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광마일기>>
(상략)
무슨 엄청난 강기의 폭발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베였다.
내 목의 삼 분의 일이 그냥 깔끔하게 베인 것이다.
진심, 딱 반 촌만 더 베였으면 정확히 기도가 상했다.
죽을뻔한 것이다.
너무 황당하고, 놀랍고, 아무튼 그랬다.
난 그냥, 첫눈에 반한 죄밖에 없는데.
아니, 실수를 하긴 했지.
그렇다고 사람 목숨을 끊으려 하나?
미친 그거라 생각했다.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미친 그거 여자.
사실, 하아!
참나.
솔직히 어이가 없긴 없었다.
그녀 말고 나 말이다.
그제야 그녀의 무공 경지가 눈에 들어왔으니.
초절정이다.
아니, 아무리 초절정이라고 해도, 내 이 갑자가 훌쩍 넘는 내공으로 어찌할 수 있다.
분명 가능하다.
그런데 내가 당한 이유는, 뭐 많이 복합적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고, 오랜 도주 생활로 몸과 마음 모두 지쳤고, 경계 자체를 아예 하지 않고 방심까지 했다.
물론!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첫 경험이란 것이다.
나 진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여자 젖가슴 만져본 거다.
정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뭔가 머리에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뇌전에 맞아 찌릿한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그러다 뭔가 불끈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그랬다.
오죽하면 목이 삼분의 일이나 뎅가당 잘렸는데 한동안 아픈 것도 못 느꼈겠는가?
내 첫 경험은 그랬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내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그녀가 재차 공격을 감행했고, 의제가 이를 막았다.
여전히 절정의 벽을 깨지 못한 의제는, 그녀의 공격 한 방에 피를 뿌리며 스무 장이나 뒤로 날아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제야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됐는지, 진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내 기감 역시 살아났다.
-의제! 안 죽었지? 일어나지 마.
-형, 형님. 아직 죽진 않았는데, 곧 죽을 거 같아요.
-어! 그래. 계속 죽은 척하고 있어.
-아, 네. 알았어요. 근데 왜요?
-방금 너와 저 계집의 격돌하는 순간, 주변에 다섯 개의 인영이 감지됐어. 최악의 순간, 놈들까지 모두 제거해야 해.
-알았어요. 계속 죽어 있을게요.
"더러운 색마, 죽어라!"
천지가 모두 검게 물들어도, 유일하게 하얀빛을 발할 것같이 아름다운 그녀에게서 들은 첫 마디였다.
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
엄청났다.
그녀는 확실히 초절정 고수가 맞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우리 현화문의 신공과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이 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절대로 그녀가 아름다워서 살려 주려 한 것은 아니다.
진짜다.
내가 잘못한 것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힘들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게, 정말 어려웠다.
최선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콰콰콰쾅!
쾅쾅쾅!
살려 주려고 했는데, 글쎄 이 미친X이…… 아나!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나의 광기와 그녀의 광기는 다르다.
내 광기는 그냥 내 광기고, 그녀는 그냥 미친 거다.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지 않겠는가?
살다 살다 정말 이렇게 미친 싸움은 나도 처음이다.
아니, 그날 이후 지금 광천동에서 지금 광마일기를 쓰며 죽어가는 이 순간까지, 그날과 같이 미친 싸움을 했던 적은 단연코 없다.
결국, 그녀도 모든 것을 걸고 말았고, 나 역시 내 힘을 모두 쏟아야 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그녀, 신이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는 그렇게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힘을 조금만 줄였어도, 죽는 것 내가 됐을 테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곧!
콰콰콰콰쾅!
수풀에서 다섯 놈이 갑작스레 튀어나왔고, 나는 일 검에 놈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동시에 쓰러져 있던 의제가 귀신 같은 신법을 발휘해 산 아래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일 각이 지나기도 전에 의제가 돌아왔다.
이미 숨을 거둔 한 사내의 시신을 둘러업고 온 것이다.
툭.
털썩.
의제도 지쳤나 보다.
아니,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도주했던 사내를 둘러업고 돌아오자마자 혼절해 버렸다.
"쿨럭, 쿨럭."
미세하지만 그녀가 살아 있었다.
나도, 의제도, 여섯 명의 정체 모를 인영도, 그리고 그녀까지.
모두 죄다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쓰러진 채로 검은 피를 연신 토해내고 있다.
화타가 살아나 그녀를 치료한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테다.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에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라도 들어줘야겠다 싶었다.
난 그렇게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상태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쓰러진 상태로 계속 검은 피를 토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원망하는 눈빛인데, 그 내면에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뭔가 굉장히 간절한 눈빛을 내게 그렇게 보내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뭐였을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면서도 찝찝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마지막 눈빛.
그걸…… 잊을 수 없다.
(중략)
하도 쫓기고, 그러다 적들을 죽이고, 다시 그 흔적을 지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 일도 거의 전문가 수준이 되어 버렸다.
나와 의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름다운 여인과 의문의 사내 여섯 명을 모두 깨끗이 묻은 후, 그 장소의 흔적들을 완벽에 가깝게 지운 후 다시 북쪽으로 도주했다.
(중략)
그날 숨을 거두며 나를 보던 그녀의 눈빛 말이다.
그게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니, 십육 년 동안 한 번도 잊지 못했다.
그날 그녀의 간절했던 눈빛이 말이다.
(중략)
몇 달이 지나, 우연한 기회에 그날 내가 죽였던 여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좀 놀랐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그랬다.
그녀의 정체는……
(하략)
* * *
"설민민이요?"
하북 보정에서도 외곽에 있는 작은 관제묘를 찾았다.
개방 분타다.
그런데 이곳 분타주 말이다.
빌어먹을 거지새끼.
내가 말하고 있는데, 계속 내 뒤에 있는 천무휘에게 대답한다.
"이보쇼, 녹두개 분타주. 내가 말하고 있지 않소!"
"어험. 아, 네. 그래서, 설민민에 대한 정보를 사러 오셨다고요?"
"그렇소."
"어험, 값이 꽤 나갈텐……."
"오리구이 다섯 마리, 화주 열 병. 됐소?"
"헤헤헤. 충분합니다, 대협. 도사님?"
"마악치라 하오. 도사 맞소."
"네, 마 도사님. 헤헤. 저희 분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천 대협."
이 거지 새끼, 계속 천무휘에게만 웃음을 친다.
"그런데 천 대협."
"이보시오, 녹두개 분타주! 내게 말하시오, 내게."
"아, 네."
녹두개는 뭔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천무휘가 뒤에 있고 내가 앞에 나서서 대장처럼 행동하는지, 그게 이해가 안 됐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내가 호통을 한 번 더 치자, 다시 시선을 내게로 향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 도사님, 저희 분타에는 글을 아는 놈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냥 말로 해 주시오."
"오리구이하고 화주는……? 헤헤헤."
"다 듣고 드리겠소. 설마 나를 못 믿……. 휴우, 천 형이 개방을 상대로 거짓말하지는 않을 것 아니겠소."
"아이쿠, 물론이죠. 물론입니다. 그럼 설민민의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 드릴깝쇼?"
"모두 다."
"아…… 모두 다요?"
"그렇소."
"네, 어렵지 않죠. 그러니까 음…… 그렇죠. 설민민은 이곳 하북에서도 북쪽인 장가구 출신입니다. 그곳에 북해무관이라는 평범한 무관 관주의 딸로 태어났죠.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고작 아홉 살이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고작 아홉 살 때부터 그 미모가 소문난 것이오"
"그렇습니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장가구와 하북 일대에서는 고작 아홉 살 아이를 두고 벌써 매파를 보내기까지 하며 난리가 났었죠. 뭐, 다들 아시겠지만, 그녀가 천하제일미로 인정받게 된 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팔십 년 만에 등장한 천하제일미녀였죠."
시대마다 천하제일고수가 있는 건 아니다.
무림십대고수니, 우내사존이니, 천하오주니, 무림사존이니 등등.
최고의 고수를 일컫는 말은 많지만, 그것의 우위를 정확히 가려내 한 사람을 천하제일고수라 모두가 인정하는 경우는 무림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천하제일미녀 역시 마찬가지다.
중원사대미녀니 무림삼대미녀니 말은 하고, 또 누가 더 예쁘네 누가 더 아름답네 말들도 많지만, 모두가 딱 한 사람만을 완전히 인정해 천하제일미녀라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녹두개의 말마따나, 설민민은 팔십 년 만에 천하 모두가 천하제일미녀로 인정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황궁에서도 매파를 보냈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 천하사대상단과 수많은 곳에서 시골의 그 작은 북해무관으로 매파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국, 천하제일미녀는 석가장(石家莊)으로 시집을 가게 됐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고작 열여덟 살이었죠."
여기까지는 대충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다.
"당시 석가장의 장주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녹두개의 질문에 우리는 멍한 얼굴로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흔일곱 살이었습니다. 설민민과는 무려 스물아홉 살 차이가 났죠."
"하! 도둑놈이구만."
의제였다.
"하지만 설민민의 아버지도, 또 설민민도 오랜 고민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석가장주의 인품과 재능, 인맥, 재산, 무공 등 실로 없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두 사람이 혼인을 한 후, 장가구 시골의 평범하고 평범했던 북해무관은, 채 삼 년이 되기도 전에 장가구 오대문파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건 쉽지 않을 텐데?"
또 의제다.
"석가장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문입니다. 황궁과 무림 그리고 상계까지, 그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죠.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집했던 신공절학 역시 엄청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북해빙궁의 신공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지요."
"북해빙궁? 뜬금없이 웬 북해빙궁이 튀어나오나요?"
또 의제다.
이 녀석이, 내 할 말을 다 빼앗는군.
뭐, 난 사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말이다.
"북해무관, 설씨 성. 뭔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아! 설마…… 북해무관 설민민의 혈통이 북해 출신인 거요?"
"하하하! 곽 대협이라고 하셨습니까?"
"곽우적이오."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다만…… 수백 년 전 북해빙궁이 중원 무림과 전쟁을 벌였을 때, 그 패잔병 중 한 명이 큰 상처를 입고 북해로 돌아갈 수 없어 이곳에 남았다가 정착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북해무관의 관주나 설민민 모두 북해에는 근처도 가보지 못했지요."
"뭐, 그럼 그냥 중원 사람 아니오?"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뿌리를 완전히 잊고 있진 않았지요. 북해무관의 무공 역시 그 기본 틀을 북해빙궁의 무공에 두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 그러면 설민민의 혼처를 두고 고심하던 북해무관의 관주에게 석가장주가 북해빙궁의 신공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결국 관주가 그 혼인을 허락했다는 말이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 부분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본 개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조건이야 다들 비슷했을 테니까요."
"천하제일미녀라면 그럴 만도 했겠네요. 각자 자신의 문파나 세가에 있는 최고의 보물을 제시했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그렇게 설민민은 석가장주의 부인이 되었고, 북해무관은 일일신우일신이라는 말처럼, 하루가 다르게 대문파로 성장을 해 나갔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북해무관의 성장세보다 설민민의 무공 발전이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이죠."
"얼굴만 천재가 아니라 무공의 자질도 천재였던 거요?"
녹두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뛰어난 무재를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천무휘 대협처럼 천재라 불릴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럼 뭐요?"
계속 의제가 묻는 중이다.
"어려서는 너무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외부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학문과 예법, 무공 수련 등등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다고 합니다. 그러다 석가장에 시집간 후에는 오로지 무공을 익히는 것에만 전념했다고 하더군요."
"석가장주가 준 북해빙궁의 신공을 익히려 그랬던 건가요?"
"그 이유도 분명 있으나, 주된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요?"
"설민민은, 석가장으로 시집간 첫날부터 석가장주의 극심한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