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광마일기>>
(상략)
이봐, 광마.
아니, 마 도사.
나 계효보일세.
자네 일기와 붓 좀 빌리겠네.
너무 억울해서 그러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아닐세.
정말 정말로 억울하네.
계두교 말일세.
사실대로 모두 털어놓겠네.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긴 하네.
그렇다고 자네가 뻔히 알아챌 계두교 따위를 만들고 그랬을 리는 없지 않겠나?
믿어 주시게.
사연이 있었다네.
사실 자네 하는 양을 지켜 보고 있자니, 속으로 너무 답답해 환장할 것 같았네.
자네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지난날들을 되돌아보시게.
자네가 했던 판단, 결정, 행동들.
그것이 정말 최선이었나?
아니지 않았나?
최소한 자네도 똑똑하지 않다는 건, 이젠 자네 스스로도 인정할 것이라 믿네.
그래서 계속 지켜보는 게 너무 답답하고, 이러다 내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아서 그랬네.
잠시 자네에게서 시선을 떼어 딴짓 좀 했네.
또 허튼 짓거리를 반복할 게 뻔해서 그런 것이네.
바람 좀 쐬며 답답한 가슴과 머리도 좀 식히려고 말일세.
그러다 어느 마을을 들르게 됐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잡것들이, 마을에서 잔치를 한다며 닭을 수십 마리나 잡아서 삶고 굽고 그러는 게 아닌가?
아네, 알아.
나도 잘 안다고.
인간들이 닭고기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까진 참았네.
아니 그런데 이 미친놈들이 말일세!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어린 병아리들까지 잡아먹는 것을 보고 말았네.
나도 순간 눈이 뒤집히고 말았지.
내 심정도 이해해 주시게.
괴수들이 갑자기 나타나, 어린 인간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면 마 도사 자네 심정은 어떻겠는가?
내 당시의 심정이 그랬네.
그렇다고 그들의 목숨을 취하지는 않았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마 도사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요괴가 아니라네.
정말이네.
물론 아직도 자넬 이용한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아무튼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고, 또 심하게 다치게 만들지도 않았네.
화가 너무 나서, 내 요술로 그들을 따끔하게 혼내 주었네.
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생명은 함부로 잡아먹지 말라고 일장 훈계도 좀 해 줬네.
닭이 인간을 위해 얼마나 이로운 존재인지도 좀 가르쳐 줬고 말일세.
그게 전부네.
정말일세.
물론 그런 비슷한 일들이 몇 번 더 있긴 있었네.
자네가 오죽 멍청하게 굴었으면 내가 그렇게 장시간 딴 곳에 한눈을 팔고 있었겠는가?
내 탓이지만, 분명 자네 탓도 있다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뜻밖의 소식을 듣고 기겁하며 놀랐네.
자네가 처선과 을오를 만나러 곽우적과 함께 들렀던 그 객잔 기억하는가?
저기객잔 말일세.
세 명의 늙은 상인과 대화를 나누며 닭값이 급락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나도 자네와 비슷한 시기에 계두교라는 황당무계한 소식을 접했네.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하지만 결코 내가 아닐세.
내가 계두교의 교주가 아닐지 의심하는 거 다 아네.
그렇지만 진짜 아닐세.
난 그 계두교인지 뭔지에 가 본 적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네.
정말일세.
(중략)
고백할 게 있네.
나의 내공 말일세.
이미 십 갑자를 넘었네.
그런데도 아직 절정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어.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마 도사.
십 갑자가 넘는 내공을 요공(妖功)으로 전환해, 그 엄청난 요술로 차원을 넘어가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네.
그제야 깨달았네.
부끄럽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내 요재(妖才, 요술의 재능) 말일세.
빌어먹게도 무재랑 똑같이 형편없더군.
이런 내 심정을 자네는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겠는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내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말이네.
정말 돌아가고 싶네.
나의 고향으로.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네.
하루라도 빨리 화경의 경지에 오르시게.
그렇다면 나도 무공과 요공을 합쳐, 내 고향 요계로 돌아갈 수 있다네.
당연히 자네에게 걸린 억겁의 굴레도 풀어 줄 것일세.
하나 더, 약속하겠네.
만약 자네가 화경의 경지에 오르고, 내가 그 힘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게 된다면.
내 요술의 일부를 자네에게 주고 떠나겠네.
정말일세.
요술의 힘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지금 억겁의 굴레를 통해 무한회귀를 겪고 있는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 믿네.
그러니 분발해 주시게.
인간계의 절대자가 다시 될 수 있다네.
광천마제 시절보다 더 강하고 훌륭한 천하제일인 말일세.
그러니 제발, 멍청한 짓 그만해서 그만 죽고, 하루라도 빨리 초절정의 벽을 깨고 연이어 화경의 벽마저 깨 주시게.
-계효보
빌어먹을 닭대가리.
난 광마일기에 적힌 이 마지막 부분을 읽고 홀로 오랜 시간 상념에 빠져야 했다.
그리고 몇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첫째,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놈은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다.
둘째, 놈의 내공은 이미 십 갑자를 넘었다.
셋째, 놈은 내공을 요공으로 전환할 수 있다.
넷째, 놈은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닭대가리가 감히 인간인 나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열받는다.
다시 몇 가지 의심을 해야 했다.
첫째, 계두교와 계효보가 상관이 없다?
둘째, 내가 화경의 경지에 오르고 녀석이 그 힘을 얻으면 순순히 인간계를 떠나겠다?
셋째, 자신의 요술 일부를 나에게 전수해 주겠다?
퉤!
이 닭대가리가 진짜 누굴 개 호구 등신으로 아나?
안 믿는다.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녀석, 큭큭큭.
아직도 내 무한회귀가, 녀석이 나에게 건 억겁의 굴레 때문인 줄 안다.
닭대가리.
누가 누구한테 멍청하다는 건지.
광마일기의 찢은 후 먹었던 부분, 당연히 지난 생에도 회귀하자마자 그 부분은 모두 찢어서 씹어먹었다.
지금도 같은 부분을 찢어 씹어먹으며 계효보가 남긴 글을 읽고 있다.
그리고 내 힘?
그래, 나도 되찾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내 힘을 되찾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내 업보를 씻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힘은 따라오게 될 테다.
아! 그나저나 진짜 죽으면 안 되겠다.
벌써 십 갑자라니.
열 번째 회귀 때부터 계효보는 심토만력근으로 내공을 축적하고 있다.
그때는 내가 말려 두었던 반 개의 심토만력근으로 반 갑자의 내공을 축적했고, 그 후로는 매번 고스란히 한 개를 모두 복용해 일 갑자씩 축적했다.
지금이 스물두 번째 회귀니, 놈도 곧 십일 갑자 삼십 년 치 정도의 내공을 보유하게 될 테다.
삼 갑자의 요공을 내공으로 전환할 수 있다니, 그걸 합치면 십사 갑자가 넘는군.
휴우.
아직 괜찮다.
그래도 이젠 죽지 말자.
놈의 내공만 늘려 주는 꼴이다.
당장 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상대할 수도 없고.
일단 놈을 상대하는 것보다 내 업보를 씻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언젠가 놈과 다시 맞붙을 날이 있을 테다.
일단 집으로 가자.
사부가 보고 싶다.
* * *
사부에게 삼재검법을 가르치고…… 절강에서 초향과 신나게 놀아주고…… 귀정사에 들렀다가…… 의제와 의형제를 맺고…… 첫사랑…… 제갈세진과 싸웠…… 작은 사부가 원곡을 두들겨 패는 모습은 언제 봐도 속이 다 시원…… 처선와 을오를 만나러 가던 길.
나와 의제는 저기객잔이란 곳에 들르게 됐다.
저기객잔(邸岐客棧).
"아미삼검이 복귀했다는 얘기 들었어?"
"하! 왕삼 이 친구야!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이제 하는가? 참, 느려요, 느려."
"아…… 나 어렸을 적 말이야. 매일 잠자며 그분들 만나는 꿈 꿨는데."
머리가 백발인 세 명의 할아버지 상인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잠시 후, 점소이가 그들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어르신들, 무엇으로 드릴깝쇼?"
"음, 여긴 닭요리가 얼만가?"
내가 기다리던 질문이다.
지난 생에선 닭값이 거의 공짜나 다름이 없었다.
"쌉니다, 싸. 저희 저기객잔의 닭요리는, 다른 객잔의 딱 절반. 모든 닭요리, 마리당 은자 세 냥만 받고 있습니다."
"에라이, 사기꾼아! 우리가 상인인 거 몰라? 앞선 마을에선 은자 두 냥만 받던데. 뭐야! 우리가 호구로 보이냐?"
"어르신, 그게 언제였습니까?"
"사흘 전이었네."
"아이쿠, 어르신. 요즘 닭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는 사실 모르십니까?"
"그, 그런가?"
"네. 사흘 전에 저희 객잔은 은자 한 냥 반만 받았습니다."
"아, 그래? 뭐, 그렇군."
"어떻게? 헤헤. 정말 어렵게 구한 닭이 딱 한 마리 있긴 한데. 숙수에게 요리하라고 할깝쇼?"
"에잇, 됐어. 은자 세 냥짜리 닭을 어떻게 먹겠나? 됐어. 돼지고기볶음하고 만두 한 근, 화주 한 병."
"예이, 알겠습니다."
주문을 모두 받은 점소이가 촐랑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노상인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아! 내가 살다 살다 닭 한 마리에 은자 세 냥 하는 날도 보는군.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참나."
"도대체 닭값이 왜 이렇게 갑자기 뛰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진즉 닭이나 키울 걸 그랬어."
"소문 못 들었나?"
"무슨 소문?"
"아니, 글쎄 어떤 미친놈들이 닭을 미친 듯 사들였다지 뭔가?"
"어디서?"
"한곳이 아니야. 중원 곳곳에서 닭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마구 사들인 후, 그걸 죄다 야산에 풀어 줬다는 거야."
"아니, 어떤 놈들이?"
"모르지, 몰라. 아무튼 그래서 닭이 씨가 말랐다는 거야. 할 짓이 그렇게도 없나. 왜 멀쩡한 닭을 사들여 그걸 야산에 풀어 줘. 하여간 세상은 넓고, 고결하게 미친놈들은 많다니까."
"저기, 어르신들."
내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 그 닭을 사들였다는 사람들이 계두교 사람들 아닙니까?"
"계두교? 그건 뭐요?"
"계두교요. 닭 계 자를 쓰고, 머리 두 자를 쓰는 종교요."
"풉, 큭큭큭. 닭대가리교? 뭐 그런 종교가 다 있남? 하하. 도사님 같은데 참 재밌는 분이시군요, 하하하."
아니다.
계두교가 아니다.
아니, 계두교다.
빌어먹을 계효보 닭대가리 새끼.
나한테 걸렸다고 꼼수를 쓴다는 게 겨우 이건가?
하아!
돌겠네.
닭대가리 수준하고는.
이러면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환장하겠다.
닭대가리는 도대체 계두교를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설마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려는 것인가?
그러면 그것도 문젠데.
어쩌면, 정말 최악의 경우 처선과 처호의 천하삼분지계가 천하사분지계가 될지도 모르겠다.
닭대가리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골머리가 아픈데 더 골치 아프게 됐군.
그래도 일단, 설민민 일부터 해결하자.
* * *
나와 천무휘는 홍화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옥만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모두 구경하였다.
그리고 떠나는 길, 나와 천무휘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다시 천무휘는 만옥의 처소로, 나는 석옥동으로 잡혀 왔다.
내가 천화독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보며 하나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난 그들과 대화를 하며 기감을 극대로 펼쳤다.
없다.
동굴 구석구석, 내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의 기운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세심하고 또 세밀하게 살폈다.
그런데 없다.
분명 내가 여기서 누구한테 죽었을 텐데.
이곳 석옥동에 사람들을 설득하러 왔다가 죽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를 죽일 만한 고수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뭐지?
혹시 누가 나에게 하독을 했나?
아니다.
확실히 난 구천구백구십구독에 대해 불침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독에 중독됐어도, 광마일기에 그 상태를 적을 시간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건, 갑작스러운 암수에 당했다는 뜻이다.
내가 대처하지 못할 기습, 그걸 가능하게 펼치려면 최소한 초절정 이상의 고수여야 한다.
하지만 이곳 석옥동, 밖에서 경계를 서는 간수들까지 죄다 기감을 펼쳐 감지했지만, 그럴 만한 고수는 감지되지 않는다.
아!
이건 도대체 뭘까?
왜?
진짜 어떻게 죽은 것이지?
다만, 한 가지 사실은 기록되어 있다.
대신, 너희를 구해 주겠다는 계획은 수정해야겠다.
너희들이 살길은, 스스로 찾아라.
-광마일기 中
이들이 나를 공격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이런 결심을 했다.
다시 보는 이들은 광마일기에 적힌 그대로 매우 안타까운 몰골이다.
절로 긍휼한 마음이 드는 처참한 상태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사주건 무엇이건, 그들이 그리 결정하고 그렇게 행동한 일이다.
난, 이들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깊은 밤이 되어 나는 은형술을 펼쳐 석옥동을 벗어났다.
우리 천무휘는 이번에도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난 해독약과 피독약까지 챙긴 후, 곧바로 홍화원을 벗어났다.
천연의 요새가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 정도 높이의 절벽과 담장, 경계 따위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난 곧바로 몸을 날려 설민민과 의제, 한해북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 * *
"설 부인."
설민민을 만났다.
초조한 얼굴.
간절한 눈빛.
떨리는 손.
금세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
"설 부인을 꼭 빼닮은 제 또래의 사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털썩.
결국 설민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아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 * *
-아들이…… 맞습니까?
홍화장에 몰래 잠입했다.
나와 설민민, 의제와 한해북이다.
천무휘는 아직 구하지 못했다.
설민민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 일 각이라도 빨리 아들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홍화원 대청의 높은 태사의에 눕다시피 기대어 앉은 옥풍.
아니, 석경간이 맞다.
그를 보는 설민민의 눈이, 그가 석경간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내 설민민은 은형술을 모두 풀어버리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경간, 옥민, 옥만이 모두 놀란 눈으로 그런 그녀를 보았다.
"어, 어머니…… 어머니. 진정…… 진정 어머니시란 말입니까. 어머니…… 흑흑흑."
석경간은 아픈 몸을 이끌고, 휘청거리기까지 하며 아슬아슬하게 설민민을 향해 걸어왔다.
옥민과 옥만은 여전히 너무나 놀라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
설민민도 그 자리에 망부석이라도 된 듯, 굳은 몸으로 서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아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 댔다.
이를 지켜보는 내가 다 울컥할 정도의 감동적인 모자 상봉이었다.
그리고 곧.
석경간이 아슬아슬하면서도 힘겹게 설민민 바로 앞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 모자가 있는 힘껏 서로를 부둥켜 끌어안기만 하면,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게 될 테다.
그렇게 석경간이 설민민을 향해 양팔을 벌려, 마지막 한 걸음을 떼었다.
쉬이이이익.
툭.
뭐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끌어안으려던 아들을.
설민민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