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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두가 된 이유-85화 (85/245)

85화

<<광마일기>>

(상략)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네, 주군. 천하삼분지계입니다."

"그게 뭔데? 지금 화산파랑 제갈세가랑, 무당파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벅차. 놈들을 따돌릴 방법 없냐니까, 뭔 호랑이 뺨따귀 때리자는 소리야?"

"길게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크게 보셔야 합니다. 그들을 따돌리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수 없습니다. 천하삼분지계는 더 이상 그들로부터 쫓기지 않는 것을 넘어, 감히 그들이 주군을 쫓을 생각조차 만들 수 없게 만드는 계책입니다."

"거참, 듣기는…… 뭐, 좋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데?"

"힘을 키우셔야 합니다. 세력을 만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천하를 모두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면 아무도 날 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군."

"간단하네."

"네. 진실은 언제나 간단한 법입니다."

"간단하지만 어렵지. 불가능할 정도로."

"제가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후 처선은 정말로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는 결코 지키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내 곁에 없다.

그때보다 더 많은, 아니 천하가 전부 나 하나를 죽이려 쫓고 있는데 말이다.

(하략)

* * *

"천하삼분지계요?"

"그렇습니다, 주군."

광천마제 시절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난 누구에게도 쫓기고 있지 않다.

그런데 처호는 광천마제 시절 처선이 나에게 내놓았던 계책과 같은 계책을 말하고 있다.

아니, 이게 같은 계책일까?

일단 들어 봐야겠다.

"궁금하군요. 그것이 무엇인지요."

"천수신권과 창궁검제가 무림을 상대로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가정이 먼저입니다."

"그렇죠."

"제갈가단의 말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다지만, 그 큰 틀은 상당히 신뢰할 만한 내용입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극양신장의 화양문, 유령신검의 황룡회, 홀로 활동하는 수라섬전도까지. 거기에 더 있습니다."

"혹시…… 새외 세력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 마교라든지."

"그렇습니다, 주군. 천수신권과 창궁검제의 검은 그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렇게 세력을 나누자는 말씀이시군요. 저와 무당파, 아미파를 위시한 하나의 세력. 그리고 천수신권과 창궁검제를 위시한 세력. 그리고 천수신권과 창궁검제가 노리고 있는 나머지 세력을 하나로 보는 것이고요."

"맞습니다, 주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큰 틀에서 말씀드리자면, 먼저 힘을 키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당과 아미만이 아닌, 더 큰 세력을 만드셔야 합니다. 맨 마지막에는…… 천하를 모두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광천마제 시절의 처선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면 천하의 그 어떤 음모도 파훼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주군."

"간단하군요."

"네. 진실은 언제나 간단한 법입니다."

"간단하지만 어렵군요. 불가능할 정도로."

"저와 제 아들이 주군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기다렸다.

실로 그러할 것이다.

처호, 처선 부자라면 말이다.

"주군, 적사마적단과 녹주마적단의 활동 기간을 살펴볼 때, 적들은 이미 오랜 시간 대업을 준비한 듯합니다. 그 축적된 힘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대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엔 처선이 나서 설명했다.

"그 부분도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 음모를 주군께서 모두 밝힌다고 하여도, 결국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을 키우고 세력을 모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하를 삼등분으로 나눌 정도의 힘을요."

"그래야겠지. 힘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네 말에 완전히 동감해.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을 모으지?"

"그게……."

처선이 슬쩍 처호의 눈치를 살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저와 아버지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네, 주군. 아들 녀석과 며칠 동안 밤을 새워 논의했는데, 확실히 어떤 게 더 나은 계책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미래를 미리 보는 능력이 없는 한,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미래를 보는 능력.

나에겐 그 비슷한 능력이 있다.

"네, 주군. 그래서 저와 아버지, 각자 한 개의 계책을 주군께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 주군께서 결정 내려 주시면, 저와 아버지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떤 계책이지?"

처선이 먼저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척마검협(刺魔劍俠)입니다."

"척마검협? 뭔가…… 그럴듯한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나를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두나 대마두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진데, 이젠 마두를 베어버리는 척마검협이 되라는 것 아닌가?

"주군께서 척마검협이 되시고, 그 명성을 천하에 떨치셔야 합니다. 이미 남창 만리현에서 적수노사의 목을 베셨고, 몽고의 사막에선 적사마적단을 소탕하셨습니다. 이번엔 안순의 연쇄 간살마까지 잡으셨습니다."

심장이 떨려 온다.

처선의 목소리가 나를 흥분시키고 있다.

"칠룡사봉의 수좌. 천재에 잘생긴 외모, 그리고 언제나 의와 협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수룡검 천무휘 대협!"

천무휘 자식, 녀석도 좋은가 보다.

웃는다.

"진정한 사(邪) 중 협(俠)의 길을 걷는다! 척마검협과 목숨을 나눈 의형제! 사나이 중의 진짜 사나이, 우각도협 곽우적!"

의제 녀석, 입이 찢어진다.

입꼬리가 귀에 걸리다 못해 머리를 한 바퀴 돌고 있다.

"무(武), 문(文), 서(書), 화(畵), 음(音), 진(陣, 진식), 기(機, 기관), 풍(風, 풍류), 식(食, 식도락)까지! 하나도 익히기 힘든 일이지만, 무려 아홉 가지의 통달한 구절협(九絶俠) 한해북!"

한해북 녀석도 웃…… 어?

"잠깐! 처선, 잠깐만."

"네, 주군."

"한 형이 문, 무, 서, 화, 음까지 뛰어난 건 알아. 그런데 기관에 진식, 거기에 풍류와 식도락까지? 거짓말했다 나중에 들통나면 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어험, 마 형."

처선이 답을 하기 전, 한해북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날 불렀다.

이 녀석, 아미파에서 그 춤 선생이랑 알콜달콩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점점 천무휘와 같은 과가 되려는 것 같아 싫다.

아니, 솔직히 질투다.

"제가…… 하하. 아직 저에 대해 많이 모르시는군요? 본 지 며칠 안 된 처 형제도 저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한 형, 풍류나 식도락은 뭐 그렇다 쳐도. 정말 기관진식에 대해서도 알아요?"

"어렸을 때부터 십 년 넘게 각지에서 초빙한 훌륭한 스승님들 밑에서 사사 받았습니다. 제갈세가에서 작정하고 진법을 치면 모를까. 웬만한 진법과 기관은 설치와 해진, 해제 모두 가능하지요, 하하하."

아! 꼴 보기 싫어.

한 대 칠 수도 없고.

저 녀석, 진짜 정체가 뭐야?

"주군?"

"어, 처선. 계속해. 한 형은…… 구절협으로 해도 되겠다. 계속해."

"네. 결국 중심은 주군이셔야 합니다."

아! 심장이 또 쿵쾅쿵쾅 뛴다.

한해북을 잠시 질투했던 것도 다 잊어버렸다.

어차피 내가 중심 아니겠는가?

하하하!

"그런데……."

처선이 조심스레 시선을 나에게서 떼어 천무휘에게로 옮겼다.

"천 대협, 괜찮으시겠습니까? 천하는 네 분의 수장을 천 대협이라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 역시 다른 세 분에 대해 잘 모르고, 거의 천 대협에 대해서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운 천 대협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습니다."

앗!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너무 좋아 천무휘 녀석의 기분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나라면 엄청 짜증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지?

내가 조금 구슬려야 하나?

그런데 그때.

천무휘가 아주 환히 웃는다.

정말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입니까, 처 소협. 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아니, 마 형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고, 저는 마 형이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당연히 마 형이 수장이 되고, 그 명성 또한 마 형이 중심에 우뚝 서야 합니다. 저는 조금도 개의치 마십시오, 처 소협."

천무휘, 이 자식!

사랑한다!

조금 전에 속으로 한해북이랑 싸잡아 욕했던 거 미안해.

"그럼 다행입니다. 수룡검 천무휘, 우각도협 곽우적, 구절협 한해북. 이 세 사람과 천하를 종횡무진하며 악적을 처단하고 마두를 물리치는 정의의 척마검협 마악치! 이 이름을 퍼뜨려 알리고, 세력을 끌어모을 계책입니다."

또 떨린다.

아니, 너무 가슴이 벅차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주군께선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처럼, 계속 악적을 물리치는 멋진 활약을 하시면 됩니다. 저와 아버지는 은밀히 천하를 돌며 세력을 모으겠습니다. 아버지의 지인, 또 그들이 알고 있는 은거인들, 정파의 탄압을 피해 숨죽여 사는 사파의 고수와 세력까지.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엄청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처선은 이미 광천마제 시절, 그 일을 해냈다.

심지어 이번엔 그의 아버지 처호가 함께한다.

그때보다 더 빠르게, 더 강한 고수들을 구름떼처럼 끌어모아 내 앞에 도열시킬 것이다.

그게 처호, 처선 부자의 능력이다.

무엇보다…… 나도 유명해지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아지고, 이래저래 다 좋지 않은가?

좋았어!

바로 이것으로 결정…… 음, 처호의 표정이 심각하군.

너무 들떠 처호의 계책을 들어보는 것을 깜빡할 뻔했네.

"처 선생님의 계책은 무엇입니까?"

"주군, 선생님이라뇨. 감당키 어렵습니다."

"처 대협?"

"역시 감당키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대해 주십시오. 절 진정한 수하로 받아 주시겠다면 말입니다."

"음, 하대는 어렵고, 호칭은 선생으로 하겠습니다. 말 역시 천천히 편하게 하겠소이다. 이 정도면 나도 많이 양보한 것이니, 더 왈가불가 하지 마십시오, 처 선생."

"감사합니다, 주군."

처호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다.

내가 자신을 수하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기쁨이리라.

"그래서 처 선생의 계책은 무엇입니까?"

"전, 주군의 정체를 숨기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싫어!

내가 왜?

나도 유명해지고 싶다고!

천무휘처럼 여자들한테 둘러싸여서 하하호호 하고 싶단 말이야.

안 돼!

이 계책은 받아들일 수 없소, 처 선생!

"어찌 그리 생각하신 겁니까?"

속에도 없는 말을 해 봤다.

"전 후속 대책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다스림)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군의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게 된다면, 적들도 같은 방법을 쓰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적들이…… 날 이용한다?"

이거…… 불안하다.

"천수신권과 창궁검제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목표는 분명 극양신장의 화양문과 유령신검의 황룡회입니다. 또 이들이 아니더라도 만약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아닌 다른 곳에서 화경의 고수가 보일 조짐이 보이면, 싹부터 없애려 들겠지요. 만약 주군의 힘이 그들에 비견될 정도가 된다면, 아마 그들은 주군을 이용해 적들을 죽이려 들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일치한다.

아니길 바랐는데.

처호는 분명 적들도 그리 생각할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정말 그랬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미치겠군.

광천마제 시절의 나 말이다.

처호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결국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평생 그들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소리다.

쪽팔려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다.

아! 진짜.

도대체 나란 인간의 멍청함과 추악함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진짜 돌겠다.

이런 생각을 지금 처음 한 게 아니다.

사막을 떠나 이곳 귀주로 오는 길 기억하는가?

천무휘와 한해북에게 따로 임무를 주어 보내고, 나와 의제 단둘이 처선과 을오를 만나기 위해 들렀던 객잔 말이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저기객잔이 있던 사천에서 이곳 귀주까지 의제와 단둘이 걸어오며, 이런 고심을 포함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확실히 걷는 게 두뇌 활동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다 문득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 말고도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광천마제 시절 겪었던 내 모든 슬픔과 좌절, 절망, 배신…… 이러한 것들의 배후에 그들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형님?"

"어, 어?"

"음식, 시키셔야죠."

"난 만두하고 소면. 화주도 한 병."

그때 의제가 말을 시켜 내 이야기를 끊었다.

그 당시 생각했던 게 바로 지금 처호의 입에서 나오는 생각과 일치한다.

내 나이 스물네 살 시산마검(屍山魔劍)까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 나이 스물다섯 살 만검존(慢瞼尊).

처호가 말한 자라나는 싹이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 수라섬전도(修羅閃電刀).

스물아홉 살 극양신장(極陽神掌)과 유령신검(幽靈神劍).

서른네 살 때의 마교주(魔敎主)까지.

어쩌면 내가 그들과 싸우고, 또 그들을 죽였던 이유가!

우연이 아니라, 천수신권과 창궁검제 등의 모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처호가 조금 전 말한 이이제이.

그들이 계획하였고, 내가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것!

지금 처호는 그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난, 광천마제 시절의 나는.

정말이지 끝도 없이 멍청했고,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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