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광마일기>>
(상략)
"네놈들은 누구냐?"
"자! 장난감 활을 들고 있는 꼬맹이 녀석아, 잘 들어라. 이 몸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중원 무림 최고의 사내대장부 곽우적 대협이라 하신다. 그리고 내 옆에 계신 이분! 나의 형님이시다!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의 전인이신 현화문의 마악치 대도사님! 크하하! 알았으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 엄마 젖이나 더 먹어라! 장난감 활은 그만 쏘고, 크하하하!"
"음…… 너희 둘, 고생 좀 해야겠다."
활을 든 소년은 그 말만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와 의제는 그런 소년을 한참이나 비웃어 줬다.
(중략)
이 빌어먹을 호랑이 새끼들!
일부러 우릴 가지고 노는 게 맞다.
나와 의제가 만년산삼을 복용하고, 번갈아 운기조식할 때는 일부러 나타나지 않았다.
우릴 죽일 생각이 아닌 것이다.
그러다 운기조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나타나 우릴 죽일 듯 때리기 시작했다.
밤에는 활을 든 소년도 나타나 우릴 괴롭혔다.
활을 든 소년을 잡는 건 바람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가능했다.
그러면서도 이것들, 우리가 죽기 직전까지 몰리면 또 쉴 시간을 줬다.
일부러 그렇게 틈을 준 거다.
나와 의제를 더 오랫동안 괴롭히며 가지고 놀려고 말이다.
덕분에 나와 의제는 그 짬짬의 틈을 타 만년산삼의 기운을 모조리 내공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중략)
산군이라 했다.
보고 있었지만, 거짓말 같았다.
믿을 수 없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때 내가 봤던 산군이 실제였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고려 백두산의 산군은, 그야말로 전설 속에서 용과 천일 밤낮을 싸웠다는 반신반호(半神半虎)에 가까운 영물의 왕이었다.
(중략)
활을 쏜 소년.
믿을 수 없는 축지법이라는 신법을 쓰고, 산군과 친구처럼 지내고, 심지어는 산군을 말처럼 타고 백두산을 뛰어다니는 소년.
그의 정체는 바로, 백두산의 산신령(山神靈)이었다.
백두신령(白頭神靈)이라 했다.
"신령님, 보통 신선이나 산신령하면 긴 백발의 백염을 생각하는데, 어찌 소년의 모습을 하고 계신 건가요?"
"식상하잖아. 심심하기도 했고. 너희 두 녀석 골려 주는 맛도 쏠쏠했다, 허허."
"처음부터 저를 알고 계셨던 건가요?"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러니까 네 의제 녀석과 네가 여기서 만년산삼을 캤던 날 말이다."
"아! 그날은 정말 죄송합니다, 신령님. 다시금 사과드립니다."
"허허, 괜찮다. 괜찮아. 그것의 인연이 너희에게 닿았던 것이지. 아무튼 그날 네 의제 녀석이 이곳을 장백산이라고 말하던 걸, 네가 정색하며 백두산이라 정정해 주지 않았더냐?"
"아! 그걸 다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군요."
"그렇다. 웬 놈들인가 싶어서 몰래 보고 있었지. 보통 중원인들은 우리 백두산을 자기들 멋대로 장백산이라 부르지 않더냐."
"대부분은 그리 부르고 있지요."
"그래, 그런데 네가 그 이름을 백두산이라 말하는 걸 보고, 꽤 기특한 놈이라 생각했단다."
"저희 현화문의 사조님들께서 남기신 기록에 이에 관한 부분이 꽤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로 표기되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허허허, 그랬겠지. 그 친구들이라면 아마 그리했을 것이야."
"엇? 저희…… 현화문의 사조님을 알고 계신가요? 어느 분을 알고 계신 건가요?"
"네가 몇 대 제자라고 했지?"
"이십사 대 제자입니다."
"네 사부가 유현이지? 이십삼 대 문주."
"저희 사부님도 아세요?"
"젊었을 적 천하를 주유하다가 가끔 이곳에 들러 나에게 인사하고 가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첫날 네 의제 녀석이 그렇게 자랑하던 일백 년 전 현화검존 그 녀석도 많이 왔었고, 네 사문의 사조들과 나는 많은 교류를 했단다. 그게 몇 명인지는 손가락으로 다 세기도 힘들어."
"아…… 그, 그렇군요."
"그나저나 네 사부는 어찌 젊은 시절 그렇게 뻔질나게 이곳을 찾아오더니, 거의 이십 년 넘게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것이더냐? 벌써 우화등선을 했느냐?"
"그게…… 저 때문에 그랬습니다. 제게 참선의 길을 가르쳐 주느라, 이십 년간 하남 허창의 십간산 밖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최근……."
난 구산사괴에게 끔찍하게 죽임당한 사부에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내심, 백두신령이 구산사괴에게 복수할 수 있게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백두신령과 산군의 능력이라면, 구산사괴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중원 무림을 씹어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를 미친 듯 쫓는 추격대 문제도 해결하고 말이다.
하지만.
"악치야."
"네, 백두신령님."
"네 사부의 일은 심히 안타깝구나.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난 이곳 백두산을 떠날 수 없고, 떠나서도 안 된다. 더더욱 중원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단다."
"네, 네."
조금 많이 실망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만 한 게 아니다.
누가 뭐래도, 백두신령과 산군의 도움으로 나는 초절정의 벽을, 의제는 절정의 벽을 단기간에 깰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감사합니다. 저와 의제의 수련을 도와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합니다."
"허허허, 네가 비록 중원의 사람이나, 현화문과 나의 인연이 깊고 깊어 그저 작은 도움을 줬을 뿐이다. 너와 네 의제가 작정하고 수련하려는 것을 알고, 그저 작은 도움을 줬을 뿐이란다. 그리고 악치야."
"네, 백두신령님."
"너 자신을 믿거라. 네 사문과 사조들이 남긴 깊은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중략)
만약 그때, 백두산에서 백두신령과 산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와 의제는 그렇게 짧은 시일 내에 초절정과 절정의 벽을 깰 수 없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내가 광천마제는 물론 대마두라 불리기도 전에 적들의 칼에 난자당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을 의미한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 그 백두신령과 산군의 도움이, 나와 의제의 목숨을 수십 번이나 살린 결과가 된 것이다.
(중략)
나와 의제는 그날 이후에도 계속 산군의 앞발에 맞아 가며 수련을 이어 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우리가 수련을 하고 있는 백두산의 깊은 골짜기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처선이 보낸 자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오체투지 하며 ‘주군’이라 외쳤다.
(중략)
백두신령과 산군은 그날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대마두로 변해 버린 내 모습을 차마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없었다.
지금 처참한 이 상황, 백두산으로 도망가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럴 면목이 없다.
도저히, 악마가 되어 버리고 비참한 도망자 신세가 된 꼴로, 그들을 볼 자신이 없다.
또, 나로 인해 평온한 고려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해서도 안 된다.
마지막 양심이다.
아니, 변명이다.
사실…… 그곳까지 갈 힘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다.
(하략)
* * *
백두산으로 오기 전, 나는 광마일기의 이 부분을 몇 번이나 읽었다.
백두신령.
활을 쏘는 소년.
큭큭큭.
그는 내가 백두산 땅을 밟자마자 이를 감지했고, 내 몸속에 흐르는 현화문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거기에 백두산을 장백산이 아닌 백두산이라 부른 것은, 백두신령의 마음을 더 흡족하게 만들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의제 녀석이 실수로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잘해 주었다.
내가 일부러 정색까지 하며 의제에게 한마디 한 건, 당연히 백두신령이 이를 모두 지켜보고 있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랑이들과 백두신령이 왜 의제와 친구 녀석들은 괴롭히며 나는 공격하지 않았냐고?
당연히 내가 그리 부탁했기 때문이다.
나야, 아무리 죽어라 수련해도 무공이 늘지 않는다.
뭐 하러 개고생을 하겠나?
광마일기에도, 죽으면 죽었지 그 일은 절대 다시 못 하겠다고 적혀 있어서 겁도 났고 말이다.
그래서 백두산 첫날.
활을 쏘는 소년이 우리에게 한마디하고 물러설 때, 그때 내가 우리 애들 몰래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 * *
-잠시만요! 잠깐요!
저 멀리, 사라지던 백두신령의 걸음이 멈춘 게 느껴졌다.
-혹시 백두신령님 아니십니까?
-너…… 음…… 날 아느냐?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는 현화문의 이십사 대 제자 마악치라고 합니다. 사조들께서 남기신 책자에 백두신령님의 더없이 훌륭한 인품과 번천복지 할 능력까지 한가득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 조금 전…… 죄송합니다. 백두신령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허허허, 괜찮다. 내가 장난 좀 치려고 소년의 모습을 했으니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허허. 가만…… 이십사 대 제자면, 네 사부가 바로 유현 그 아이겠구나.
-네, 맞습니다.
-어찌 그 아이는 젊었을 적 걸핏하면 찾아와 참선에 관한 질문을 한가득하더니, 이십 년이 넘게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것이더냐? 혹시 벌써 우화등선이라도 한 것이더냐?
-그게…… 사연이 좀 깁니다. 괜찮으시면, 자리를 옮겨 따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해라. 내, 기운을 남길 테니, 쉽게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네, 백두신령님.
의제와 친구들에게 잠시 변을 보고 오겠다고 말한 후 곧바로 백두신령의 뒤를 따랐다.
그 기운은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해 쉬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백두신령을 만나게 됐다.
난 그에게 나의 광기에 얽힌 사연을 모두 말해 주었다.
"광기라…… 대단한 녀석을 몸에 지니고 있구나. 유현 그 아이가 꽤 고생했겠군, 허허허."
"네. 저 때문에 이십 년 넘게 하남 허창의 십간산 밖을 한 번도 나서지 못했으니까요."
"그래, 악치야. 이곳은 나를 보러 온 것이더냐?"
"아! 그게……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백두신령님께서 실존하시는 줄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허허, 그럴 만도 하지. 어디 신선이 진짜 있고, 산신령이 진짜 있다고 누가 그리 쉽게 믿을 수 있겠느냐.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와 친구들은 수련을 하러 왔습니다."
"수련?"
"네. 백두신령님께서 진짜 계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사조들께서 남기신 책자에 백두산의 기운을 찬양하는 글들이 정말 한가득 기록되어 있거든요."
"어허, 그랬었구나. 그럼 내가 작은 도움을 줘야겠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현화문의 제자가 친구들과 함께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백두신령님."
"그래, 악치야."
"저는 무공이 아닌 참선의 수양을 쌓으러 온 것이고. 제 친구들은 무공 수련을 하러 온 것입니다."
"음, 너는 무공에 관심이 없느냐? 한창의 나이에는 도를 닦는 것보다 무공에 더 관심이 많을 텐데."
"그게…… 아무래도 저는 무공보다는 도를 닦는 게 더 적성에 맞는 듯합니다."
"허허, 허허허! 누가 현화문의 도사 아니랄까 봐, 너의 사조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네게는 참선하기 가장 좋은, 우리 백두산에서도 그 영기가 가장 가득한 곳에서 조용히 참선할 수 있는 장소를 알려 주마. 그리고 너의 친구들 수련은 나와 산군 그리고 백두산 호랑이들이 좀 도와주겠다."
"백두신령님, 하아! 산군님도 실제 존재하는 건가요?"
"그럼, 허허허. 보고 싶더냐?"
"가능한가요?"
"허허허, 허허허. 이봐, 산군. 현화문에서 어린 도사가 왔네. 이리 와 인사 좀 하시게."
"크르르르르릉."
그렇게 산군까지 만나게 됐다.
난, 산군에게까지 공손히 인사하고 예의를 갖추었다.
그런 후.
"백두신령님,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탁?"
"네. 방금 말씀하신 친구들의 수련에 관해서요."
"그래, 어떻게 해 주면 되겠느냐?"
"좀…… 속성으로…… 하하. 제 친구들이 고통이나 뭐 이런 거 정말 잘 참거든요. 그러니 최대한 속성으로……."
"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많이 힘들 텐데?"
"제 친구 녀석들이 인내력 하나는 정말 최고입니다. 하나도 힘들어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아주 강하게, 아주 지독하게,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깨고 싶은 벽을 깨고 한 단계 위의 경지로 올라설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허허, 다른 이도 아니고 네 부탁인데, 그것이 무예 어렵겠느냐? 산군, 가능하지?"
"어흥."
이렇게 된 사연이다.
나만 빼고, 녀석들만 백두신령과 호랑이들에게 육 개월 동안 매일 싸우고 두들겨 맞고 쫓기며 지옥을 경험하게 된 이유 말이다.
* * *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렇게 혼자 실실 웃는 것이냐?"
"앗! 죄송합니다, 백두신령님. 잠깐 다른 생각을, 하하."
"그런데 저 친구 말이다. 잘생긴 녀석."
"네, 수룡검 천무휘요."
"허허, 저 녀석의 무재는 정말 가공하다 할 만할 정도구나. 이곳에서 일 년만 더 산군에게 지도를 받으면, 화경의 벽도 깨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그 벽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 백두신령님."
"응? 왜 그러느냐? 너도 화경의 벽을 깨고 싶더냐?"
"그게 아니라…… 한 가지 논의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데 너답지 않게 그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냐? 허허."
"요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