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처선과 처호는 떠났다.
처선의 어머니는 우선 귀정사로 보내 그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처선과 처호도 함께 귀정사에 들러 작은 사부와 천하삼분지계 등을 상의한 후 다시 움직일 계획이다.
당연히 작은 사부에게 그들을 소개할 서신을 써 주었다.
작은 사부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
처선과 처호가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그들은 둘이 아닌 수십, 수백, 수천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처호의 인맥은 엄청나다.
황궁에 있을 당시, 동창의 우두머리인 원정 태감의 임무를 수행하며 여러 분야의 재야 인재와 고수들을 두루 익혀 두었다.
그들을 만나 섭외할 것이고, 다시 그들을 통해 다른 은거 고수들도 끌어올 것이다.
또, 정파의 탄압 속에 숨죽여 살고 있는 수많은 사파의 고수와 문파를 내 이름 아래로 끌어모을 것이다.
광천마제 시절의 처선은 그렇게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내게 큰 힘을 실어줬다.
이번엔 그 당사자인 처호가 함께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들과 함께 나를 찾아올지 벌써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다.
그리고, 아!
계책 말이다.
정확히는 천하삼분지계를 실행할 두 가지 방법.
결국 뭐, 다 예상한 대로 처선이 아닌 처호의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일부러 내 힘을 숨기거나 내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그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악당을 물리치고 마두들을 치죄하라 했다.
무슨 말인지 안다.
나랑 의제랑 한해북이 뭐 빠지게 죽어라 열심히 적들과 싸워도, 결국 천무휘 녀석 명성만 더 휘날리게 될 거란 소리다.
물론 처호가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난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게, 에휴.
그런 거다.
기승전 얼굴 잘생긴 놈으로 끝나는 더러운 세상.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오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천무휘처럼 유명해지고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아지고 하지 않겠나?
꿈 깨라고?
그럼, 절반 정도만 하겠다.
딱 천무휘의 절반 정도만 유명해지고 여자들한테 인기 많아지겠다.
그것도 과하다고?
양심은 어디 팔아먹었냐고?
그래, 그럼 반의반?
더는 나도 양보 못 한다.
천무휘의 반의반 정도만 유명해지겠다는데, 그것까진 뭐라 하진 말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형님, 이번엔 하북이에요?"
"그렇다."
의제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이번엔 한해북에게 물었다.
"한 형, 하북은 뭐가 유명하오? 구절협 한 형은 모르는 게 없지 않소? 큭큭큭."
"그만 놀리시오, 곽 형. 난 한 시진가량 처선 그 친구와 심도 깊게 대화를 나눈 죄밖에 없소. 결코 내가 뭐가 잘났네 떠벌린 적 없단 말이오."
"하하, 농이오, 농. 구절 대협. 큭큭큭."
"풉! 큭큭큭."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던 천무휘까지 결국 터지고 말았다.
그러자 한해북이 쌍심지까지 켜며 그런 천무휘에게 말했다.
"아니, 천 형까지 그러시면 어쩌오?"
"미안합니다, 한 형. 그래도 전 진짜 놀랐습니다. 한 형이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줄 알았지만, 기관진식까지 꿰뚫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꿰뚫는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조금 배운 정도입니다, 어험."
"그래서요, 한 형. 하북은 뭐가 유명하오?"
다시 의제가 나서서 한해북에게 물었다.
"뭐, 다들 알지 않습니까? 하북 하면 가장 먼저 도법(刀法)으로 유명한 하북 팽가가 떠오르지요."
"그다음은요?"
"그야 석가장(石家莊) 아니겠습니까? 역사와 전통, 황궁과의 관계나 무림에서의 위치, 상계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등 여러 방면으로 유명한 가문이지요."
"근데 거기 망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디서 들었는데."
"그랬다고 하더군요. 거의 멸문 수준으로 망해 버렸다고."
"석가장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또 뭐가 있습니까?"
"그녀가 있지요."
"그녀요?"
"네. 석가장을 멸문으로 몰아넣은 그녀요."
"아! 천하제일미녀(天下第一美女)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죠. 당대에 그녀만큼 유명한 여인이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천무휘가 둘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한때는 천하제일미녀라 불리던 그녀가 어쩌다 그렇게 됐나 싶습니다."
천무휘의 말에 한해북이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그러자 천무휘와 의제 역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냐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나?
물론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한때는 천하제일미녀였다가, 지금은 천하제일광녀, 천하제일미망인, 천하제일불운녀 등등 최악의 수식어를 수십 개나 달고 살게 된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광천마제 시절의 내 목을 삼분지 일이나 뎅가당 잘라 버린 여인이기도 하다.
* * *
<<광마일기>>
(상략)
화산파와 제갈세가, 그리고 무당파에 쫓겨 몽고의 사막으로 갔다가, 몽고에서 일어난 혈겁까지 우리가 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엎친 데 덮치고,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귀주에서 처선과 을오를 구한 후, 마두에 이어 색마라는 악명까지 추가로 얻어버렸다.
처선과 을오를 구하려다가 하후세가의 무인 수십 명까지 죽이게 됐고.
덕분에 귀주의 중소방파에서도 우릴 죽이겠다며 들고 일어났다.
색마를 죽여야 한다며, 화산파와 제갈세가 그리고 무당파의 추격대에 귀주의 중소방파까지 가세를 하게 된 것이다.
나와 의제는 간신히 남월의 밀림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곳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이건 여기가 남월인지 중원인지 모를 정도로, 사방에서 중원의 언어가 들려왔다.
나와 의제를 잡으려는 화산, 제갈, 무당, 귀주 무림의 연합추격대였다.
결국 우리는 밀림에 계속 머무를 수 없었다.
남쪽의 반대, 북쪽을 향해 또 미친 듯 도주했다.
그렇게 간신히 추격대를 따돌리고 광서를 지나, 호남을 지났고, 다시 호북에 이어, 하남, 그리고 하북에 도착했다.
(중략)
강서 남창에서 시작한 나와 의제의 도주극은 어느새 일 년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다치고 지친 몸도 몸이었지만, 정신적 피로는 그야말로 나를 지옥을 몰아넣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었고, 선계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도를 닦나 싶기도 했다.
삶의 의지 자체가 꺾여 버렸을 때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길도 없는 어느 산의 기슭, 울창한 나무 사이로 길게 늘어진 바위 위에 다소곳이 앉아 무언가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녀.
아니, 사람이 맞긴 한 걸까?
날 미친놈이라 욕해도 좋지만, 그녀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내 감정 말이다.
조금 전까지, 그냥 죽어 버리는 게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내 온몸에서 활력이 넘쳐났다.
내 상황과 처지, 그리고 암울한 미래까지 모두 잊어버리게 만든 그녀다.
그녀의 아름다움 실로 그러했다.
쾌추애하(快墜愛河, 금사빠) 따위가 절대로 아니다.
이건, 이건 정말 그녀를 보는 순간, 그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감정이다.
그녀는 정녕 그렇게 아름다웠다.
내 죽었던 영혼을 되살릴 정도로 말이다.
예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하여, 한 나라의 명운을 좌지우지했다던 미녀에 관한 고사가 헛된 말이 아님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실로 그러했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턱벅터벅 걸어 다가갔다.
오랜 도주 생활로 엉망이 되어 버린 몰골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냥 멋있게, 당당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그렇게 그녀 곁으로 향했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놈처럼 말이다.
"여름이라 덥군요, 하하하."
미친 소리를 했다.
그녀는 대꾸 대신 그냥 날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마저 내 심장을 녹이는 것 같았다.
"소저, 하하하. 잠시 앉아도 되겠소? 하하하."
그냥 웃음이 났다.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난 길쭉한 바위의 끄트머리에, 그녀와 한 척가량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런데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미친놈처럼 웃고 계속 웃기만 했다.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그래서 또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지껄였다.
"오해 마시오, 하하하. 도사요, 도사. 아시죠? 도를 닦는 도사 말이오, 하하하하."
그녀는 한마디도 안 하고 계속 빤히 쳐다보기만 하지, 내 머리는 다시 새하얘졌지.
식은땀이 또 비 오듯 쏟아졌다.
뻘쭘해서 말이다.
그러다 문득!
어디서 여자들을 즐겁게 하며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다는 방법에 대해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난 짐짓 멋진 도사의 얼굴을 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도사요, 도사, 하하하. 손금…… 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오, 소저. 내가 도사로서 손금을 조금 봐 줄 수 있단 말이지요. 하하. 손을 한번 줘 보시겠소? 소저와 나의 애정운…… 어험. 소저의 미래를 보아 드리겠소."
손금?
미래?
그런 거 볼 줄 모른다.
우리 현화문은 그저 마음의 수양만을 쌓는 도문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도 그 일환일 뿐이고.
아무튼 난 그녀에게 손금을 봐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부끄러워 마시오. 도사라니까, 하하하."
슬쩍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분명 그래야 친해질 수 있다고, 어디서 들었단 말이다.
그래서 손을 쭉 뻗었는데!
그녀가 피했다.
그것도 아주 고절한 금나수의 피(避)를 이용해 내 손을 거부한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녀에게 내가 고수임을 보여 주고 싶었다.
화산, 제갈, 무당에 쫓기면서도 수백 명에 달하는 고수들을 물리치고 지금까지 버텨 온 나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도 금나수의 수법, 그것도 우리 현화문에 봉인되어 있던 금나수 중 최고의 절초를 이용해 다시 손을 뻗었다.
쉬이이익.
샤아아악.
그녀가…… 젠장!
또 피했다.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그냥 쉽게 내 상승의 금나수를 피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쪽팔렸다.
고수인 거 보여 주려고 했는데, 이게 웬걸.
너무나 쉽게 내 금나수를 피해 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상대로 전력을 다할 수 있냔 말이다.
하지만 쪽팔림을 두 번 반복할 순 없다.
그래서 살짝 내기를 주입해 속도를 붙이고 힘을 가했다.
그러자.
쉬이이이익.
타타타타탓.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보법을 밟아 피하는 게 아니겠는가?
절반의 성공이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던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살짝이지만 분명하게 묻어났다.
난.
"하하하하."
자신감에 넘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손금 좀 봐 드리려는 것이오, 소저. 하하하하."
그리고 곧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쉬이이이이익.
타타타타타탓.
샤아아아아악.
잡으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우리 둘은 그렇게 깊은 산중에서 때아닌 금나수 대결을 펼쳤다.
내공의 운용량도 점점 늘어만 갔고, 어느새 나와 그녀의 금나수 대결은 일백 합을 넘기게 됐다.
더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공을 대결할 사이가 아닌, 사랑을 나누어야 할 사이여야 했다.
그래서, 빠르게 이 대결을 멈추려 작정하고 이 갑자가 훌쩍 넘는 내공을 모두 운용.
쿠르르르르르르르릉.
주변의 대기가 진동했다.
샤아아아아아아아악.
빛과 같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탓.
보법과 수법, 모두 그녀에게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척!
잡았다.
내가 그녀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물컹.
어?
물컹?
분명 난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그 감촉이 이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를 보는 눈에, 지독한 원망이 도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난, 그녀의 눈을 향하던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런데…… 허걱!
내가 잡은 게, 젠장할!
내가 잡은 게 말이다!
손이 아니라…… 그것이었어!
그것!
그거 말야!
부드럽고 물컹한 그것!
젠장!
그리고 그때였다.
갑작스레 무지막지한 살기가 느껴지더니, 그녀가 출검과 동시에 내 목을 베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