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결국 의제는 작전에서 빠졌다.
인간 사냥 작전.
의제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 작전에 참여한다고 해도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 같아 내가 그리 결정했다.
셋으로도 충분했다.
나와 천무휘가 사냥에 나서고, 한해북은 설민민을 감시한다.
이 작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설민민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상이 아니다.
만약 오해가 생기면, 광천마제 시절과 같이 칼부림이 불가피한 상황에 몰리고 말 테다.
그녀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한 채 나를 향해 칼을 휘두를 것이고,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천무휘가 도와주겠지만, 제정신이 아닌 그녀를 살려 둔다고 해서 그녀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진 않다.
결국, 어떻게 해서든 그녀 몰래 여섯 명을 모두 사로잡아야 한다.
쉬이이이익.
타타타탓.
"컥!"
나와 천무휘는 은형술을 극대로 펼쳐 움직였다.
사냥물들은 한 명씩 혹은 두 명씩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따로 활동하고 있었다.
찾는 게 조금 어려웠지, 이들을 산 채로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약간의 고생을 하긴 했다.
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수였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이들 중 다섯 명을 단칼에 벨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내 기운을 모조리 끌어내 휘둘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나 보다.
한 명 한 명, 그 경지가 사뭇 대단했기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제압하는데, 약간의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성공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여섯 명을 모두 잡고 혈도까지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이들 여섯 명의 무공 말이다.
광마일기에는 그게 적혀 있지 않은데, 오늘 직접 상대를 해 보니, 이들 모두 음공(陰功)이나 한빙(寒氷) 계열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번뜩, 가장 먼저 북해빙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어야 했다.
중원에서 북해까지 가는 시간만 편도로 반년에서 일 년이 소요된다.
왕복은 최소 일 년이고, 최대 이 년 이상이다.
너무 멀다.
그럼 뭐지?
그렇다고 그 의심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잖은가.
혹시, 북해빙궁에서 중원 무림을 노리고 이미 이곳에 전초기지 같은 비밀 분타라도 만들어 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또 내 머리를 골치 아프게 만들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상상력이 너무 앞섰다는 생각이다.
단순히 여섯 명이 음공이나 한빙 계열의 무공을 썼다고 그리 의심했다면, 양공 계열 무공 쓰면 죄다 태양궁부터 의심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튼 이건 내가 너무 나갔다 싶었다.
뭐, 이제부터 알아내면 될 것이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이자들을 데리고 가서, 돈도 좀 어떻게 빌리면서 정체도 알아봐야겠다.
"천 형."
"네, 마 형. 금방 한 형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네, 부탁해요."
설민민의 동태를 감시 중인 한해북을 데리고 와, 함께 산을 내려갈 생각이다.
내가 여섯 명을 감시하는 동안, 천무휘가 한해북을 데리러 갔다.
아니, 막 떠났는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 마 형?"
"엇? 천 형,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얼른 한 형을 데리고 와야지, 설민민의 눈을 피해 산을 내려갈 수 있……. 안녕하세요."
그녀다.
젠장!
빌어먹을!
왜 그녀가 여기에 있지?
난 또 왜 이렇게 멍청하게 인사를 한 거고.
허리까지 넙죽 숙여 인사했다.
양손까지 공손히 모으고.
아! 쪽팔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한해북이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
-마 형, 죄송합니다. 정말 눈 한 번 깜빡했는데, 그녀가 사라졌습니다. 혹시나 해서 온 건데. 아…… 여기에…… 있네요. 죄송합니다.
한해북에게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다.
엄청난 분노, 엄청난 살기, 그것을 마구 뿌려 대며 설민민이 한 발 한 발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광마일기에 적힌 그 분노, 그 모습 그대로다.
빌어먹을!
간신히 운명을 바꾸었나 했더니, 결국 또 이런 상황에 놓이고 만 것이다.
어떻게든 칼부림만큼은 피해야 하는데.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지금은 광천마제 시절과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그녀의 젖가슴을 만진 것도 아니고 말이다.
"설 부인!"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오해가 있습니다."
그녀의 손에 검에 닿아 있다.
출검하면, 그 즉시 끝이다.
되돌릴 수 없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아들!"
소리를 질렀다.
막 출검을 하려다 멈칫하는 그녀.
"석경간!"
그녀가 멈춘 상태 그대로 움찔했다.
통했다.
"아들 석경간을 찾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믿기 힘드시겠지만, 우린 그걸 도우려는 것입니다."
그녀가 날 노려본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인상까지 구기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만,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었나 보다.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냐, 넌? 처음부터……."
고개를 돌려 천무휘를 한 번 노려보았다가, 다시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계획하고 접근한 것이더냐? 왜? 무엇을 얻고자 함이냐? 네놈들도 나를 탐하려는 더러운 색마들이냐? 아니면, 석가장의 재물을 탐해 이런 일을 꾸민 것이냐?"
"둘 다 아닙니다. 설 부인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정말 억울할 뿐입니다. 저희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설 부인을 돕기 위해 접근한 것입니다."
억울함이 진득하게 묻은 나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음성은 계속하여 차갑기만 했다.
"평생을 살며,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에게 순수한 의도로 접근했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순간 그녀가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기분을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 최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금자 일백 냥. 아닙니다. 지금 저희가 가진 돈을 다 합치면 금자 스무 냥 정도 됩니다. 그러니 금자 팔십 냥만 더 있으면, 아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오문 보정 지부 지부장이 직접 제게 한 말입니다."
"……."
내 말에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닫은 채로,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몸보다 더 큰 진동이 일어났다.
무언가 굉장히 혼란상 상황에 직면한 모습이었다.
"믿어 주십시오. 아니, 함께 가 보시죠. 저희가 아닌, 하오문은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최소한 돈을 앞에 두고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요."
침묵이 이어졌다.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서 고심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천무휘에게로 돌렸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만약, 만약 지금 나를 속이려는 것이라면…… 내 능력이 부족해 귀신이 된다고 하여도, 반드시…… 반드시 너희 셋을 모두 갈갈이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다."
살았다.
성공이다.
말 자체는 살벌했지만, 결국 내 말을 믿어 보겠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돈은 어쩌지?
이런 분위기에 돈 좀 빌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데 그때.
설민민이 나와 천무휘에게 잡힌 여섯 명에게로 다가갔다.
타타타타타탓.
초절정의 고수답게, 눈 깜짝할 사이 여섯 명의 점혈한 혈도를 모두 해혈하였다.
그런 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를 향해 말했다.
"금자 일백 냥이 필요합니다."
가능할까?
금자 일백 냥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인데.
땅도 팔고, 집도 팔고, 그래야 한다며 몇 달 기다리라고 하면 어쩌지?
그렇게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반 시진 안에 가지고 오겠습니다, 설 여협."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넵!"
그 말만을 마치고, 여섯 명은 신법을 발휘해 현장을 떠났다.
나한테 잡힐 때 몇 대 맞았는데, 날 노려보거나 그런 건 일절 없었다.
확실히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精銳) 무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떠난 후, 설민민을 포함한 우리 넷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저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설민민이 나에게 뭔가 질문을 한다면 말꼬를 틀 수 있었겠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괜히 말실수라도 했다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오문에 도착할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그나저나 진짜 아까 그놈들은 누굴까?
진짜 북해빙궁일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제삼의 세력이 존재하는 건가?
왜 설민민을 돕지?
그것도 직접적으로 돕지 않고, 심지어 설민민을 제대로 감시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최대한 그녀의 기감에 걸리지 않게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또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라고 말한 대상은 누구고?
언젠간 알게 되겠지.
일단, 석경간을 찾는 일에 집중하자.
그래야 그녀가 우릴 의심하지 않을 테니.
실제로 반 시진이 흐리기 전, 그들이 돌아왔다.
전표도 아닌 금자 일백 냥을 하나의 전낭에 가득 담아 돌아온 것이다.
돈도 무지막지하게 많은 놈들인가 보다.
금자 일백 냥을 어디 냇가에서 물 퍼오듯 그냥 가지고 오는 걸 보면.
점점 더 저들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하오문으로 가야겠다.
"설 부인, 가시죠."
* * *
취선루, 하오문 보정 지부.
"이곳 하북 보정에서 서쪽으로 닷새 거리, 섬서로 넘어가면 홍악산(紅岳山)이라는 산악지대가 나옵니다. 그 산은 유독 붉은색 꽃들이 많이 피는데, 그것들이 산의 암석까지 붉게 물들여 이제는 사시사철 산 전체가 붉게 보인다고 하여 홍악산이라고 합니다."
하오문 보정지부의 지부장 전향.
우리가 설민민을 데리고 왔을 때, 진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의자에 앉은 상태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꼴사나운 모습까지 보였을 정도다.
전향이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는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탁자 위에 금자 일백 냥이 놓인 후에도, 사실 전향은 금자 일백 냥보다 설민민의 눈치 살피는 것에 더 치중했을 정도다.
어쨌거나 꽤 시간이 지나서 전향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금자 일백 냥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은 것이다.
"설 부인의 아들이 지금 그곳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마 도사님."
"확실하진 않군요."
"네. 하지만 금자 일백 냥이라는 정보 값을 받을 만큼의 증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사 년 전, 홍악산을 홀로 오르는 젊은 청년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그, 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게 어떻게 금자 일백 냥 가치의 증언이란 말이오?"
"목격자는 둘이고, 둘 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청년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전향 지부장. 그들이 석경간의 얼굴이라도 알고 있던 자란 말이오?"
"아니요. 하지만 그 두 명 모두, 사 년 전 홍악산을 오르던 청년의 얼굴이 천하제일미색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것 같은, 미(美)의 신선이 선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 거의 본능적으로 시선을 설민민에게로 돌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천무휘와 한해북 그리고 전향까지 시선을 설민민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이 어느새 그렁그렁해 있었다.
무언가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것을, 이제야 찾을 수 있게 됐다는 기쁨의 눈물이 맺힌 모습이었다.
그리고 곧, 그녀가 홍악산의 청년이 자신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입으로 확인해 주었다.
"아들은…… 저를 꼭 빼닮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