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98화 (98/245)

98화

하북으로 돌아왔다.

면사에 가렸지만, 설민민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우리는 설민민을 만났던 그 야산 부근에 있는 다른 산으로 향했다.

하빙천(夏氷川)이라 하여, 여름에도 그 냇가에 얼음이 언다는 산이었다.

설민민의 앞장서고,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 한참이나 하빙천이 흐르는 그 산을 올랐다.

그리고 높은 산의 중간 부분에 올랐을 때, 굉장한 광경을 자랑하는 폭포가 우리 눈에 들어왔다.

하빙폭포(夏氷瀑布)다.

아니,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폭포가 아니다.

그 폭포 아래 고여 흐르는 깊고 커다란 물속.

그 물속에 웃옷을 모두 벗은 상태로 몸을 담그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또 그 주변으로 그 사내를 호위하는 듯 지키고 서 있는 일백여 명의 고수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냥 그렇고 그런 고수가 아니다.

얼핏 보아도, 나와 천무휘가 전력을 다해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고수가 손가락으로 다 세지 못할 정도다.

뭘까?

이 어마어마한 고수들은.

아니, 그보다.

물속에 홀로 몸을 담그고 있는 사나이.

백옥과 같은 피부에, 유독 그 골격과 근육이 두드러져 보이는 미남이다.

그자가 설민민을 발견하고는, 이내 물속에서 나왔다.

여전히 웃옷을 훌러덩 벗은 상태였는데, 그가 가까이 올수록 그 하얀 피부와 엄청난 근육들에서 빛이 발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사람.

화경의 고수다.

그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설민민을 향해 말했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소?"

"고맙습니다, 궁주님. 이제 중원에는 그 어떤 미련도 남지 않았습니다."

"잘됐군요. 정말 잘됐습니다. 하하하. 그럼 나도 이제…… 설 여협을…… 부인이라 불러도 되겠소?"

조심스레 말하는 사내.

설민민은 사내의 말에 부끄러운 듯,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부인. 내…… 꼭 좋은 그대의 반려자가 되겠소."

물에 젖은 상체 그대로, 사내가 설민민을 살포시 안았다.

설민민도 그런 사내의 품에 자연스레 안기고 있었다.

잠시 후.

"궁주님."

"네, 부인."

"이분들이 저를 도와 이렇게 빨리 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사내가 품에서 설민민을 놓아주고 우리를 향했다.

여전히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우릴 보는 그였다.

"반갑소, 형제들. 난 북해빙궁의 궁주 한무기라 하오."

그럴 줄 알았다.

분명 알았는데, 그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해빙궁 사람 아니겠는가.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궁주다.

빙궁주.

"마악치라고 합니다."

"천무휘입니다."

"곽우적이라 합니다."

"한해북입니다."

우리가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네 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중원 무림의 미래가 우리 빙궁 못지않게 밝다는 것을 알겠소, 하하하."

빙궁주가 멋진 웃음을 크게 지어 보인 후, 뒤에 있는 수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옷을 입는 것이다.

"중원의 여름이 덥다는 건 알았지만, 하하! 정말 사람 환장하게 만들 정도로 덥군요. 하빙천이 없었다면, 정말 큰 고생을 했을지 모릅니다, 하하."

그가 옷을 다 입은 후 다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조금 전과 달리 매우 진중한 얼굴이었다.

"고맙소, 형제들. 부인이 자신의 일에 절대 관여하지 말라고 하여, 도움도 주지 못하고 몇 달 동안 이곳 하빙천에 몸만 담근 채 속만 계속 애만 태우고 있었소. 형제들 덕분에 나도 부인과 함께 빙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소."

그래서 그랬던 것이구나.

설민민에게서 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다니기만 했던 것.

또, 광천마제 시절 나와 설민민이 싸움을 벌였을 때, 이들이 자신의 목숨까지 도외시하며 도우려 나섰던 이유.

거기에 의제에게 잡혀 죽었던 자는 상황을 빙궁주에게 알리러 가던 길이었을 테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나저나,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정말 여러 번이나 죽을 뻔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적 할매 때도 그랬지만.

만약 내가 설민민을 죽인 사실을 빙궁주가 알게 됐더라면.

휴우. 이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화산, 제갈, 무당, 귀주 무림 등에 쫓기는 것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직면했을 테다.

아니, 빙궁주가 여기 있는 고수들과 작정하고 날 추적해 죽이려 했다면, 백 중 백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와! 갑자기 오한이 다 든다.

"형제들."

"네, 궁주님."

"이거 받으시오."

"이게…… 뭔가요?"

"한옥패(寒玉牌)라는 것이오. 우리 빙궁의 신물이자, 나의 최대 귀빈임을 증명하는 신패기도 하오. 혹시라도 우리 빙궁에 놀러 오게 된다면, 하하하. 좀 멀긴 하오, 많이, 하하. 놀러 오지 않더라도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한옥패와 함께 인편을 보내시오. 내 오늘의 도움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 형제들을 돕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이것을 드리겠소."

"저…… 궁주님."

"마 도사라고요?"

"네, 현화문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궁주님."

"말하시오, 마 도사."

"한옥패 대신…… 방금 말씀해 주신 내용, 혹시 글로 써 주실 순 없을까요?"

"글? 글로?"

"네. 여기…… 여기 책에다가, 이 붓으로…… 하하하."

"어려울 것 없지요."

죽었다 회귀하면 한옥패는 사라진다.

하지만 광마일기에 쓴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광마일기에 무당파의 무당대임서(武當代任書)에 이어, 북해빙궁의 한옥증보서(寒玉證保書)가 남겨지는 순간이었다.

뭐, 사실 다시 죽고 회귀하면 지금 이 순간을 또 겪기 때문에, 한옥패도 다시 받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않겠는가.

난 언제나 확실한 게 좋고 말이다.

어쨌거나 한옥보증서가 내 추혼책, 광마일기에 각인되었다.

그리도 두 사람.

북해빙궁주 한무기와 한때 중원의 천하제일미라 불렸던 설민민.

"부인, 이제 떠나도 되겠소?"

"네, 아무런 미련도 없어요. 떠나요, 여보."

두 사람은 그렇게 북해빙궁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설민민은 진심에서 우러나와 우리에게 감사하다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포옹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의제의 차례가 왔다.

"누님……."

"이제 누나라고 불러 줘, 동생."

"누나…… 흑흑."

"고마워, 동생."

둘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진짜 하나도 닮지 않은.

아니, 이건 숫제 미녀와 야수, 선녀와 악귀 뭐 이런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둘만큼은, 서로를 진짜 누이와 동생이라 보는 것같이 애틋했다.

됐다.

이렇게 헤어져도,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 것이다.

꼭, 그러고 싶다.

이건 내 간절한 소망이다.

* * *

"의제! 천 형! 한 형! 이것 보세요."

고려의 백두산에 왔다.

역시나 우리 녀석들은 왜 이곳에 왔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내 말에 따라, 그저 미친 듯 수련에 돌입했을 뿐이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본격적으로 수련에 임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내가 우리 녀석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들고 왔다.

"형, 형님, 그거…… 그거 그냥 봐도 엄청난데요?"

의제가 내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의제만 그런 게 아니다.

"마 형, 혹시 그거…… 꿀꺽. 그거…… 말로만 듣던 산삼 아닙니까? 그것도 그냥 산삼이 아니라…… 만년……산삼."

"헙!"

한해북의 목소리는 떨렸고, 만년산삼이란 소리를 들은 천무휘는 평소의 차분함마저 잊어버리고 헛바람까지 들이켜며 놀라고 말았다.

"하하하, 맞아요, 맞아. 천년도 아닌 만년산삼입니다, 하하하하하!"

광마일기에 그 위치가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흘이나 헤매다 찾아서 캘 수 있었다.

우리 녀석들 주려고, 내가 삼 일 동안 정말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혼자 다 하며 찾았다.

그래도 놀란 우리 녀석들 얼굴 보니, 삼 일 동안 고생했던 게 말끔히 씻기는 듯했다.

"형님! 형님! 크하하하하! 우리가! 크하하하하! 그 전설에서나 듣던 장백산 만년산삼을 캤어요! 푸하하하하!"

"의제!"

흥분의 도가니 속.

더없이 기뻐하는 의제를 향해 내가 호통을 쳤다.

나의 느닷없는 호통에 의제는 물론, 천무휘와 한해북까지 놀란 얼굴을 했다.

난 숨을 고른 후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타이르듯 의제에게 말했다.

"이산은 우리 중원의 산도 아닌 고려인들의 산이야. 그것도 고려인들에게는 영험한 산이라 알려진 곳이라고. 그런데 그 이름을 우리 마음대로 함부로 바꾸어 부르면 안 되잖아. 이곳에 오기 전,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벌써 그 말을 어기면 안 되지."

"아! 죄송해요, 형님. 만년산삼을 보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네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게요."

"그래, 그러면 됐어."

나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의제의 등을 몇 번 두들겨 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이제…… 하하. 우리 백두산 만년산삼 한번 꿀꺽해 볼까?"

"좋죠, 형님!"

"마 형, 그거 우리도 나눠 주시게요?"

"한 형, 무슨 말이에요? 당연한 소리를. 그리고 저는 이미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이 있어서 필요 없어요. 정확하게 삼등분해서, 셋이서 복용해요."

"마 형!"

천무휘다.

눈동자에 지진까지 일으키며 언성을 높였다.

"만년산삼의 주인은 마 형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걸 마 형을 빼고 우리끼리 복용하란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전 그 말만큼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형님, 그건 천 형 말이 맞아요. 그래도 우리가 또 남은 아니니까, 큭큭큭. 형님이 딱 절반 드시고, 나머지 절반으로 우리 셋이 나눠 먹으면 안 될까요?"

"곽 형 말이 맞습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훗날,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마 형."

"저도 찬성합니다."

한해북에 이어 천무휘까지 의제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 아까운 만년산삼의 절반을 그냥 내다 버리는 꼴 아니겠는가?

나는 복용해 봤자, 콩알만큼의 내공도 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걸 세 녀석에게 모조리 먹여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옥신각신, 실랑이는 해가 질 때까지 이어져야 했다.

그리고 결국 해가 모두 서녘으로 넘어가 어둠이 찾아왔을 때.

피유우우우우우우웅.

툭.

뭔가 어둠을 뚫고 하늘을 가르며 날아왔다.

"아얏! 이거 뭐야? 어느 놈이야?"

나뭇가지다.

그게 의제의 머리에 명중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인지, 그 어떤 위력도 없는 장난과 같은 나뭇가지 활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살이 날아든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찾아온 백두산의 깊은 숲.

백두산의 위엄만큼이나 높고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서도 우뚝 치솟아 얼핏 보아도 열 장 높이까지 자란 나무 위의 꼭대기.

그곳 맨 위의 가는 나뭇가지를 밟고, 활을 든 소년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다.

그가 바로 활을 쏘는 소년이다.

* * *

<<광마일기>>

(상략)

우리가 두 달 전 죽였던 그 여인이 한때 천하제일미인이라 불렸던 설민민이란 소리를 들었다.

충격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내 손으로 죽였다니.

내가 정말 악마가 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때는 정말 우울했다.

그녀가 죽을 때 나를 원망하듯 노려보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그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중략)

하북까지도 우릴 쫓는 자는 없었고, 그 후 두 달이 더 지났을 때까지도 추격대는 만나지 못했다.

놈들은 그때까지도 남월의 밀림을 헤치며 우릴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방심할 순 없었다.

나와 의제는 북으로 계속 이동하였고, 그러다 고려의 땅까지 밟게 되었다.

백두산이라 불리는 고려인들의 영산이었다.

(중략)

백두산에서 만년산삼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의제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에 겨워했다.

내공이 빈약한 의제에게 모두 양보하려 했지만, 녀석이 한번 고집을 부리면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반을 갈라, 의제와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의제는 지금 살아 있을까?

갑자기 녀석이 너무 보고 싶다.

(중략)

활을 쏘는 소년을 보았다.

(중략)

추격대를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한 나와 의제는, 백두산에서 본격적으로 무공 수련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 수련.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활을 쏘는 소년이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괴수들이었다.

(중략)

치가 떨렸다.

그것들이 우리를 농락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또 매일, 나와 의제는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나 광천마제의 일생을 통틀어, 그렇게 굴욕적인 시간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싸우고, 도망가고, 다시 싸우고, 다시 도망가고.

백두산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것들을 악마라고 생각했다.

(중략)

그날, 나는 초절정의 벽을 깼다.

그리고 의제는 이미 며칠 전,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던 절정의 고수가 됐다.

모두 그들 덕분이다.

이제 와 생각하면 너무나 고마운 이들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 짓을 하라고 하면, 죽으면 죽었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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