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와 천무휘.
우리 둘만 홍화원에 도착했다.
설민민과 의제, 한해북은 약속한 장소에서 대기 중이다.
우리 둘이 일종의 정찰병인 셈이다.
작은 수레 하나라도 지나갈 수 있을까?
어렵다고 본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좁고 가파른 절벽 위의 산길이다.
그곳을 따라 나와 천무휘는 한참이나 산을 올라야 했다.
그런데 그때.
타타타타타탓!
채채채채채챙!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나이도 제각각의 남녀 여럿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이곳은 홍화원의 영역입니다. 되돌아가십시오."
난 뒤로 빠졌다.
이럴 땐 언제나 그렇듯, 천무휘의 잘난 얼굴과 명성을 이용하는 게 좋다.
이미 다 합의된 내용이다.
"아! 놀랐습니다. 진짜로 홍화원이 이곳에 있었군요. 전 천무휘라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친구들이 수룡검이라 불러 주기도 하지요."
열세 명의 남녀노소.
반응이 제각각이다.
젊은 여인들은 이미 얼굴이 불그스레해져 이건 뭐 우릴 막겠다는 건지, 연애를 하겠다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 외 젊은 사내들은 극도로 놀란 표정을 지었고, 일부 나이가 좀 있는 자들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겨누었던 창까지 거두고 나름 정중한 자세로 천무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수룡검 천 대협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이곳이 홍화원이 맞습니다. 다만, 저희 홍화원은 외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만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아! 그것참 안타깝군요. 홍화원의 신비로움과 그 아름다움이 워낙 유명하여 꼭 한번 보고 싶어 먼 길을 어렵게 찾아왔는데 말입니다."
천무휘 이 녀석, 언제 연기가 저렇게 능청스러워졌지?
뭐, 다 내가 잘 가르친 덕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천 대협. 저희 홍화원에도 천 대협의 명성은 크게 알려졌습니다. 다만, 저희 화원에도 저희만의 규칙이란 것이 있기에, 모시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중년과 노년을 오가는 사내는 매우 정중하게 천무휘에게 말했다.
무력으로 뚫으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일단은 그래선 안 된다.
아쉽지만 이만 물러서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잠깐만요. 도 아저씨, 그래도 수룡검 천 대협의 방문인데, 원주님께 말씀은 드려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젊은 여인 중 한 명이 크게 용기 내어서 나선 모습이었다.
이에 도 아저씨라는 자도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다시 천무휘가 나섰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말씀만 전해주시겠습니까? 홍화원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고 싶어, 귀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산파도 아닌 이곳 홍악산에 처음으로 들린 것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나와 천무휘는 심지어 홍화원의 입구까지 안내를 받아 갈 수 있었다.
하오문의 정보가 한 치의 틀림도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고수가 아니면, 절대 허락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철통과 같은 방비를 갖춘 요새였다.
물론, 그 기준으로 봤을 때, 난 어마어마한 고수다.
어쨌거나 그곳에서 어떤 결과로 답이 돌아올지 초조한 마음으로 약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곧.
우리는 홍화원주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곧장 홍화원주의 장원으로 안내되었다.
사십 년 전의 홍건쌍장으이며, 지금은 홍화원의 원주가 된 황칙우를 만날 시간이다.
* * *
홍화장(紅花莊, 홍화원의 장주가 기거하는 장원).
아니다!
황칙우가 아니다!
사십 년 전의 황칙우가 아무리 젊었어도 스무 살은 됐을 테고, 지금은 최소한 환갑을 넘긴 나이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나와 천무휘 눈앞에 있는 사내는 우리 또래다.
그것도 나이는 물론,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게 병색이 짙고 매우 초췌한 몰골의 젊은 사내다.
뭐지?
설마……?
그럴 가능성이 높다.
병색이 짙고 매우 초췌한 몰골이라지만, 그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얼굴은 가릴 수 없었다.
저 상태여도 천무휘보다 잘생겼으면, 말 다 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두 여인.
황칙우의 부인 옥지경이 아니다.
둘 다 젊다.
역시 우리 또래다.
그런데, 심각하게 못생겼다.
뭘까?
황칙우와 옥지경은 어디로 간 것이지?
"놀란 얼굴이군요."
사내가 아닌 두 여인 중 한 여인이 말한다.
"홍건쌍장 황 대협과 냉혈사수 옥 여협께서 이리 젊으신 줄 몰랐습니다."
천무휘도 크게 당황한 게 분명한데, 녀석 능청스럽게 잘 말한다.
그러자 처음 말을 건넨 여인이 짙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님이세요. 두 분 다, 몇 해 전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지금 홍화원의 원주는 여기 있는 제 남편이 자리를 맡고 있고, 저와 제 여동생이 남편을 돕고 있답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쿨럭. 쿨럭. 제가 홍화원의 원주 옥풍입니다."
"반갑습니다, 옥 대협. 천무휘라고 합니다. 여긴 제 친구 마악치라고 합니다."
"전 옥민이고 제 여동생 옥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옥 부인, 옥 여협."
옥지경의 외모가 추하다고 하더니, 그 딸들 역시 외모가 심히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아니, 심히 심히 심히 아주 심히 떨어졌다.
설민민과 며칠 계속 있다가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뭐지?
분명 저자가 석경간이 맞는 것 같은데, 이름이 옥풍이라고?
옥씨 성을 쓴다.
왜지?
내가 태어나 천무휘보다 잘생긴 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늘이 처음이다.
틀림없이 석경간이 맞다.
그런데 왜?
또 머리가 복잡해지려 한다.
"저희 홍화원을 구경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옥 부인."
"바깥세상에선 저희 홍화원을 좋게 보지 않는 시선도 더러 있다고 하던데요."
"아!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홍악산에 만개한 홍화의 아름다움을 죽기 전에 꼭 한번 감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호호호, 천 대협은 듣던 것과 같이 외모도 수려한데 말씀도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옥 부인."
이상하다.
대화를 주도하는 게 홍화원주가 아니다.
옥민이다.
석경간이 많이 아픈가?
왜지?
그래도 분위기는 꽤 좋아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제 남편이 최근 몸이 별로 좋지 못해요. 남편이 직접 여러분을 안내해 드려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홍화원에 출입하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저희가 더 고맙네요. 대신 제 여동생이 두 대협을 안내해 드릴 거예요. 필요한 것 있으면, 제 여동생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옥 부인."
석경간이라 생각되는 홍화원주와 그 부인 옥민이 대청 뒤로 사라졌다.
우리는 옥민의 여동생 옥만의 안내를 받아 홍화원을 구경하게 되었다.
* * *
홍화원은 아름다웠다.
극락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산 전체에 아름다운 붉은 꽃들이 만발하였다.
그 자체로 대단한 절경이었다.
또 곳곳에서 꽃잎을 따고, 또 이를 가공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풍요롭진 않아도, 행복한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천무휘는,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다.
글쎄 옥만 말이다.
제 누이와 똑같이 엄청난 추녀다.
그런데 그 얼굴로, 아주 대놓고 천무휘에게 수작질이다.
고맙게도 나는 거들떠도 안 본다.
내 앞에서 나란히 걸으며 그냥 눈웃음을 사정없이 갈겨 대며 추파를 던지고 있다.
천무휘는 그 곤혹스러운 상황을 꾸역꾸역 버텨 내는 중이다.
"그런데 오라버니. 어멋!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호호호."
"괜, 괜찮습니다."
"정말요? 호호. 그럼 천 오라버니라고 부를게요, 오라버니, 호호호."
아! 우리 천무휘 불쌍해서 어쩌냐?
내가 다 눈물이 난다.
"그런데 오라버니, 바깥세상에서는 우리가 홍화를 이용해 독을 만들고, 그걸로 암거래한다는 소문도 돈다면서요?"
"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저는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렇죠? 호호호. 맞아요.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독을 만들겠어요?"
"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소문이 돈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옥 여협?"
"아잉, 그냥 옥 매라고 불러 주시면 안 돼요?"
"옥, 오…… 옥 매."
"까르르르르."
천 형!
조금만 참으시오.
그대의 거룩한 헌신이, 설 부인의 간절한 한을 풀 수 있다오.
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천무휘를 응원했다.
"사실 이곳 홍악산은 원래 이름이 청홍산(靑紅山)이었어요. 청화(靑花, 푸른 꽃)와 홍화(紅花, 붉은 꽃)가 거의 반반의 비율로 자라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둘 다 약간의 독성을 품고 있었어요. 사람에게 크게 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지금 청화는 하나도 보이지 않네요?"
"네. 청화는 천으로 짜거나 다른 물품으로 가공하는 게 힘들었어요. 이곳에 정착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람들도 먹고살아야 했기에, 청화를 베고 홍화를 중점적으로 키웠다고 해요. 그렇게 청화가 점차 사라졌는데, 자연의 이치인지 어땠는지, 가끔씩 나타나는 청화에게서 어느 날부터 강한 독성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 그랬군요."
"네. 이 독이 굉장히 위험해서, 간혹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 갈 정도였어요. 그래서 더더욱 청화를 발견하면 제거했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군요."
"맞아요. 그래도 아직까지 가끔 청화가 발견되곤 하는데, 혹시라도 청화를 보면 절대 만져서는 안 돼요.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그 독은 매우 치명적이니까요. 알았죠, 오라버니?"
"알, 알겠습니다."
"소문도 그래서 난 것 같아요. 우리 사연을 잘 모르고 산에 올랐던 사람이, 아름다운 모양의 청화를 발견하고 만졌다가 중독됐을 가능성이 있어요."
"해약은 없습니까?"
"아직 그런 건 없어요, 오라버니."
"아, 그렇군요."
"오라버니, 저기로 가 봐요. 저기 풍경이 아주 끝내줘요."
옥만이 천무휘의 팔짱을 끼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냥 팔을 자기 가슴에 꽉 밀착시키는 그런 팔짱이었다.
천 형, 내 오늘 그대의 희생을 절대 잊지 않겠소.
* * *
"정말 가시게요, 오라버니? 며칠, 아니 하룻밤만 저희 홍화원에서 묵으시면 안 돼요?"
"미안합니다, 옥 매. 홍화원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구경하였습니다. 다만, 저도 할 일이 많아 하루를 묵을 수는 없습니다."
한 식경이나 실랑이가 오갔다.
옥만은 천무휘를 놔주려 하지 않았고, 천무휘는 계속 이곳을 떠나려고 하고.
사실 해야 할 일이 진짜 있다.
석경간의 생존 소식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설민민에게 한시라도 빨리 알려 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내,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옥 매."
"오라버니……."
결국 옥만도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천무휘의 손을 놔주어야 했다.
그렇게 나와 천무휘는 홍화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천 형, 천천히 가요."
"어서, 어서 갑시다. 빨리 가자고요, 마 형."
천무휘가 저렇게 당황해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도 또 처음이다.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아주 빠르게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난 그런 천무휘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다, 천무휘. 큭큭큭.
엇!
쿠르르르릉.
갑자기 땅이 꺼졌다.
땅이 그냥 무너져내려 주저앉은 것이다.
나와 천무휘는 그 커다란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지.
나와 천무휘는 고수다.
이런 천재지변 정도는 우습게 벗어날 수 있다.
타타타타타탓! 타타타타타탓!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천무휘는 신법을 발휘해 구덩이 위로 몸을 날려…… 허걱!
그물이다.
그것도 청색의 꽃과 가시가 가득한 그물이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가 겹겹으로 하늘을 덮어 우리를 향해 뻗어 왔다.
"그물을 찢으시오, 천 형!"
퍼퍼퍼퍼퍼퍼퍼펑!
천무휘과 신법을 발휘함과 동시에, 출검을 하여 검기를 뿌렸다.
충분하리라 생각하여 그런 것이다.
그런데, 검기가 닿은 그물망에서 폭발이 일었다.
"쇠로 만든 그물이오! 천 형, 검강! 검강을 출경하시오!"
콰콰콰콰콰콰쾅!
악수를 두고 말았다.
겹겹으로 펼쳐져 우리를 향해 날아오던 그물망이, 천무휘의 검강과 부딪히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 파편, 또 그 파편과 함께 공간을 모두 뒤덮어 흩날리는 청화.
그것들이 만천화우가 되어 우리 둘을 고스란히 덮치고 말았다.
쇠 그물망의 파편을 피해 우리는 다시 구덩이 아래로 추락해야 했다.
그리고 곧.
"마 형, 나…… 중독된 것 같습니다."
청화독(靑花毒)이다.
그리고 이 구덩이는, 사람이 만든 함정이었다.
젠장.
뭐지?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좋게 끝났잖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