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고려 미추홀에서 탑승한 배를 타고 열여드레가 지났다.
선장의 말에 따르면, 곧 우리의 목적지 복건에 도착할 것이라 했다.
다행히도, 첫날 이후에는 해적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열여드레 동안, 우리는 백미호와 무척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마 오라버니. 또 혼자 있네?"
내가 허락한 적 없지만,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첫날 해적선 일로 인해, 이후에도 내 마음은 계속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것인지.
그녀는 이렇게 틈만 나면 내 곁으로 다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쉬지도 않고 재잘거렸다.
"오라버니, 나 부탁 있어."
말을 놓으라고 한 적도 당연히 없다.
언제나 그녀 마음대로다.
"나, 오라버니들 따라다니면 안 돼?"
바다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 그녀를 향했다.
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 심장이 철렁일 정도의 아름다움을 보고 말았다.
"나, 집에 가기 싫어. 오라버니들하고 같이 다닐래."
"우린 할 일이 많아. 그리고 매우 위험한 일들을 해야 해. 목숨을 걸 만큼."
"나도 호신술 정도는 익혔어. 보여 줄까?"
그녀가 세 걸음 옆으로 이동해, 힘찬 동작으로 정권 지르기와 발차기를 했다.
익힌 적 없다.
간단한 호신술조차.
아마도 정말 아주 곱게, 또 곱게 자란 어느 상단의 귀한 딸인가 보다.
"봤지? 헉헉. 오라버니. 헉헉헉. 이 정도면, 산적 두세 명 정도는 거뜬하지 않겠어? 헉헉헉."
그 짧은 동작 몇 번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
우리와 함께할 경우, 너무나도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될 테다.
"미호야! 여기 있었네."
"아이, 우리 미호는 매일 마 형하고만 있다니까."
"형님, 도대체 우리 미호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이렇게 미호가 형님만 졸졸 따라다니는 겁니까?"
우리 세 녀석이 왔다.
우연인 척하지만, 일부러 미호를 찾다가 이제야 발견한 티가 팍팍 났다.
하지만 미호는 세 녀석에게는 그저 눈웃음만 한번 방끗한 후, 다시 나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마 오라버니, 그래서 허락하는 거야? 허락해 줄 거지? 응? 그렇지?"
열여드레라는 시간 동안, 백미호는 우리들의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이토록 매달리는 것이다.
"미호야, 형님하고 무슨 얘기 했는데? 뭘 허락하고 말고 해?"
내게서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백미호가 나를 삐친 눈으로 한번 흘겨보는가 싶더니.
이내 의제와 한해북, 천무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들, 나 오라버니들 여정에 끼워 주면 안 돼? 오라버니들하고 좀 더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순간!
우리 애들 턱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눈도 튀어나올 기세다.
천무휘, 제발 너라도 체통 좀 지켜.
수룡검이라고!
하지만 똑같다.
의제나, 한해북이나, 천무휘나.
열여드레 사이, 우리 세 녀석 말이다.
백미호에게 완전히 홀려 버리고 말았다.
"난 찬성!"
"나도 찬성!"
"완전 적극 찬찬성!"
세 녀석이 거의 동시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리고 곧, 세 녀석과 백미호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녀가 무공을 익히고 아니고는 사실 큰 문제랄 것도 없다.
내가 심각하게 걱정하는 부분은, 그녀의 정체다.
첫 번째로 그녀는 광마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는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
확실히 그녀는 지금의 설민민보다 아름답다.
한마디로 그녀가 당대의 천하제일미녀라는 소리다.
이건 확실하다.
그런 그녀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고, 광마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오죽 방탕하게 놀았는가?
천하제일미녀라면 어떻게든 한번 집적거렸을 것이 분명한데, 그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너무 이상하다.
그녀의 상단에서, 그녀를 평생 꼭꼭 숨겼단 말인가?
그래도 시집은 보냈을 테고, 어떻게든 그녀의 미모는 알려졌을 테다.
그런데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물론, 그녀가 광천마제 시절,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수도 있다.
그녀의 미모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너무 건강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아직 너무 많은 의심점이 남아 있다.
두 번째 의심은 그녀와 함께 배에 탄 네 사람이다.
첫날, 나는 그들이 엄청난 고수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조금도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분위기는 초절정에 화경 급인데, 전혀 없다.
슬쩍 몸을 부딪쳐 그 기운을 상세히 살폈는데, 일말의 내공조차 갖고 있지 않다.
내 눈과 내 본능, 그리고 내 기감이 그들을 전혀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는 뜻이다.
의심되는 점은 또 있다.
그녀의 상단, 소속.
열여드레 동안, 그녀는 정말 쉬지 않고 많은 말들을 했다.
하지만 결코, 자신의 상단에 대한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내가 몇 번 집요하게 물었지만, 그녀는 끝내 대답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의심.
그녀가 대놓고 날 좋아하는 거다.
아!
이건 의심하면 안 되는데, 젠장!
내 마음은 그런데 머리가 의심한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첫눈에 나에게 반했다?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된다.
뭐, 내 첫인상이 좋았고, 첫날 해적선에서 사람들 구하며 제사까지 정성스레 지내 주는 모습에 반했다고는 하는데.
젠장!
이건 내 자격지심 때문인가?
원래 내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좀 있는 그런 남잔가?
하하하!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 마지막 의심은 지워야겠다.
아무튼!
마지막 의심을 지운다고 해도, 여전히 남은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와 동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들의 여정엔 숱한 위험이 뻔하게 도사리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그녀가 간자기라도 하면?
다 죽는다.
난 또 사 년 오 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닭대가리의 내공은 다시 일 갑자가 늘어난다.
안 된다. 죽어서는.
그러려면, 위험이 될 요소는 사전에 미리 제거해야 한다.
"아잉, 오빠! 나도 데려가 줘, 이이잉."
"그…… 그럴까? 그러지, 뭐. 하하하."
젠장!
그녀가 내 팔을 꽉 잡고 끌어당기며 어리광을 부리는데, 이건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다.
천하제일미녀가 내 팔을 자신의 가슴으로 쭉 끌어당겨 흔들어 대는데, 세상 어떤 남자가 거부할 수 있겠냔 말이다!
아!
처음부터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어.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자.
계속 함께 다니다 보면, 그녀도 인간인 이상 자신의 정체를 흘릴 수밖에 없을 테니.
그녀가 누군지는 이제부터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
우선, 한해북 녀석의 정체부터 밝히자.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귀공자인지.
* * *
복건 삼명에 도착했다.
한해북의 집이다.
백미호를 따르던 네 명의 남자들은, 백미호가 오랜 설득 끝에 따로 보냈다.
자신이 속한 상단으로 돌아가 상행을 마무리하라 했다고.
백미호는 우리 무리 중에 천무휘가 있어서 그들이 믿고 백미호를 맡겼다고 말했다.
이것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우리는 넷에서 다섯이 됐다.
백미호는 첫날 그러했듯, 면사도 아닌 복면으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남장까지 하여 우리와 함께 한해북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한 형, 한 형네 집에 가면 얼마나 머물 수 있나요?"
의제가 신난 얼굴로 물었다.
"그야 원하시는 만큼 머물 수 있지요, 하하."
"백두산에서도 그랬고, 바다에서도 그랬고, 제대로 된 음식 먹은 지 정말 오래됐는데요, 한 형."
천무휘다.
한해북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맛난 음식 실컷 먹을 수 있게 차려 주실 거라고요, 하하."
의제에 이어 천무휘의 얼굴까지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복건 삼명의 중심가로 이동 중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땅값이 뛰고 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복건 삼명에서도 가장 비싼 땅이라는, 또 가장 중심부라는 그곳 대두장(大頭莊)에 도착하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반전 따위는 없었다.
장원의 대문 높이만 해도 다섯 장에 달했다.
그 너비는 열 장을 넘는 듯했다.
이건 그냥 장원이 아니라, 화려한 성을 쌓아 놓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대두장의 정문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쉴 새 없이 출입하고 있었다.
정말 으리으리하고 범인이라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장원이었다.
하!
곱게 자랐다고 하더니,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하신 몸이었나 보다.
대두장의 규모에 의제와 천무휘도 입을 쩍 하니 벌리고 놀란 얼굴을 했다.
음, 평소 과장된 동작과 말을 잘하던 백미호는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다.
왜지?
그녀의 집은 이보다 더 대단한가?
"한 형! 어서, 어서 들어가요. 한 형 부모님께 빨리 인사드려야죠, 하하하. 예전에 저랑 싸웠던 거 말 안 했죠?"
의제다.
의제와 한해북의 인연으로 지금 우리와의 인연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의제와 한해북의 첫 만남은 칼부림이었다고 했다.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었나 싶어서 배 위에 있을 때 물었는데.
그냥 객잔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비가 붙어서 싸웠다고 한다.
의제가 복건 삼명에 일이 있어서 우각당 수하들을 데리고 왔고, 객잔에서 술을 마시던 중 의제 수하들이 누가 사파 녀석들 아니랄까 봐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그걸 한해북이 꾸짖었고, 결국 의제와 칼부림까지 가게 됐다고 했다.
의제는 지금 그 옛 기억에, 혹시라도 한해북의 부모님이 자신을 미워하면 어쩌나 싶어 저리 묻는 것이다.
"염려 마세요, 곽 형. 설마 제가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일일이 고자질하는 놈으로 보이세요?"
"하하! 아니죠. 우리 한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죠. 그럼 어서 가시죠, 한 형."
의제가 한해북의 팔까지 잡아 이끌며 대두장의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
한해북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뭐지?
한해북이 의미 모를 미소까지 지으며 의제와 우리를 향해 말했다.
"그쪽이 아닙니다."
그 말만을 하고 걸음을 떼었다.
정문이 아닌, 대두장의 높디높은 담장을 빙 돌아가는 게 아니겠는가?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한해북의 뒤를 따라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
대두장의 서문(西門)이다.
커다란 정문에 비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문이다.
그리고 그 문은, 대두장에 속한 일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여기예요. 저는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해요. 어서들 와요."
한해북이 우리를 향해 방긋 웃으며 그리 말한 후, 성큼성큼 서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의제와 천무휘는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역시나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서둘러 그런 한해북의 뒤를 따랐다.
난, 알았다.
이 녀석.
가출한 게 맞다.
그래서 혼날까 봐, 뒷문으로 들어가는 거다.
다 큰 녀석이.
한심하기도 하고, 또 듬직하게만 봤던 한해북의 이런 모습이 귀엽게도 느껴졌다.
그렇게 홀로 웃으며 나 역시 그들 뒤를 따랐다.
백미호는 여전히 나만 보며 내 옆을 졸졸 따르는 중이다.
* * *
"엇! 해북이 아니냐? 이 녀석, 이게 얼마 만이냐?"
"어머나, 해북이가 돌아왔어? 아이구, 이 녀석아! 이제야 돌아오면 어떡해?"
"해북아! 하하! 드디어 네가 돌아왔구나!"
"아버지는요?"
"아버지야 언제나 그렇듯 손님들 상대하고 계시지."
"식객원(食客園)에 계시겠네요?"
"그렇다. 얼른 가 봐라. 아버지랑 어머니랑 말은 안 하셔도, 얼마나 네 걱정을 하셨는지 몰라."
"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우리 해북이가 돌아왔네?"
"잘 왔다, 해북아."
대두장은 넓고 컸다.
서문을 통과한 우리는 한해북의 뒤를 따라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그리고, 입꼬리가 귀에 걸렸던 의제와 천무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은 한해북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두장의 공자인 한해북이 일꾼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가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니다.
아무리 스스럼없이 지낸다고 하여도, 모든 일꾼과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반말은 기본이고, 어깨를 두드리며, 간혹 늙은 일꾼들은 한해북의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또 한해북은 그러한 그들의 행동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도착했어요. 여기 식객원에 우리 부모님이 계세요."
앞서가던 한해북이 걸음을 멈춘 후 뒤를 돌아 우리에게 그리 말했다.
오랜만에 부모님 뵐 생각에 더없이 기쁘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두장 내에서도 내원과 외원 중간 지점에 있는 식객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두장에 온 손님 중, 장기간 머무는 이들이 묵는 곳이 바로 식객원이다.
"네,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 대령하겠습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예, 예."
나이가 지긋하여 노인과 중년을 오가는 사내.
그가 화려한 전각을 나서며 연신 전각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허리를 굽히며 그리 말했다.
손에는 음식을 날랐는지, 빈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그 중년의 사내가 전각 안의 누군가에게 정확히 여덟 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렸고.
그와 한해북이 서로를 보게 되었다.
"아…… 아버지."
"이 녀석…… 이 녀석……."
"아버지!"
"해북아!"
둘은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달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버지! 흑흑."
"아들아!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