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광마일기>>
(상략)
"주, 주군! 신(臣) 달호가 주군을…… 꿀꺽. 처음 뵙습니다."
"주군?"
"앗! 죄, 죄송합니다."
나를 보자마자 오체투지를 한 달호라는 자다.
덜덜 떨고 말까지 더듬는다.
"처선…… 처선 선생이 보내어 왔습니다."
"음, 그렇군. 무슨 일이지?"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달호가 덜덜 떨며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는 처선의 서신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내가 이 녀석한테 존대를 했었는지, 반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무튼 달호 녀석이 이날 왜 이렇게 덜덜 떨었는지는,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 명성, 그러니까 나와 의제의 사악한 마두라는 악명이 중원 천하에 진동하던 중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일단 서신부터 읽었다.
(중략)
주군을 쫓는 데 실패한 화산, 제갈, 무당, 귀주 무림의 추격대는 현재 그 가야 할 방향을 완전히 상실하여 지리멸렬(支離滅裂,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과 칠령팔락(七零八落, 사물이 서로 연락되지 못하고 고르지도 못하며 제각각 뿔뿔이 흩어짐)의 상태입니다.
지금입니다.
돌아오십시오.
돌아와 주군의 위대함으로 만천하를 진동케 하십시오.
천하 곳곳에 은거해 있는 뛰어난 고수와 인재들이 주군의 위대한 행보를 지켜볼 것입니다.
-처선
(하략)
* * *
이제 스물세 살이다.
"으아아아아!"
"살려 줘!"
"어흐으으응!"
저쪽에선 여전히 우리 애들이 산군에게 두들겨 맞으며 벼랑 끝 수련을 이어 가고 있다.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난 기감을 최대한 멀리까지 뻗어 녀석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 왔다!
곧바로 몸을 날렸다.
* * *
척!
"허걱!"
갑작스레 등장한 내 모습에 달호가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누구냐? 무슨 일로 사냥꾼이나 약초꾼조차 오르지 않는 백두산의 이 깊은 곳까지 왔느냐?"
"혹, 혹시…… 꿀꺽. 주군이십니까?"
"주군?"
"마악치 도사님…… 맞으십니까?"
"내가 마악치가 맞긴 한데."
쿵.
나를 확인한 달호가 곧바로 오체투지를 했다.
역시나 덜덜 떤다.
하지만 그 느낌이 광마일기에 적힌 것과 다르다.
감격에 겨운 떨림이었다.
아! 이 기분도 색다르다.
마두로 악명을 떨쳤을 때의 만남과 지금의 만남.
"신, 달호라고 합니다. 처호, 처선 선생의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수고했다, 달호."
"감사합니다, 주군."
쿵.
바닥에 이마까지 찧는 달호다.
"달호야."
"넵! 주군."
"너 사파 출신이냐?"
"엇? 그, 그게…… 넵! 맞습니다."
"그래도 떳떳한 무인이 되고 싶어 날 주군으로 삼겠다는 것이겠지?"
"넵!"
"그럼 그거 하지 마."
"네? 앗! 죄송합니다. 제가 우둔하여 주군의 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머리 박는 거. 그거 막 마교나 사파에서도 질 나쁜 애들이나 하는 거잖아. 그런데 우린 그런 거 아니고. 안 그래?"
"앗! 넵! 존명!"
이 녀석, 대답을 그리하고는 곧바로 다시 바닥에 머리를 찧으려 했다.
막 이마가 땅바닥에 닿으려고 할 때, 아차 싶었는지 동작을 멈추고 슬금슬금 땅에서 이마를 떼었다.
"그래, 서신."
"넵!"
달호가 서신을 두 손으로 공손히 내게 건넸다.
처호의 서신이다.
(상략)
주군의 천하삼분지계를 완성할 기반이 닦여 잡혀 가고 있습니다.
감히 고려로 가신 주군의 뜻을 제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냐 만은, 지금이 적기라 할 수 있습니다.
중원으로 돌아와 주군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떨치십시오.
천하 곳곳에 은거해 있는 뛰어난 고수와 인재들이 주군의 위대한 행보를 지켜볼 것입니다.
-처호
지금이다.
중원으로 돌아갈 때다.
* * *
천무휘는 완연한 초절정에 일 갑자 사십 년 치를 조금 넘는 내공을 보유하게 됐다.
의제와 한해북은 절정 초입에 일 갑자가 조금 넘는 내공을 얻게 되었다.
나는, 푸하하하하하하!
원래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만년산삼 반쪽 덕분에 일 갑자의 내공이 더해져 삼 갑자가 넘는 내공을 보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백두신령이 선물까지 따로 줬다.
금제의 실 한 가닥을 끊으며 동시에 백두산의 정기까지 내 몸에 주입해 준 것이다.
추가로 일 갑자가 더 생겼다.
이로써 나는 초절정의 반열에 오름은 물론, 사 갑자가 넘는 내공을 보유하게 됐다.
사 갑자의 초절정 고수다.
"중원 사람인데 우리 고려 말을 유창하게 하니 특별히 좋은 산삼으로 드리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내 중원으로 돌아가 고려 산삼과 고려인들의 후한 인심을 많이 자랑하겠소."
"그럼 편안한 여정 되십시오, 공자님."
백두산 인근의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에 들렸다.
한해북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산삼 세 뿌리를 샀다.
육백 년 된 산삼 한 뿌리와 나머지 두 뿌리는 일백 년이 조금 넘는 작은 산삼이다.
그렇게 총 세 뿌리.
그가 산삼을 산 이유는 이러했다.
달호가 내게 처호의 서신을 전했던 그날 밤.
난 우리 녀석들을 불러 처호의 서신을 보여 줌과 동시에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알렸다.
그때 한해북이 조심스레 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마 형, 저는 잠시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합류하겠습니다."
"고향이요? 복건 삼명 말이죠?"
"네. 맞습니다."
"갑자기 고향은 왜요?"
"아버지께서 곧 지천명(知天命, 50세)의 생신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당연히 다녀와야죠. 그런데 한 형."
"네, 마 형."
"같이 갑시다."
"네? 마 형은 할 일이 많잖아요? 가서 마두나 악적들을 소탕하고 명성을 쌓을 시간도 부족할 텐데, 한가하게 저희 아버지 생신에 가겠다니요?"
"어차피 중원으로 돌아가려면 육로로 가는 것보다 배를 타고 가는 게 더 빠르잖아요. 뱃길이 산동, 강소, 절강, 복건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데, 복건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인사나 하는 거죠."
"아……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하하. 백두산에서 다들 고생도 많이 했는데, 한 형 집에서 며칠 좀 푹 쉬고 싶기도 하고요."
"나도 찬성!"
의제다.
손까지 번쩍 들며 찬성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한 형. 정말 호랑이에 호 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습니다. 휴식이…… 간절히 필요해요. 며칠 신세 좀 집시다, 한 형."
"하! 그렇긴 하죠. 저도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요, 그럼. 다들 우리 집으로 가요. 부모님께서 맛있는 것도 많이 해 주실 거예요."
그렇게 한해북의 집으로 가는 것이 결정됐다.
사실, 처호의 서신도 그렇고 광천마제 시절 처선의 서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원으로 돌아가 활약하라고 했지, 어디로 가서 어떤 활약을 하라는 말은 없었다.
둘 다 나를 믿고 맡기는 것이다.
문제는, 사실 이걸 문제라 할 것도 없지만.
광마일기에도 거의 일 년 동안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싸우고 무얼 했는지에 관한 기록이 미비하다.
아니, 거의 없다.
단 몇 줄.
‘천하를 종횡하며 미친 듯 싸웠다.’
‘내 앞길을 막는 것이 있다면, 모두 베어 버렸다.’
‘나에게 칼을 겨누고 살아남은 놈은 한 명도 없었다.’
‘나와 의제는 매일 피로 목욕을 했다.’
대충 이런 글귀만 기록되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실치 않은 상황.
내가 가는 길이 곧 나의 길인 것이다.
뭐, 솔직히 말하면 전혀 꿍꿍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궁금했다.
한해북 이 녀석의 정체가 말이다.
문, 무, 서, 예, 음, 기관, 진식 등등등.
아니, 집이 얼마나 잘 살면 이런 것들을 다 가르쳐 주냔 말이다.
사막에서 천수신권의 동생 원곡을 고문할 때 기억하는가?
그때 내심 한해북이 고문에도 일가견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때 이 녀석이 부끄러운 듯 내게 이런 귓속말을 했었다.
‘제가 사실…… 곱게 자라서요.’
이러면서 고문은 못 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이 녀석 집안이 도대체 뭐 하는 집안이고, 또 그 집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학사의 집안?
대상인(大商人)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니면 숨은 고수의 아들?
그도 아니면 그냥 지방의 부호?
뭐, 추측은 여러 가지였으나 결론은 한 가지.
이 녀석네 집에 가면, 진짜 며칠만이라도 황제 부럽지 않게 실컷 먹고 마시고 신나게 쉴 수 있을 거란 거다.
그래서 이 녀석네 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런 심정은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의제와 천무휘 녀석까지, 은연중 기대가 아주 만발해 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이 녀석이 가진 돈이 의제와는 비교도 안 되고, 나보다도 훨씬 적다는 점이다.
산삼도 더 좋은 게 분명 있었는데도, 딱 세 뿌리.
그것도 육백 년 근 한 뿌리와 백 년 근 두 뿌리만 샀다.
아버지의 오십 세 생신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이 녀석, 저 나이에 가출이란 걸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돈이 없는 것일 수 있다.
혹시 만약에 이 녀석이 서자(庶子)라면 그 집에서 상황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그도 아니면 무슨 무슨 세가의 철부지 막내 공자?
큭큭큭.
내가 무림 영웅전을 너무 봤나?
어찌 됐건, 너무 궁금하다.
한해북 이 녀석의 정체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의 공자인지.
* * *
배를 타기 위해서는 고려에서도 남쪽으로 한참이나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고려의 미추홀(彌鄒忽, 인천)이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추홀 항구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수백 척의 상선과 중원과 고려를 오가는 양국의 상인들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리고 분명, 상선이 아닌 여객선 또한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복건으로 직행하는 배를 잡을 수 있었다.
미추홀에서 복건까지 가는 데에만 기후에 따라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한 달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복건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 * *
-형님, 큭큭큭. 아! 우리 첫사랑 생각납니다.
-이 녀석이 뜬금없이 금 소저 얘기는 왜 해? 보고 싶어지잖아.
-뜬금없다뇨. 형님도 보셨잖아요. 저기, 저 여자. 남장 여인이에요. 우리 금 소저도 처음 봤을 때 남장 여인이었잖아요.
-그렇지. 보고 싶다, 우리 금 소저.
-저도요. 근데 형님. 저 남장 여인은 얼굴을 아예 복면으로 가려 버렸네요? 눈만 보여요.
-그러게.
-둘 중 하나겠죠?
-뭐가?
-무지막지하게 예쁘거나, 그 반대거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요, 형님.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 첫사랑만큼 예쁜 남장 여인은 본 적이 없답니다.
-나도.
천무휘하고 한해북 말이다.
이 녀석들 나와 의제 옆에 나란히 서서, 아닌 척하면서 슬쩍슬쩍 남장 여인을 훔쳐보고 있다.
이 녀석들도 그리운 거다.
우리들의 첫사랑이.
예지는 잘 살고 있겠지?
뭐, 우리 사부랑 함께 있는데 잘살지 못할 리가 없겠지.
그나저나 상인 같아 보이는데, 그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다.
남장 여인 한 명만이 아니다.
남장 여인 주변에 네 명의 사내가 더 있다.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눈빛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무공 경지를 가늠할 수 없다.
아니, 조금도 그들이 무공을 익혔음을 감지할 수 없다.
고려인들인가?
고려의 무공을 익혔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래도 무공을 익혔다면, 내 눈과 기감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만약, 네 명 모두 화경 급의 고수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건 더 말이 안 되고.
남장 여인까지 포함 총 다섯 명인데, 다섯 명 모두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아니, 그냥 범상치 않은 자들이라는 것만을 기운이 아닌 본능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뭘까?
저들은 누구지?
그리고 그때.
이미 저들 역시 우리를 의식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장 여인이 이렇게 대놓고 우리를 향해 다가올 줄은 몰랐다.
우리 넷이 계속 쳐다봐 기분이 나빴나 보다.
-형님, 우리 좆 된 것 같은데요?
-아이! 그러게 적당히 좀 쳐다보지 그랬어요, 곽 형!
-한 형! 뚫어져라 쳐다본 건 한 형하고 천 형이에요. 왜 저한테 그래요?
-전 아닙니다. 이래 봬도 제가 수룡검인데, 한낱 남장 여인을 훔쳐보겠습니까?
-우리 천 형이 점점 이상해져 가는 거 같아. 갈수록 얼굴이 철면피가 돼간다니까.
-다들 그만! 왔다. 다들 모른 척 오리발 내밀고, 그래도 안 되면 두 손이 발이 될 때까지 싹싹 빌자고.
-넵!
"저…… 실례하겠습니다. 앗! 죄송해요."
우리에게 다가온 남장 여인.
면사도 아닌 복면으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렸다.
그러다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그 모습이 자칫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벗었다.
그리고 보았다.
나를 미친놈이라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천하제일미인이다.
설민민이 이십 대 전후의 나이였으면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하게!
진실로!
지금 우리 앞에서 복면을 벗은 이 여인은!
우리가 지난해 보았던 마흔두 살의 설민민보다 훨씬! 훨씬! 아주 훨씬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