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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광마일기>>
(상략)
현안전(炫眼殿)의 전주 공손병이 달랑 서신 한 장만 남겨 두고 사패천을 떠났다.
그와 함께 현안전을 비롯한 일천오백 명에 달하는 고수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처선과 그 가족이 죽은 다음 날의 일이다.
그날 밤, 강소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러 갔던 의제가 급히 돌아왔다.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내 방의 집기까지 부수며 화를 냈다.
처선과 그 가족의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공손병을 다시 데려오라고 했다.
난, 의제의 소리에마저 귀를 닫아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그날이 내가 사패천에서 천주로 있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을오가…… 개새끼.
내 음식에 독을 타고, 등에 칼을 꽂았다.
믿었던 수하들이 모두 나에게 도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수만 명에 달하는 정파 놈들이 사패천의 그 높디높은 성벽을 넘었다.
처선이 죽던 날, 그는 나에게 이 일을 알리려던 것이었다.
공손병을 비롯한, 아직까지도 날 믿고 따르는 수하들을 규합해 그 역모를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걸, 그걸 내가.
활로 쏘고, 다리를 자르고, 혀를 뽑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 죽였다.
처선을…… 내가 죽였다.
씨팔.
미안하네, 처선.
저승에서라도, 자넬 볼 면목이 없네.
그래도 만약!
정말 만약 하늘이 내게 다시 기회를 준다면 말일세.
그때는 말일세.
내, 자네와 자네 가족들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겠네.
미안하이, 정말로.
(하략)
* * *
털썩.
처선과 처선의 아버지.
후미에 있다 처선을 발견하고 눈물을 뿌리며 달려와 부자를 끌어안은 처선의 어머니까지.
세 사람은 그렇게 서로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울고 또 울었다.
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세 사람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박아 조아렸다.
"미안하이, 처선.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제가…… 흑흑흑. 제가 나쁜 놈입니다, 흑흑흑. 죄송합니다."
그냥 울었다.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데,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땅을 부여잡고, 머리를 계속 바닥에 박아 가며 울고, 울고, 또 울며 사과했다.
"미안하이, 엉엉엉. 미안해, 정말로. 정말 죄송합니다, 엉엉엉."
곧 뜨겁게 상봉하던 처선과 그의 부모가 놀란 얼굴로 내게로 달려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맞절을 하듯 그리했다.
"주군! 어찌 이러십니까? 어찌 수하가 된 제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십니까!"
처선의 눈도 금세 새빨개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니 곧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려 댔다.
"마 도사님! 수룡검 천 대협께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저희 가족의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어찌 이러십니까? 무릎은 제가 꿇어야지요. 어서 일어나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마 도사님."
일어날 수 없었다.
백날이고 천날이고, 계속 이렇게 무릎을 꿇고 울며 사죄해야 할 것 같았다.
* * *
사막을 떠나 귀주로 향하기 전.
의제와 천무휘 그리고 한해북까지.
신통력이란 이름으로 계책을 설명해 줬다.
왜인지,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역시나 묻지 않았다.
내 지시를 그대로 받아 따라 주었다.
난 천무휘에게 무당 장문인에게 받은 무당대임서까지 광마일기에서 찢어서 줬다.
천무휘와 한해북은 그것을 들고 곧장 하후세가주를 찾아갔다.
하후세가에서 흑풍방을 공격하기 바로 전날의 일이다.
후기지수라지만, 수룡검 천무휘라는 명성은 실로 가벼운 것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무당파 장문인의 무당대임서까지 갖고 갔다.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귀주의 하후세가주가 도저히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나를 대신해 천무휘가 약속까지 했다.
하후세가주의 아들과 딸, 두 자녀의 진짜 흉수를 찾아 주겠다는 약속.
그렇게 하후세가주와 화양문에서 파견한 장법의 고수까지 사전에 내 계책에 모두 동의한 후 움직이게 된 것이다.
처선과 그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눈치 빠른 을오를 완벽히 속이기 위함이었다.
흑풍방?
나에게 그들을 살리고 말고 할 권리는 없다.
그건 하후세가에 일임했고, 그들이 멸문시키기로 결정해 그리된 것이다.
광천마제 시절 처선의 가족은 죽었었지만, 이번엔 당연히 살려야 했다.
처선과 을오가 빠져나가기 전까지, 정말 실제와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그렇게 처선과 을오가 도망친 후, 요란한 폭발 소리와 비명만 들렸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오히려 미리 데리고 갔던 의원이 처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치료했다.
광마일기에 그날, 처선의 상황이 상세 기록되어 있기에 세울 수 있는 계책이었고,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나와 의제가 처선과 을오를 객잔에서 만났고, 하후세가의 추살대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수풀에 숨었던 선발대, 정찰대가 수풀에서 피를 뿌렸던 일.
또 폭죽을 쏘고 도주하던 열 명마저 의제의 도기에 맞아 피를 뿌리며 쓰러졌던 일.
죄다 미리 준비해 뒀던 닭 피고 돼지의 피다.
말하지 않았나?
대오응결식, 의제의 도법 중 가장 화려한 초식을 썼다고.
보기만 화려하고 실제 위협적이지 않은 초식이다.
을오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고, 강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나 역시 화양문의 장법 고수를 상대로 화려하게 싸웠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사방에 폭발이 일어났고, 비명이 난무했으며,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지만, 다 내 머리에서 나온 계책이다.
아!
갑자기 감동이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건 한 번 처리하려면, 몇 번씩 실패를 거듭하고 몇 번씩 죽어야 했는데.
이번엔 한 방에 성공했다.
나도,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갑자기 기분 좋네.
아! 맞다.
처선에게 그날 내가 자르라고 했던 거?
큭큭큭.
실상은 이랬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대가는 치러야 해."
"어떤 대가든…… 치르겠습니다. 떠나게만 해 주십시오."
"잘라."
"네?"
"자르라고, 그거.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순간 처선이 급격히 당황했다.
나를 보다가 다시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다가, 또 나를 보고 아랫도리 보기를 계속 반복했다.
"뭐 해? 자르라니까."
"정, 정말 잘라요?"
"어떤 대가든 치르겠다며?"
"정말…… 자릅니다."
"잘라."
이 녀석, 진짜 자를 생각이었나 보다.
천하의 모든 남자가 우러러 공경할 그것을 말이다.
녀석이 천천히 자신의 바지춤을 풀려 했다.
"뭐 해?"
"네? 지금…… 지금 자르려고."
"그러니까. 자르라니까, 바지는 왜 풀어? 변태야? 아님, 또 나 기죽이려고 그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 말투. 눈빛. 너무 강직한 성격. 따박따박 대드는 그 태도까지. 내 진짜 수하가 되겠다면, 그것을 딱 절반만 자르라고. 좀 융통성 있게 말이야.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자네 같이 꾸짖듯 말하면 정말 듣기 싫어진다니까."
"대…… 대협?"
녀석이 놀란 눈을 떠 나를 보았다.
"너의 부모님."
"……."
"두 분 다 살아 계시다. 지금 하후세가주와 화양문의 고수, 그들과 함께 계셔. 안전하실 테니 안심하라고."
"지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를…… 절 농락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속고만 살았나. 잠시 후 뵙게 될 거야. 믿어 봐."
그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휴우. 처선,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난 빠르고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전혀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다 수룡검 천무휘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아…… 정말이었군요."
빌어먹을 녀석.
내 수하가 되기로 한 건지, 아니면 천무휘 수하가 되겠다는 건지.
아무튼 순간 질투가 좀 났다.
그렇게 모든 상황을 설명한 후, 작전대로 처선이 내 뒤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기 위해 움직였다.
"처선, 잠깐만."
"네, 주군."
"조금 전에는 대협이라며?"
"죄송합니다, 주군. 제 눈이 썩었습니다. 하늘을 보고 하늘인 줄 몰랐으나, 다시는 이런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주군."
"자식, 주군이란 말이 입에 잘도 붙는 모양이군."
"하하, 감사합니다, 주군. 그런데 왜 부르셨습니까? 곧 을오를 부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제가 빨리 몸을 숨겨야 할 텐데요."
"아, 가기 전에 소리 한 번 지르고 가라고."
"소리요?"
"응. 비명."
"아!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그럼 바로 지르겠습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렇게 된 사연이었다.
* * *
"마 도사님."
하후세가주다.
그는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그 눈이, 정말이지 많이 슬퍼 보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흉수…… 이 자를 제가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가 말한 사람은 당연히 을오다.
동공이 풀리고 창백한 얼굴이 된 상태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을오였다.
"물론입니다. 하후세가주께서 데려가셔야죠. 자녀분들의 복수부터, 저놈에 의해 비참하게 운명을 달리하게 된 수많은 영혼을 대신해 치죄해 주십시오."
"감사…… 흑흑흑. 감사합니다, 흑흑흑. 감사합니다, 마 도사님."
조금 전 처선 가족과 한바탕 울음을 쏟아냈지만, 하후세가주의 오열이 터지자, 내 눈에선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의 오열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기에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렇게 을오는 하후세가에 잡혀 귀주로 끌려갔다.
광천마제 시절 내게 하독하고 등에 칼을 꽂았던 복수를 직접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괜찮다.
하후세가주가 놈에게 지옥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
그의 눈 깊이 담긴 슬픔과 아픔 그리고 분노는, 을오가 지옥보다 더 지독한 고통을 맞이하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 * *
며칠 뒤.
"주군, 저도 받아 주십시오."
"네? 아버님을요?"
처호, 그러니까 처선의 아버지 말이다.
느닷없이 내게 이런 소리를 했다.
처선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지만, 나와 우리 녀석들은 하나 같이 놀란 얼굴을 하고 말았다.
"네, 주군. 저도 주군의 수하가 되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충성하겠습니다. 비단 목숨을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운남에서 이곳 귀주로 오는 며칠 동안, 아들과 오래도록 논의한 끝에 신중하게 내린 결론입니다. 주군께 제 목숨과 인생을 걸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 그게…… 그게 말이죠, 아버님. 그게……."
곤란했다.
사실 사패천의 천주로 있을 때, 부자가 아니라 삼대(三代)를 수하로 받은 경우도 허다하다.
아니, 그냥 가문과 문파가 통으로 내 밑으로 들어왔으니, 지금 상황이 사실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그때에 비교하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사패천을 재건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은가?
광천마제의 힘을 되찾겠다는 것도 이제는 첫 번째 목적이 아니다.
내 업보, 그것을 씻는 게 나의 첫 번째 목적이고 목표다.
그런데 처호가 저렇게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집도 돌아가셔야 하고, 할 일도 많지 않으세요?"
"주군! 적표채는 이미 저와 가족을 버렸습니다. 한번 배신한 그들과 같은 산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군을 따를 수 있게, 모실 수 있게, 목숨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아……."
눈알만 마구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좀처럼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자 처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들에게 지금 주군께서 처하신 상황에 대해 다 들었습니다. 무림의 거대한 음모에 맞서고 계시다고요."
"그게…… 아직 그게 거대한 음모인지, 단정 지을 수 있는 단계까지는 아닌데……."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주군께 드리는 첫 번째 선물로 그 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답이요? 계책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주군."
광천마제 시절, 처선의 지략은 실로 최고였다.
내가 마두가 되고 대마두가 되었음에도, 더 이상 적들에게 쫓기지 않게 된 결정적 계책도 처선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걸 넘어, 사패천이란 천하제일세력을 만드는 일 역시 모두 처선의 머리에서 나온 거대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런 처선을 가르친 아버지 처호가 지금 나에게 또 다른 계책을 선물하려 한다.
당연히 숨소리마저 죽여 그의 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뭐죠?"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