?"
계속 어이가 없다.
이 노인네가 분위기 파악을 좀 못하나 보다.
모르면 알려 줘야지.
난 기도를 개방하고 살기를 끌어올렸다.
그래도 그냥 장군도 아니고 대장군이라 그런지, 나름 꽤 버티긴 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비 오듯 쏟고, 또 사지를 덜덜 떨면서도,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살아 있으니 말이다.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는 장군은 누구요?"
"네, 이놈!"
호통을 쳤는데,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못했다.
확실히 무언가 바깥에 있는 병사들이 알면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나 보다.
이쯤 되어서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휴우,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이보시오, 장군. 나랑 계약 하나 하지 않겠소?"
"네놈이 정녕 곱게 죽기도 원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 혀부터 잘라 버리겠…… 커억!"
살기를 극대로 끌어올렸다.
조금 전 밧줄에 목을 맸을 때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공포가 느껴질 테다.
"그…… 그만…… 그만…… 부탁이오."
살기를 거두었다.
나를 보는 눈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의지가 그 눈 속에 보였다.
사연도 있고, 오해까지 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
나도 뭘 줘야 받을 수 있나 보다.
"대두장에 머물고 있소.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온 무림인이오. 이름은 마악치. 도사요. 엄청난 고수고."
"……."
의심의 눈빛만 보낸다.
좀 더 줘야 할 것 같다.
"대두장에 내 친구들……. 휴우, 그러니까…… 수룡검 천무휘도 와 있소."
"수, 수룡검? 그 화산파의 천재 고수라는 수룡검 천무휘 대협?"
이런 젠장!
이봐! 당신 황제의 신하야!
하수불범정수(井水不犯河水)라고, 관과 무림은 서로 불침인데 왜 수룡검 얘기에 대장군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놀라!
의도가 통하긴 했는데, 젠장!
기분이 더럽다.
"진짜…… 진짜로 해적들을 소탕하러 온 것이냐? 무림맹이 움직인 것이냐?"
"이봐! 대장군 나으리! 내가 뭔가 줬으면, 당신도 양심이 있으면 하나라도 내놔야 할 것 아니야!"
"그…… 그게…… 천무휘 대협이 나서 주신다면…… 다 실토하겠…… 다."
"천무휘…… 하아! 천무휘나 아니면 천무휘 정도 혹은 그 이상 가는 고수의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지? 이곳 병영의 장군들보다 그 무위가 훨씬 뛰어난 무림의 진짜 고수."
"그, 그렇다."
"난? 나도 고수야. 방금 말했잖아. 엄청난 고수라고. 조금 전 내 기운에 숨까지 턱하고 막혔던 걸 벌써 잊었어?"
"넌…… 믿을 수 없다."
"왜?"
"내가 믿을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아니다."
"당신이 내가 그 정도의 고순지 아닌지 어떻게 알……."
"생긴 게 고수가 아니야."
개ㅅ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