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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두가 된 이유-104화 (104/245)

104화

내가 바보가 된 것 같다.

아니, 우리 넷.

바보 사형제가 된 느낌이다.

우리는 왜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릴까?

아니다.

그게 아니야.

설민민이나,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이나.

이건 개방 하북 보정 분타주 녹두개가 말했듯, 열반을 코앞에 둔 스님이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백미호라고 합니다. 쉬시는 데 불쑥 다가와 말을 걸어 죄송해요."

우리가 계속 쳐다봐 화난 게 아닌가 보다.

미소를 지으며, 살짝 미안한 얼굴이다.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더니, 예의도 바르다.

사랑한다.

미친!

정신 차려, 마악치!

그나저나 우리 녀석들.

이런 나보다 더 미친!

이 녀석들, 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정신들 차리라고!

상대가 누군 줄 알고 벌써 동공이 풀려 버린 거야!

한심한 녀석들이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다.

"어험,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소저?"

"아, 그게…… 배를 타고 오래 가야 한다는데, 벌써 심심…… 아니, 그게 아니고…… 헤헤. 혹시 네 분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초면에 제가 너무 무례했나요?"

얘, 정체가 뭐야?

"아닙니다. 무례라뇨? 사해가 동도라고 하는데, 친하게 지내면 좋지요, 하하하."

"어머, 공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예쁘다.

아름답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내 말에 더없이 기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마악치!

정신 차리라고!

상대의 정체부터 파악해!

"그런데 소저. 앗! 백 소저라고 하셨죠?"

"네, 공자님."

"저는…… 음…… 공자가 아니라 산에서 도를 닦는 도사입니다."

"어머나! 그러셨어요? 어쩐지 분위기가 너무 현묘하다 싶었어요."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의 얼굴.

당장에라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

정말 사랑스럽다.

참자, 정신 줄 단단히 잡고.

"저기 계신 네 분은……?"

"아! 재미없는 사람들이에요."

"혹 소저께서는 어떤 일로 중원에 가시는 건가요?"

"어멋! 제 소계를 제대로 안 했네요. 죄송해요, 도사님. 저는 작은 상단에 몸을 담고 있어요. 고려로 상행을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리고 저기 요상하게 분위기 잡고 있는 네 사람은, 저희 상단 사람들인데, 보시는 그대로 농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아주 재미없는 사람들이에요."

보통 자신을 소개할 때는 이렇다.

어디 어디의 어디에 속한 누구라고.

예를 들면 이렇다.

하남 소림사의 스님 원욱이다.

안휘 남궁세가의 세가주 남궁비혁이다.

중경 만리상단의 상단주 연천청이다.

그런데 방금 백미호는 그저 작은 상단의 딸이라고만 말했다.

왜지?

숨기고 싶은 건가?

무얼?

"중원에서 고려로 갔다가 동영(東瀛, 일본)으로 갔고, 다시 고려로 돌아와 지금까지 정말 말할 사람이 없어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대의 영원한 말 상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목까지 차오른 이 말을 간신히 꿀꺽 삼킬 수 있었다.

"그런데 세 분은…… 굉장히 과묵하시네요?"

의제, 천무휘, 한해북.

이 녀석들 말이다.

나보다 더 심하다.

확실히 설민민을 봤을 때보다 그 반응이 더 크다.

입도 쉬이 떼지 못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일단 그녀가 직접적으로 말을 걸자.

"하하하하! 사나이 중의 사나이! 곽우적이라 합니다."

"대화하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한해북이라 합니다, 백 소저."

"반갑습니다, 백 소저. 저는 천무휘라고 합니다. 친구들은 늘 저에게 이름보다는 수룡검이라 불러 주곤 합니다, 하하."

천무휘, 미친놈!

저 녀석이 계속 우리랑 다니다 보니 물이 좀 들은 것 같다.

점점 부끄러움이 뭔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다.

수룡검이란 말을 들었으면, 뭔가 반응이 와야 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다.

그건 백미호뿐만이 아니라, 저쪽에서 분명하게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네 명의 사내 역시 마찬가지다.

뭐지? 중원인이 아닌가?

아니면 너무 오래 고려나 동영에 머물러 중원 사정에 어두운 건가?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이미 삼 년 전부터 수룡검이란 명성은 중원 전역에 알려진 대단한 것인데.

여전히 반갑게 미소 짓고 있지만, 분명 그건 수룡검이란 말을 들어서가 아니다.

아! 헷갈리네.

백미호, 넌 누구니?

"반가워요, 공자님들…… 아니면, 도사님?"

"하하! 저희는 도는 닦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공자님……보다는 소협이란 호칭이 더 어울리겠네요. 검이랑 도랑, 들고 있는 모습이 굉장히 멋져요. 꼭 무림 영웅전에 나오는 협객 같아요, 호호호."

"백 소저께서 저희를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백 소저야말로 무림 영웅전에 나오는 천하제일미인이요, 여주인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하하!"

의제며, 한해북은 물론 천무휘까지 그냥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백미호를 향해 쉬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가고 있다.

난, 끼고 싶은데 끼지 못하고 있다.

입을 꾹 닫고 있던 녀석들이, 일단 입을 트기 시작하니 내게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배신자 녀석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녀가 날 힐끔힐끔 본다.

나는 입을 꾹 닫고 있음에도, 또한 그녀는 계속 세 녀석과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연신, 계속, 줄기차게 나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

예쁜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까지 곁들인 사랑스러운 눈길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첫눈에 반했다는 뭐 그런 건가?

천생연분이야?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야?

향아! 예지야! 미안하다.

오빠, 장가간다.

그리고 그때였다.

둥둥둥둥!

둥둥둥둥!

"해적선이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즉시 선실로 피하십시오! 함께 싸울 수 있는 분들은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꺄아아악!"

"해적이다! 진짜 해적이야!"

뭐지?

갑자기 배 위에 난리가 났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울고불고하며 선실로 대피하는 중이다.

선원들과 일부 남성들은 서둘러 병장기를 손에 쥐며 저 먼바다를 보고 있다.

보통 통행세 내면 곱게 보내 주지 않나?

왜 이렇게까지 호들갑이야?

우리 애들도 급작스러운 변화에 백미호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상황을 파악 중이다.

그리고 그때, 선원 한 명이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혹시, 무림인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나서서 답했다.

"다행입니다.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해적이 빠른 속도로 오고 있습니다. 함께 싸워주십시오, 대협."

곧이어 나이가 많아 보이는 선장까지 우리 곁으로 다가왔고, 선원은 빠르게 우리가 무림인임을 알렸다.

"도와주십시오, 대협들. 이 배 위의 모든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부탁입니다."

난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장님, 보통 이런 경우 통행세를 내면 보내 주지 않습니까?"

늙은 선장은 울먹이기까지 하며 다급히 말했다.

"바다는 강과 다릅니다. 산과도 다르고요. 동정십팔채나 녹림삼십육채라면 당연히 그러겠죠. 하지만 해적들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늘어난 왜(倭)의 해적들이 중원의 앞바다까지 점령하며 활개 치는 바람에, 자신의 영역을 잃은 해적들이 살육과 약탈을 잔인하게 벌이고 있습니다."

"아직 이곳은 고려의 바다 아닙니까?"

무슨 생각일까?

늙은 선장은 어쩌면 자신이 죽은 목숨이라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자신의 배에 탄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자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고려에서는 해적을 소탕하는 데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해적들도 함부로 활개를 치지 못합니다. 다만, 중원에서 그 영역을 빼앗긴 해적들이 가끔 이렇게 나타나는데, 그 영역을 잃은 분풀이라도 하듯 더욱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습니다."

힘겹게 말을 하면서도, 늙은 선장의 눈물은 굵은 물줄기가 되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배 위는 여전히 아수라장이고, 사람들 역시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이들을 통솔해야 할 늙은 선장이 이 모양이니, 사람들이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우선 선장부터 안정시켜야 했다.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 친구가 수룡검 천무휘입니다."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차고 넘쳤다.

"허거거거거걱!"

조금 전까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대던 늙은 선장.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 그치는가 싶더니, 천무휘를 바라보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버렸다.

곧이어 옆에 있던 젊은 선원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수룡검이다! 수룡검 천무휘 대협께서 우리 배에 타고 계신다!"

"와아아아아아!"

"살았다! 와아아아!"

부럽다, 천무휘.

선실로 피해야 할지, 함께 싸워야 할지 눈치만 보던 겁쟁이 장정 몇몇까지 당당하게 무기를 하나씩 집어 들고는 환호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늙은 선장의 멈추었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천 대협…… 흑흑. 하늘이, 이 늙은이의 목숨을 조금 더 늘려 주시려고 천 대협을 이 배에 태워 주셨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흑흑."

천무휘의 손까지 꼭 잡고 흐느끼는 늙은 선장이었다.

"우선, 상황을 보죠."

내가 해적이 다가오는 방향을 보며 말했고, 곧 모두의 시선이 해적선을 향했다.

해적선은 한 척이다.

해적의 수는 사십 명가량.

오십 장 거리에서 무지막지한 속도로 우리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고수는…… 없다.

"천 형."

"네, 마 형."

"함께 가시죠."

"네."

"의제, 한 형."

"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곳에서 사람들을 지켜주세요."

"넵!"

그때 늙은 선장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직접 가실 거면, 급히 구명정을 내리도록 하겠……."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의제가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아 뒤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천무휘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헙!"

"꺄악!"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나와 천무휘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란 소리를 터뜨렸다.

하지만.

등평도수(登萍渡水, 물 위를 달리는 신법).

거친 바다의 파도 때문에 쉽지는 않았지만, 불가하지도 않았다.

나와 천무휘는 엄청난 속도로 해적선을 향해 달렸다.

쾅!

석 장 높이의 해적선 위에 나와 천무휘가 뛰어들었다.

역시나, 고수는 없다.

나와 천무휘가 바다를 밟고 달릴 때부터, 그 보고도 믿기 힘든 기사에 이미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간 해적들이다.

결국 우리가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얼음이 되어 버렸다.

사실 해적선 위로 올라오기 전,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짧은 시간 엄청난 고민을 했다.

그런데, 휴우.

답은 나왔다.

커다란 통에 사지가 잘린 시체들이 마치 푸줏간의 고기처럼 아무렇게나 쑤셔박혀 있었다.

해적들도 피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고, 한쪽 구석엔…… 젊은 여인들이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몰골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천 형, 구명정을 내리고 저 여인들을……."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천무휘의 음색도 좋지 않았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활화산같이 터지려는 분노를 참고 있는 중인 것이다.

난 해적선의 선장으로 보이는 자와 또 다른 해적들까지 눈빛으로 제압했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덜덜 떨기만 했다.

그사이, 천무휘가 해적 둘을 위협해 해적선에 달린 구명정 한 척을 바다로 내렸다.

곧, 열한 명의 젊고 어린 여인들이 구명정 위에 올라 천무휘와 함께 우리 여객선으로 출발했다.

"대…… 대협, 저희가…… 저희가 눈이 멀어…… 살려 주십시오!"

해적 선장이 가장 먼저 갑판에 머리를 박으며 오체투지를 했고, 나머지 해적들이 선장을 따라 나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용서는 없다.

"지옥에 가서 그리 말해라."

오른발을 들어, 힘차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쿠쿠쿠쿠쿠쿠쿠쿠쿵.

쿠지지지지지지지직.

기이한 소리.

곧, 배가 두 동강이 나서 바다에 가라앉았다.

"끄아아아아악!"

"살려 줘! 으아아아악!"

난 부서진 해적선 파편 위에 몸을 싣고, 기감을 최대로 펼쳤다.

바다 깊은 곳까지, 내 기운이 닿을 수 있는 곳은 모두 감지하였다.

마지막 해적까지 그렇게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바다를 달려 우리 여객선으로 돌아왔다.

나와 천무휘에 의해 구조된 여인들은 가장 큰 선실로 이동해 안정을 취하는 중이었다.

배에 탔던 여성 승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준 옷을 입고, 또한 그들의 위로와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그들은 무릎으로 기어 내 앞에 다가와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대협."

"엉엉엉,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눈물이, 내 마음을 울렸다.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한 제사…… 준비하겠습니다."

산 사람은 열한 명.

그들과 함께 해적을 만났던 가족과 친구, 동료 모두 죽었다.

나는 선장과 승객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제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다해 바다 위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날의 제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고, 배 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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