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76화 (76/245)

76화

지금의 난 스물한 번째 회귀 중이다.

참 많이도 죽고 다시 살아났군.

아무튼 지금 말고, 열 번째 회귀 때.

그러니까 내가 처음으로 귀정사를 방문했을 때 말이다.

작은 사부를 작은 사부로 모시기 전.

작은 사부를 처음 만나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대화도 있었다.

"스님."

"그래, 악치야."

"꼭 이곳에서만 응원하셔야 해요?"

"응? 그건 갑자기 무슨 말이냐?"

"아니, 막말로."

"막말?"

"앗, 죄송해요, 헤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천하를 돌며 도를 닦다 보면 나쁜 상황에 직면하고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악당들에게 납치되어 장기가 적출되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그렇지. 네 사부와 함께 다닐 때는 세상이 그냥 극락인 줄 알았는데, 그 전의 삶을 되돌아보면 흉흉하고 무서웠을 때도 많았지."

"그래서 말인데요……."

매우, 아주, 너무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당시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중요한 대화가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준비가 필요했다.

몇 번 언급했지만, 정말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어떠한 위협이나 위험이 도래했을 때의 대비.

당시 나는 작은 사부와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제가 위험에 빠지면 구해 주러 오실 수도 있나요?"

"내가?"

"네. 스님이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스님, 혹시 만에 하나 천수신권이 찾아와 이곳에서 다른 스님들 막 때리고, 사찰에 불을 내고 그러면 어쩌실 거예요?"

"무릎 꿇려 놓고 반성할 때까지 때려야지. 반나절만 때리마."

"가능해요?"

"뭐가?"

"천수신권 그 양반 무림오대고수예요. 그것도 무림오대고수 중 수좌라는 설이 거의 정설처럼 떠돌아다녀요. 한마디로 당대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천수신권이라고요."

"어험."

"스님?"

"알았다."

"네?"

"허허허,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았다는 말이다."

"도와주신다는 거죠?"

"휴우, 조금 겁이 나긴 하는구나. 오십 년 동안 이곳 덕라산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허허허. 하지만 네가 위험에 빠지는 일이 생기면 만사를 제쳐 두고 곧바로 달려가마."

"무릎 꿇려 놓고 반나절 동안 때리시게요?"

"허허, 녀석도. 그게 누구건, 딱 너에게 한 것의 열 배를 되돌려 주마. 그 정도면 되겠느냐?"

"헤헤, 충분하네요. 앗! 그런데 어떻게 연락해야 하나요?"

"음, 가만 보자. 그렇지. 아랫마을에 초가장이라는 장원이 하나 있다. 황궁의 대관을 여럿 배출한 제법 이름이 있는 명가니라. 그곳에서 전문적으로 전서구를 이용한 연락망이 있더구나. 불심이 굉장히 깊은 분들이니, 내가 부탁을 해 놓으마. 혹시 급한 일이 있으면 그곳으로 전서구를 띄우도록 하여라."

"네, 스님."

이 대화는 내가 회귀를 할 때마다, 혹시 몰라 매번 나눈 대화기도 했다.

사실 몇 번이고 작은 사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욕망이 간절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왜?

이미 답은 나와 있지 않은가.

추혼책과 각혼필, 그리고 무한 회귀와 업보.

내 업보는 스스로 씻고 해결해야 한다는 답 말이다.

그래서 정말 미칠 듯 작은 사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지금껏 잘 참고 스스로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제갈가단과 사람들의 배신, 딱 거기까지가 내 업보다.

녹주마적단의 등장 후부터는 전적으로 내 개인의 업보라 할 수 없다.

이건 분명 거대한 음모다.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그 가능성이 지금으로선 구 할 구 푼 구 리다.

거기에 천수신권과 제갈세가 그리고 극마의 고수까지 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은 빙산의 일각까지는 아니어도 일부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이번에 회귀 후 작은 사부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다.

초가장에 전서구를 띄울 필요도 없이, 귀정사에 들렀을 때 이미 작은 사부에게 상황을 다 설명했었다.

원곡에 관한 이야기도 그래서 꺼낸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작은 사부, 그러면 원곡은요? 원곡은 어땠는데요?"

"원곡은 그 무엇도 하지 못했어. 나같이 거짓말을 잘하지도 못했고, 원욱만큼 자신을 숨기는 데에 능숙하지도 못했단다. 그는 그저 타고난 그 성품, 그 사악함을 고스란히 표출시켰던 거야."

난 잠시 고민 후 입을 열었다.

"작은 사부,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야 해요. 그러니까……."

당시에도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이때도 뒷이야기가 더 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네."

"혹시 원곡에 관한 이야기더냐?"

"천수신권과 똑같이 생긴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 그래서 네가 원욱에게 쌍둥이가 있지 않냐고 물어본 것이구나?"

"네. 맞아요, 작은 사부."

"가끔 님 자를 빼먹는구나."

"작은 사부님."

"허허허, 그냥 해 본 소리다. 그런데 원곡이 어쨌다는 말이냐?"

"혹시 사막의 마적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작은 사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정사가 있는 덕라산 일대를 수십 년간 벗어난 적 없는 작은 사부는 세상 밖의 일에 귀까지 닫았기 때문이다.

"지난 십수 년간, 죽은 자의 수만 일만 수천 명에 달하고, 또 말도 통하지 않는 서역의 노예로 팔려 간 자들이 다시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설마…… 그걸 원곡이 했다는 말이냐?"

"아직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을 놓고 보면 그 배후에 원곡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백발과 흑발이 반반 정도 섞인 긴 머리를 한 노인인데, 그 외양이 천수신권과 똑같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

"이미 극마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화경이…… 아니고, 극마?"

"네. 극마의 고수. 소림의 무공으로 마기를 뿜었다고 합니다."

"내가…… 가 봐야겠구나."

* * *

"이제 맞을 시간이다, 원곡아."

우리 작은 사부 되시겠다.

뚜두둑, 뚜두둑.

작은 사부가 원곡을 노려봄과 동시에 미소까지 짓고 손을 뚜두둑 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원곡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덜덜 떨어 대기만 했다.

이 모습에 의제와 천무휘, 한해북은 덩달아 놀란 얼굴을 해 댔다.

원곡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제 죽었구나 하는 얼굴을 했던 녀석들이다.

그런데 등 뒤로 작은 사부가 등장하고, 이에 원곡이 저런 반응을 보이자, 애들마저 혼이 나간 얼굴을 해 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송암 도장님! 아미삼검 여협님! 지금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녹주마적단은 적사마적단과 한패입니다. 그들의 손에 죽은 자들이 일만 명이고, 또 지금도 서역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무고한 이들의 수만 명에 달합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십시오!"

"알았네, 마 도사."

"나무아미타불."

또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작은 사부 뒤로,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네 사람이 불쑥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허공을 밟아 가며 바람의 속도로 질주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수백에 달하는 녹주마적단 무리의 중심부였다.

그리고 곧.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콰콰콰콰콰콰쾅!

이건 뭐, 병아리 밭에 호랑이가 뛰어들고 용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무당산에서 또 아미산에서 난 이미 송암 도장과 아미삼검에게 이들의 악행과 음모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고했다.

한 명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다짐까지 받았다.

괜한 걱정이었다.

송암 도장이야 그렇다 쳐도, 아미삼검의 검은 진짜 매서웠다.

왜 아미파 하면 다들 덜덜 떠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작은 사부와 원곡의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호랑이와 용이 수백에 달하는 악독한 병아리들을 모두 으깨어 버렸다.

단 한 마리, 간사한 혀와 사악한 뇌를 가진 놈.

제갈가단만은 살려 뒀다.

송암 도장이나 아미삼검이 뭘 어쩌고 한 것도 아닌데, 놈은 모래사막에 털썩 주저앉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줌만 연신 지려 대는 모습이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죽은 제갈가단의 할비가 다시 살아나도, 송암 도장이나 아미삼검의 옷깃 하나 건들 수 없을 무지막지한 신위로 수백에 달하는 녹주마적단을 순식간에 몰살시켰는데 말이다.

그렇게 정말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게 끝났다.

나와 우리 녀석들 그리고 송암 도장과 아미삼검의 시선은 다시 작은 사부와 원곡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주먹을 뚜두둑거리며 원곡을 향해 웃고 있는 작은 사부다.

그런데 바뀌었다.

원곡.

아까의 떨림이 사라졌다.

눈동자마저 안정적이다.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극복한 것이다.

어린 시절 영혼에까지 박혀 버린 작은 사부에 대한 공포심.

그것을 원곡이 스스로 이겨 냈다.

"원곡은…… 죽었다. 난…… 이제 신이 되었다. 그리고 넌 오늘 죽는다, 원무."

원무는 작은 사부의 소림사 시절의 법명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 뒤로 피하시게들. 감당할 수 없을 터.

송암 도장에게서 전음이 왔다.

나는 물론 우리 녀석들에게까지 공동으로 보낸 전음이다.

우리는 생각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곧바로 몸을 날려 송암 도장 뒤로 자리했다.

곧, 원곡에게서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그것이 일 장, 이 장, 열 장, 백 장…… 끝도 없을 것 같은 사막의 하늘과 땅을 모두 뒤엎어 버렸다.

엄청났다.

정말 무지막지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마저 순식간에 검붉은 지옥의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대지가 흔들렸고, 모래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저,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사막의 대자연을 삼켜 버린 원곡이었다.

이 엄청난 기사에 우리 애들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겁을 하고 말았다.

나는, 나도 사실 놀랐다.

광천마제 시절의 나도 저 정도의 힘을 발휘했을까?

이 드넓은 모래의 대지를 삼켜 버릴 힘을 갖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놀람과 동시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빨리 되찾고 싶다.

광천마제 시절의 내 힘을.

그리고 그때.

"죽어라, 원무. 어린 시절의 빚을 갚겠다."

원곡이 작은 사부를 향해 움직였다.

사람이 움직인 게 아니라, 그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한 덩어리의 검붉은 화염이자 용암이 되었다.

지옥에서 분출된 악마의 불덩어리였다.

그리고 곧!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지옥의 불덩어리가 눈앞에까지 들이닥쳤지만, 작은 사부는 여전히 미소만 지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곧!

그와 원곡이 부딪혔고, 주변 수백 장의 땅이 통으로 터져 나갈 정말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다.

무지막지한 폭발이 끝나자, 하늘에서 모래의 비가 내렸다.

아니, 이건 모래의 비가 아니라 하늘이 그냥 모래 하늘이었다.

그렇게 암흑이 찾아왔고, 하늘을 가득 메웠던 모래가 절반가량 땅으로 돌아왔을 때.

오로지 어둠과 정적만이 공존하던 그곳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퍽!

퍽퍽퍽!

퍽퍽퍽!

타격음이다.

가죽을 때리는 소리.

곧.

작은 사부의 음성도 함께 들려왔다.

퍽퍽!

"이 새끼!"

퍽퍽!

"착하게 살라고!"

퍽퍽퍽!

"내가!"

퍼퍼퍽!

"몇 번을!"

퍼퍽!

"말해!"

퍼퍼퍼퍽!

퍽퍽!

"착하게!"

퍼퍼퍽!

"살라고!"

퍼퍼퍽!

"이 새끼야!"

퍼퍼퍼퍼퍽!

폭발의 영향력으로부터 우릴 보호하기 위해 앞에 섰던 송암 도장이 내 옆으로 자리를 했다.

아미삼검도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 세 녀석은 계속 내 옆에 있었고.

그렇게 내 옆에 선 일곱 사람 말이다.

얼굴을 슬쩍 봤는데.

아! 가관이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극마의 고수가 개 두들겨 맞듯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자신들이 지금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보는 얼굴들이었다.

한마디로 그냥 넋이 완전히 나갔다.

음성마저 그랬다.

송암이 여전히 시선을 구타 현장에 둔 채, 내게 물었다.

"저분…… 누구신가? 사람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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