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작은 문제가 생겼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벌써 섬서 홍악산을 향해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섬서를 향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머물던 객잔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민민도 지금 우리와 함께 이 객잔에 머무는 중이다.
어쨌거나, 이 작은 문제란 건 바로 의제를 말하는 것이다.
"안 가요."
"의제, 그만하고 가자. 응?"
"형님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저는 이번 일에서 빠지겠습니다. 그 잘난 여자하고 함께 다녀오십시오."
"의제!"
"안 갑니다."
이 녀석.
단순하고 무식하고, 거기에 고집까지 똥꼬집이다.
한 번 무언가 마음을 먹으면, 웬만해선 그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큰일이다.
의제 없이 어딜 간다고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다.
광천마제 시절, 날 위해 목숨까지 버린 의제다.
회귀를 한 후에도, 의제는 거짓말처럼 내 의제가 돼 주었다.
내 가족이고, 형제며, 나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제를 이곳에 홀로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다.
아예 설민민의 일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말이다.
"의제, 그러지 말고 뭐가 문젠지 속 시원히 말 좀 해 줘."
사실 뭐가 문제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안다.
정확히 안다.
그래도 시원하게 말을 하고 나면 화가 좀 풀리는 게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의제의 억울함과 화난 감정을 조금 풀어 주려고, 정말 한참이나 설득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의제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형님! 아니 막말로, 제가 그렇게 못생겼습니까?"
응. 너 못생겼어.
"누가 그래? 솔직히 말해서, 천무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제 정도면 어딜 가도 여자들이 숨어서 마음 졸이고 막 그럴걸?"
"그죠? 아! 진짜. 저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고요. 제가 천 형보다 외모가 뒤처지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넷 중엔 외모로 따지면 서열 이 위 아닙니까? 네?"
이 새끼가!
오냐오냐하니까!
어디서 무형지독을 사발로 처마시고 뇌가 가출했나!
"응? 어, 응. 그렇지, 뭐."
"아니, 그런데 저한테 그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형님도 다 들으셨죠? 얼굴이 색마랍니다! 하아! 진짜! 진짜 말입니다. 여자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 애도를 꺼내 한바탕 칼부림을 했을 텐데. 아오!"
응, 너 그러다 죽어.
설민민 초절정 고수야.
"의제, 그러지 말고. 설 부인도 온전한 정신이 아니잖아. 가족도 다 죽었지. 음심을 품은 사내놈들은 계속해서 이상한 짓거리를 해 오지. 유일한 핏줄인 아들은 사 년째 못 찾고 있지. 안타깝잖아. 그러니까 의제가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그만 같아 가자, 응?"
"안 됩니다. 이건, 자존심 문제에요. 절대, 그녀를 돕지 않을 겁니다."
똥고집!
결국 그날도 우리는 섬서를 향해 출발하지 못했다.
* * *
"설 부인."
"네, 마 도사님."
이제는 한껏 나와 우리를 향해 부드러워진 그녀다.
오해도 거의 다 풀고, 아직 말로 직접적인 표현은 안 했지만, 그녀의 눈빛에 우리를 향한 감사함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더 예쁘고 아름답다.
매일 보는데,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고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그녀였다.
덕분에 다른 손님을 안 받기 위해 객잔을 통으로 빌려야 했고, 돈도 많이 썼다.
뭐, 객잔 비용은 그녀가 다 지불했지만 말이다.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뭐가요?"
"아드님 말입니다."
"네."
"개방에서 석가장의 시체를 수습할 때 시체였던 그를 발견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감쪽같이 사라졌고요."
그녀가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혹시 귀식환(龜息丸)이라고 아세요?"
"귀식환요? 그게 뭔가요? 설마……."
"귀식대법을 인위적으로 발휘하게 해 주는 환단이에요. 아들에게 그걸 복용시켰습니다."
석가장에 별의별 영약이며 기물이 많다고 하더니, 살다 살다 귀식대법을 인위적으로 시전할 수 있는 약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석경간이 어떻게 죽었고 다시 살아났는지 말이다.
아비규환의 혼란 속,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 보려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고 모험이었으리라.
나와 설민민은 나란히 앉아 잠시간의 고요함을 보냈다.
그런 후.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마 도사님."
"제 의제 녀석 말입니다."
"음, 저한테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에요. 얼굴도 안 보여 주시고, 딱 두 번 봤을 때 인사를 건넸는데, 인사도 안 받아 주더라고요."
"그게, 그게 말입니다, 설 부인."
"혹시, 첫날…… 그러니까 색마들이 저에게 수작을 걸던 그날, 제가 마 도사님의 의제분을 향해 검을 휘둘러서 그런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든 사죄를 할게요."
검을 휘두른 게 아니라, 검강.
그것도 주변이 모두 초토화될 정도의 무지막지한 검강이었습니다, 설 부인.
천무휘 아니었으면, 의제는 시체도 찾지 못했을 거라고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제게 화가 난 건가요?"
"그날, 설 부인께서 의제 녀석에게 했던 말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제가 무슨 말을 했었죠?"
그렇다.
때린 놈은 기억 못 한다.
언제나 맞은 놈만, 그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색마…… 얼굴이 색마라고 그러셨습니다."
"제, 제가요?"
"네."
"의제분께서 많이 화가 나셨겠네요?"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여정에 함께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아직 출발을 못 했던 것이군요."
"의제 때문에 늦어지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그게 어찌 마 도사님 잘못이고, 곽 대협 잘못이겠어요? 제가 곽 대협께 상처 주는 말을 해서 그런 거죠."
"……."
"마 도사님."
"네, 설 부인."
"제가…… 의제분과 따로 대화를 나누어 봐도 될까요?"
"제가 바라는 부분입니다. 다만, 의제가 속이 많이 상한 상태라. 혹시라도 설 부인께 실언을 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아, 혹시 제가 의제분을 향해 어떤 나쁜 짓을 할까 염려하시는 것이라면, 마음 놓으셔도 돼요."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안 맞으면, 대뜸 칼부터 꺼내 휘두르는 당신인데요.
"사실, 저는 제 이런 외모가 너무 싫었어요. 한때는 저주라고 생각했어요. 가족을 모두 잃은 후에는 더더욱 그랬죠. 모든 남자가, 저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마음을 놓고, 마음을 열면, 언제나 그들은 저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마 도사님을 믿어요."
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직접 그녀의 입을 통해 다시 들으니 그녀의 사연이 더 기구하고 슬펐다.
"고맙습니다."
"제가 잘해 볼게요. 의제분께 사죄도 하고, 설득도 해 볼게요. 제가 칼에 피를 많이 묻혀 광녀나 살인광이라고 소문났지만, 사실 그렇게 많은 색마를 상대한 덕분에, 역설적으로 남자들의 심리가 어떤지 조금은 알게 됐거든요."
"그, 그래요?"
뭔 소리지?
선뜻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일단 지켜보세요, 마 도사님. 제대로 사과하고, 제대로 설득해 볼게요."
"네, 설 여협."
* * *
나와 천무휘, 한해북은 담벼락 뒤에 숨어 지켜보고 있다.
의제는 청승맞게 혼자 객잔 별채의 작은 뒷마당에 앉아, 나뭇가지로 땅이나 긁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설민민이 나타났다.
뻔히 그녀가 나타난 걸 알면서도, 의제는 찬바람만 풀풀 풍기며 모른 척을 했다.
설민민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작은 나무 의자를 들고 다가가 의제 곁에 앉았다.
순간, 움찔하는 의제였다.
화가 아무리 잔뜩 났어도,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과 저토록 가깝게 단둘이 있는 게 머리털 나고 처음 아니겠는가.
사실, 이 순간 이 대결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의제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담벼락 너머까지 들려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곧, 이 확실한 대결의 종지부를 찍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첫날…… 곽 대협께서 생각하셨던 계책은 조금 짓궂으셨어요."
의제는 여전히 땅만 긁적이며 대꾸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인다.
새빨갛게 붉어진 의제의 얼굴이, 우리 세 사람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제가 그런 일을 너무 많이 당해서, 순간 이성을 잃었어요. 죄송해요, 곽 대협. 이렇게 사죄드릴게요."
그녀가 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의제를 향해 허리까지 깊이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의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화난 척하는 게 아니다.
저 녀석, 설민민이 저렇게 나오자 너무 긴장하고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려 저러는 거다.
의제가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았다.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다시 우아한 자태로 의자에 앉았다.
"혹시…… 그날 제가 곽 대협께 했던 말이요."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의제는 역시나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엔 보였다.
의제의 시선이 땅을 향해 있지만, 귀만큼은 평소의 열 배 스무 배, 아니 수백 배 열려 그녀를 향하고 있다는 게 말이다.
"사실 그건 진심이었어요. 곽 대협의 얼굴이 색마라는 거요."
툭.
의제가 땅을 긁적이던 작은 나뭇가지가 툭 하며 부러졌다.
심지어 주먹까지 불끈 쥐고는 미세하지만 부들부들 떠는 게 아니겠는가.
화가 난 모양이다.
어찌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제일미녀에게 저런 소리를 들으면 그 누구라도 마음의 상처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의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자신만의 말을 이어갔다.
"딱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이었어요. 아! 저 사내, 아니 그냥 사내도 아니고 사내대장부 중의 진짜 사내대장부. 저렇게 멋진 진짜 사내대장부라면, 그 어떤 여인이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다. 저렇게 늠름한 얼굴로, 왜 이런 나쁜 색마 놈들과 어울리는 것이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그런 말을 했던 거예요. 제 말에 상처받았다면 정말 죄송해요."
그녀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또 깊이 허리를 숙여 의제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의제는 여전히 요지부동.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일 다시 올게요. 곽 대협께서 제 사과를 받아 주실 때까지, 계속 사과하고 또 사죄할게요. 그럼, 내일 봐요."
그렇게 그녀는 다시 객잔 별채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의제.
여전히 그의 시선은 땅을 향해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새끼.
이 미친놈!
아나!
조금 전까지 입이 대 발이나 튀어나와 쌍욕이라도 마구 하고, 칼이라도 마구 휘두를 것 같았는데 말이다.
지금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아니, 입꼬리가 귀에 걸리다 못해 의제의 머리통을 한 바퀴 돌아 버렸다.
그것도 아니다.
얼마나 좋은지, 입꼬리가 치솟다 못해 하늘을 뚫고 우주라도 뚫어 버릴 기세다.
와! 저 녀석, 오늘 생일인가 보다.
* * *
그날 밤, 의제가 여전히 입이 귀에 걸린 얼굴로 내 방을 찾아왔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나는 다 알고 있지만, 의제는 끝까지 그게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싱글벙글, 섬서로 언제 떠나냐며.
자기가 빠지면 형님이 섭섭하지 않겠냐.
혼자서 밤새도록 떠들어 댄 후에야 내 방을 나갔다.
그렇게 우리 다섯 사람은 섬서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섬서 홍악산.
정확히는 홍악산에 있는 홍화원이라는 곳을 향해서다.
그곳에 설민민의 아들 석경간이 있다.
난 의제가 떠난 후 하오문에서 추가로 전해 온 정보를 확인했다.
홍화원(紅花園).
종교적 색채가 매우 짙은 집단 거주촌.
사십 년 전 현 홍화원의 원주 홍건쌍장(紅乾雙掌) 황칙우에 의해 만들어진 세력.
외부와 극도로 단절된 생활을 하는 집단 거주촌으로, 본 문도 이들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임.
주로 홍화(紅花, 붉은 꽃)를 이용하여 만든 물품이나 약재 등을 외부로 판매하여 경제활동을 하지만, 강한 종교적 신념 때문인지 홍화원 내부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음.
일부에서는 이들이 극독을 암거래한다고 의심함.
증거는 찾을 수 없음.
일천 명가량이 홍화원 집단 거주촌에 살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이 또한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음.
홍화원은 홍악산에서도 천연의 요새라 할만한 곳에 위치.
(중략)
홍화원주 황칙우는 사십 년 전 고수의 반열에 올랐던 것으로 확인되나, 현재 무공 경지는 알 수 없음.
황칙우의 부인 옥지경 역시 사십 년 전 고수 급의 무인으로, 나름 좋은 명성을 얻었던 남편과 달리, 당시 냉혈사수(冷血死手)라는 사악한 별호로 활동했었음.
특이점으로 훤칠한 외모의 남편과 달리, 옥지경은 상당한 추녀였다고 전해짐.
(중략)
극도로 폐쇄적이고 외부인에게 강한 배타심을 갖고 있어서, 출입이 용이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됨.
(하략)
* * *
드디어 섬서 홍악산으로 가는 길이다.
의제는 사흘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심지어.
"누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먼 길을 가려면 배부터 든든하게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이 녀석, 미쳤다.
다음 날에는 밤사이 비가 많이 내렸었나 보다.
땅이 온통 진흙밭이었고,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는 걸어야 했다.
"누님! 이쪽으로 오세요. 거기는 신발 더러워져요. 제가 여긴 마른 흙으로 다 메꾸어 놨습니다, 하하하!"
그게 끝이 아니다.
"누님! 여기에 앉으세요. 누님 옷 더러워지지 않게, 바위를 깨끗이 닦아 놨습니다, 하하하!"
"누님! 누님!"
우리는 섬서 홍악산에 도착할 때까지, 그놈의 ‘누님’ 소리를 수천 번이나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