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계요(鷄妖), 닭요괴입니다."
"요괴라. 그것도 닭요괴라. 무엇이 문제더냐?"
"현재 십사 갑자 반의 내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백두신령은 십사 갑자 반의 내공이란 말에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눈조차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담담한 얼굴이다.
왜지?
"어쩌면 빠르게, 정말 빠르게 이십 갑자 또 삼십 갑자의 내공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내공을 요공으로 바꿔 요술로도 사용 가능하고요."
"음…… 그렇구나."
역시 담담한 얼굴이다.
아니, 조금 전 천무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무료하기까지 한 얼굴을 하고 있다.
뭘까?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털어놓고 있는 내 심장도 두근거리는데, 어찌 조금도 놀라지 않는 것이지?
고려의 일이 아니라 중원의 일이라 그런 것일까?
"그 요괴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중원을 장악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사악하고 영약한 요괴라, 그 요괴를 막고 싶습니다."
"막으면 되지 않느냐?"
"그게…… 제 힘이 그 요괴에 미치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
이젠 웃는다.
나를 보며 백두신령이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의 얼굴로 그렇게 웃었다.
아! 난 내 인생을 걸고 계효보와 싸우고 있는데.
조금은 실망이었다.
"악치야."
"네, 백두신령님."
"으아아아아아악!"
퍽퍽퍽!
"살려 줘! 으아아악!"
"하나, 둘, 셋 하면 도망…… 으아아악!"
"어흐으으으응!"
저 멀리에선 산군이 우리 세 녀석을 두들겨 패는 소리와 우리 녀석들의 비명이 계속해서 들려 오고 있다.
하지만 백두신령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면, 그 요괴를 이곳까지만 데리고 오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려오기만 하면 내가 나서기도 전에 산군이 한입에 꿀꺽해 버릴 테다."
뭐가 이렇게 간단해?
"십 갑자나 이십 갑자가 아니라, 이백 갑자의 요괴라도 이곳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바로 소멸시켜 버릴 수 있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아니다.
백두신령은 웃고 있지만, 진지하다.
"우리 고려의 산신령들은 모두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백두산에선 내가, 금강산에선 금강신령이, 또 한라산과 수많은 산들마다 산신령이 존재하고,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악귀와 마귀, 요괴와 잡귀들을 잡아 무고한 백성을 해치지 못하게 한단다."
"아…… 그런 일을 하시는 거군요. 혹시…… 지금 백두산 근처에 요괴가 있나요? 십사 갑자 반의 내공이나 요공을 지닌 닭요괴요."
"없다."
"……."
"의심하지 말거라. 확실히 없으니. 백두산 근방 일천 리 안에 백성에게 해악을 가할 힘을 지닌 요괴 따위는 없단다."
"아, 네. 넵."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나와 산군은 백두산 인근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더더군다나 중원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느니라. 단, 네가 말하는 요괴가 중원의 요괴라 하더라도, 일단 백두산의 힘이 미치는 곳에 침입하게 되면 우리의 일이 된다. 그때는 나나 산군이 소멸시켜 버릴 테다."
백두신령이 이에 관해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백두산을 떠날 수 없는 게 아니라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는, 역시나 그가 백두산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 했다.
고려에서도 백두산은 가장 중요한 산으로, 고려의 다른 산신령과 다르게 특히나 백두신령은 백두산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했다.
또 중원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은, 당연하게도 중원은 중원의 힘이 이를 지켜야 하고, 고려의 산신령이 중원의 일에 관여하게 된다면 중원의 신선들과 충돌하게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모두 이치에 맞는 말이었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설명이 이어진 후, 백두신령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악치야."
"네, 백두신령님."
"어찌하여 이 일을 사부와 상의하지 않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더냐?"
"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허허, 허허허."
백두신령이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한 상태로, 없는 턱수염까지 쓸어내리며 웃었다.
"아직 수양이 많이 부족하구나."
"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내가 이곳에서 악귀들과 싸우고 있다면, 중원에는 신선들이 있지 않겠느냐?"
"신선이 정말 있어요?"
"있지."
"그럼 신선들이 요괴도 잡나요?"
"안 잡더라."
이 인간!
아니, 이 산신령!
진짜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건가?
놀리는 거야?
"대신 현화문이 있지 않으냐? 네 사문 말이다. 네 사문 말고도 여러 곳에서 신선들이 남긴 심득을 통해 수양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악귀와 요괴들을 물리쳐 왔단다. 그중 으뜸이 바로 너의 사문인 현화문이고."
"저의 사문이요?"
"허허허, 네 사조들이 악귀와 싸우고 요괴를 잡았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더냐?"
있다.
분명 있다.
모두 허무맹랑한 소리인…… 하아!
내가 지금 요괴와 싸우고 있으면서, 사조들이 요괴와 싸웠다는 기록을 믿지 않았다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변명일지 몰라도, 그 기록은 정말 아주 적은 분량이다.
다 합쳐도 몇 줄이 채 되지 않는다.
"아마 너의 사조들이라면 그 기록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을 테다. 왜냐하면 딱히 그런 기록을 남겼다 하여도, 글을 통해 이를 깨칠 수 없고, 수양을 깊이 쌓아 그 경지에 이르러야 깨닫고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뭐야?
정말 내가 도를 제대로 닦지 않아서 요괴를 상대할 힘이 없다는 말인가?
"내가 본 너의 사조들은 한결같았다. 요괴나 악귀와의 싸움에는 별다른 의미조차 부여하지 않았지. 오로지 참선을 하는 것에 모든 정신을 쏟는 이들이었다. 아마 현화문에 그 기록이 많지 않다면, 모두 그러한 것에서 비롯된 일일 테다. 다만."
"…….?"
"다만 네가 너의 사조들의 뒤를 제대로 밟아 간다면, 응당 그들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하여도 깨닫게 될 것이다. 네 사부 유현처럼 말이다."
"저의 사부님이…… 정말 그런가요? 당장 십사 갑자의 내공과 요공을 지닌 요괴를 물리칠 정도로 강해요?"
"허허, 이 녀석. 정말 현화문의 제자가 맞는 것이냐? 내가 지금껏 봐 왔던 현화문의 제자 중 가장 한심한 녀석이구나, 어허허."
아! 이건 욕이지?
욕인데 부정할 수 없다.
갑자기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진다.
"요괴, 마귀, 악귀 이런 것들이 이 시대에만 있는 게 아니다. 너만 겪고 너만 싸웠던 게 아니란 말이다. 앞서 말했듯, 네 사조들은 수없이 많은 요괴와 마귀 그리고 악귀들을 물리쳤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다. 삼백 년 전, 천뢰무신 곽청이란 자는 지옥에서 온 마왕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 이야기…… 어렸을 적 들어 보긴 했는데. 그냥 이야기 아닌가요? 마왕이라니요."
"진짜다. 내가 당시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다."
혼란스럽다.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천뢰무신 곽청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긴 했다.
정말 많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천뢰무신 곽청 이야기는 진짜 말이 안 된다.
심지어.
"저…… 백두신령님. 근데요. 서역에서 온 무슨 파란색 요정이 곽청 대협을 도와서 마왕과 함께 싸웠다고 하던데. 무슨 램프의 요정이라고 했나? 그것까지 믿어야 해요?"
"허허! 허허허허!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니까. 산군도 같이 갔었고, 이 녀석아."
아! 혼란스럽다.
램프의 요정이라니!
"그렇게 혼란한 얼굴 할 필요 없다. 네 사부에게 물어보면 그 답을 정확히 들을 수 있을 테다. 현화문은, 고작 십 갑자니 이십 갑자니 하는 요괴 따위를 두고 두려워한 제자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너를 제외한다면 말이지."
"네. 네, 알겠습니다."
부끄러웠다.
또 충격이기도 했다.
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리 사부.
사부가 대단하고 또 대단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는 사실을 또 깨달았다.
아니, 내가 한심한 건가?
정답은 무공이 아닌 참선에 있었던 거야?
아니다.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계효보 녀석은 다른 요괴들과 다르다.
요술이 아닌 무공에 눈을 뜬 요괴다.
뭐, 그것도 우리 사부가 다 해치울 수 있다는 말이겠지?
정말 안 되겠으면, 어떻게든 유인해서 백두산으로 데려오면 될 테고.
하!
나도 한심하긴 한데.
닭대가리가 더 한심하다.
모르긴 몰라도, 닭대가리 이 녀석 말이다.
혼자 신나서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을 텐데.
하하하!
역시 그것이 닭의 한계인가 보다.
그러니 요계에 있을 때도 왕따나 당했던 거겠지.
내가 지금까지 닭대가리를 너무 높이 평가했었나 보다.
백두신령 덕에, 앞이 보이지 않고 까맣기만 했던 길이, 환하게 밝아진 느낌이다.
난, 내가 할 일만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된다.
끔찍하고 지독했던 내 광천마제 시절의 업보.
그것을 씻어야 한다.
"이제 뭔가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된 모양이구나?"
"감사합니다, 백두신령님. 덕분에 엉킨 실타래같이 복잡했던 머리가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광천마제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백두신령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줘야겠구나."
선물?
이미 줬잖아.
방금 내게 해 준 말이 얼마나 나에게 큰 선물인데, 또 뭘 주시겠다고?
뭐, 주신다면 수양이 부족한 도사인 나는 넙죽 받겠지만.
혹시 만년산삼 한 뿌리 더 주시려나?
우리 애들 고생한 거 수고했다고 뭐 좀 주고 싶은데.
난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기대 가득한 얼굴로 백두신령을 바라보았다.
백두신령이 살짝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는다.
내 표정이 웃겼나 보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이 됐다.
"궁금하더냐?"
"그게…… 아니긴 한데.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아 염치도 없고. 그러면서도 솔직히 기대도 됩니다. 백두신령님께서 워낙 뛰어난 산신령님이셔야죠. 하하."
"풋, 하하. 네 금제의 한 가닥을 끊어 주겠다. 그 이상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힘들다."
"금…… 금제요?"
이 양반 뭐야?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두신령이 말하는 금제란 게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리 봐도 보통의 힘이 아닌데. 허허. 네가 말한 요괴 따위가 할 수 있는 짓은 아니고. 그 힘에서 사악함도 분명 느껴지지만, 그보다는 장중하면서도 거룩한 힘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구나. 이건 필시…… 하늘의 힘인데, 음……."
억겁의 굴레가 섞여 있지만,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추혼책과 각혼필.
옥황상제와 용인 그리고 용의 힘이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제 몸에 걸려 있는 미지의 힘이 무엇인지요."
"말하지 마라."
"네?"
"말하면 안 된다. 그게 맞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스스로 풀어야 하는 힘이고. 또한 만약 정말 하늘의 힘이 실려 있다면, 그건 천기니라. 아무리 내가 산신령이라도 인세에 머무는 존재. 천기를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된다."
"아……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딱 한 가닥의 실을 끊는 것뿐이다."
"실요?"
"그렇다. 네 영혼을 겹겹으로 옭아매고 있는 금제의 실 중 한 가닥."
"그것을 끊으면 어떻게 되나요?"
"네가 지금 지니고 있는 어마어마한 힘 중의 일부.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지금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나요?"
"몰랐느냐?"
아!
진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조금 전 말끔하게 정리됐던 머리가, 다시금 복잡해졌다.
"네 신체, 네 정신, 네 영혼까지. 넌 이미 초인의 경지에 들어서 있단다. 다만, 네 몸을 감싸고 있는 하늘의 금제가 그 힘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지."
현경.
회귀를 반복하며 얻은 무학과 깨달음.
그리고 추혼책과 각혼필의 힘.
백두신령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억제하고 있는 금제의 실을 끊어 준다고 하였다.
설마…… 곧바로 현경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초절정이다.
백두산에서 나는 초절정의 벽을 깼고, 일 갑자가 넘는 내공을 얻었다.
"그리해 주셔도 되나요? 하늘의 금제에 간섭하는 일이잖아요."
"괜찮다. 이것이 너와 나의 인연으로 이어졌기에, 내가 그리할 수 있는 것이니라."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래, 잠시 아프더라도 참거라."
"네, 백두신령님."
곧, 백두신령의 작은 손이 내 머리 위에 닿았다.
느낄 수 있었다.
수천만 년 동안 축적된 백두산의 정기가, 그 작은 손을 통해 나의 백회혈을 통해 쏟아지고 있음을.
그리고 곧.
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두신령이 말한 그 금제의 실이 끊기는 소리였다.
백두신령은 그제야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내 머리 위에서 손을 떼었다.
하지만 난 움직일 수 없었다.
백두산의 어마어마한 정기가 여전히 내 몸속에 남아 있었다.
또 단숨에 내 것이 된 초절정의 경지가 실로 엄청났다.
백두산의 정기를 내 단전으로 갈무리하고, 갑작스레 오른 초절정의 경지에 적응해야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튼 상태로, 무려 사흘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네 마리의 커다란 호랑이가 마치 나의 호법이라도 서 주듯 그렇게 내 주위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