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75화 (75/245)

75화

귀정사를 떠났다.

강서 남창 만리현의 정도 문파를 쓸어버렸다.

천무휘를 만나 내 무공을 되찾는 느낌은 언제나 황홀하다.

위산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오두막에서 제갈취무와 그 일당을 무찌르고 무당이 아닌 불산으로 도주했다.

불산에서 삼 개월간 숨어 지낸 후, 호북 무당산 뒤쪽, 훗날 광천산이라 불리게 될 산으로 갔다.

그날 송암 도장은 오십 년 만에 화경의 벽을 부술 수 있었다.

우리는 호북 이창 염산으로 가 제갈세진과 결판을 냈다.

내 무공이 늘진 않았지만, 이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광마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난번보다 수월하게 그와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무당파로 되돌아갔다.

"송암 도장님, 뭐 하세요?"

"뭐 하긴? 자네하고 한 약조 지키는 중이지."

"약조요?"

"허허, 자네가 말하고 자네가 잊은 건가? 그러지 않았나? 무당의 정의를 바로 세워 달라고."

"아, 네. 그렇죠. 그래서 뭐 하시는데요?"

"아직 부족하지만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다."

"심득요?"

"뭐, 거창하게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진 없고. 무(武)가 아닌 도(道)에 관한 깨달음을 기록하는 것이다. 욕심이 과해 나같이 어리석은 길을 또 걷는 제자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야."

"아, 그렇군요. 뭐, 그것도 중요하죠."

"자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왔군?"

"하하, 그게 보여요?"

"마 도사 자네 얼굴에 쓰여 있어, 허허허."

"그래요? 하하. 그래서 말인데…….

"뭔가? 속 시원히 말해 보시게."

"바람 좀 쐬러 가지 않으실래요?"

"바람?"

"오십 년 동안 무당산 아래로 내려가 본 적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오십 년이에요. 송암 도장님 활동하던 시대랑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요."

"허허, 아마도 그렇겠지. 그래도 지금은 할 일이 많아서…… 자네에게 한 약조도 지켜야 하고."

"아니, 그러니까 그 당사자가 좀 쉬엄쉬엄하라고 말하잖아요."

"허허, 그것도 말이 되는군.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나? 진짜 바람 쐬러 가자는 건 아닌 것 같고."

"바람, 맞아요. 대신 그냥 바람이 아니라 모래바람 좀 맞아야 할 거예요."

* * *

사막으로 가려다 의제와 천무휘, 한해북이 아주 지랄들을 해서 방향을 틀었다.

아미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무당에서 헤어졌던 첫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천무휘는 아미파의 측간들을 안방보다 더 깨끗이 쓸고 닦았다.

물론, 언제나 여럿의 아미파 제자들이 옆에 달라붙어 그의 청소를 도왔다.

한해북도 여전히 멋들어지고 재미난 강의를 이어 갔고.

젠장할!

녀석이 또 예쁜 무도(舞蹈) 선생이랑 또 알콩달콩하는 걸 봐 버렸다.

의제는 이번에도 사흘에 걸쳐 추적하고 혈투를 벌인 끝에 대호를 잡았다.

하지만 역시나 아미파 여제자들의 관심을 사는 데에는 실패했다.

"윤화 사니님, 뭐 하시나요?"

"다과를 좀 만들고 있었네. 내가 손님 접대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아 말이야. 우리 예지의 귀한 손님들인데."

"아, 네. 감사합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 건가?"

"엇? 어떻게 아셨어요?"

"자네 얼굴에 쓰여 있네."

"아! 같은 말을 하시네요, 하하."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누가 또 있었나?"

"네. 무당에서 윤화 사니님과 똑같은 말을 한 노도사가 한 분 있었어요."

"그런가? 누군지 궁금한데?"

"송암 도장요."

"송, 송암 도장님? 그 무당의 전전대 도사님이시라는…… 최근에 화경의 반열에 오르셨다는 그분 말인가?"

"네. 잘 아시네요?"

"알다마다. 그 일로 이곳 아미파도 한차례 크게 술렁였는데 말이야. 물론 어린 제자들 사이에서는 자네들 이야기가 더 뜨거운 감자였지만 말이야, 호호호."

"사니님."

"……?"

"스님은 거짓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거짓말? 내가 방금 자네에게 거짓말을 했나?"

"네."

고개를 갸우뚱한다.

도저히 자신이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윤화 사니다.

"우리 말고요. 수룡검 천무휘. 그 녀석 이야기가 뜨거운 감자였겠죠."

"풉, 호호호호, 하하하하하하."

내 말에 윤화 사니가 배꼽까지 잡으며 대소를 터뜨렸다.

이내 눈물까지 한 방울 찔끔 흘린 후에야 웃음을 삼키는 그녀였다.

"아이고. 자네 그저 뛰어난 소도사인 줄만 알았더니, 농까지 제법 잘하는군, 호호호."

"농담 아닌데요?"

"음, 사실 뭐, 그렇기도 하지. 지금도 본 파 어린 제자들이 서로 측간 청소하겠다고 난리라며?"

"네. 측간 청소 예약이 두 달 뒤까지 잡혀 있대요."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보겠군, 호호호. 그래, 인정하겠네. 수룡검 그 친구의 인기가 실로 대단했고, 지금도 대단하다네."

"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무 실망 마시게. 내 눈엔 자네가 수룡검보다 훨씬 더 뛰어나 보이니까."

"정, 정말이에요?"

"입 찢어지겠네."

"아, 넵. 하하. 하하하."

"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로 왔나?"

"아 참, 정작 찾아온 일을 잊어버릴 뻔했네요, 하하."

윤화 사니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 입에 집중했다.

중요한 일임을 그녀도 직감적으로 안 모양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좀 그렇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고수여야 하고, 아미파에 크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며, 모두가 신뢰할 만한 사람요."

"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좀 이해가 안 가는데?"

"매우 중차대한 일이 생겼습니다. 함께해 주실 분이 필요해요. 그런데 전, 지금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윤화 사니와 예지를 빼면 그 누구도요."

그녀가 입을 굳게 닫았다.

내 눈을 직시한다.

그 상태로 내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그 해법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문인 사저나 다른 장로 사자매들까지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네."

"단호하군."

"네."

"그 말에 내가 기분 나쁠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나?"

"많이요."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일을 진행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고?"

"네."

"오장로 봉화는 어떤가? 다른 사자매들이라면 몰라도, 봉화는 내가 갓난아기 때부터 기저귀를 갈아 주며 키우다시피 했네. 정말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봉화는 믿을 수 있다네."

"약해요."

"약…… 약해? 봉화가?"

오장로 봉화 사니.

무당파에서 예지에게 검을 빼앗고 혈도를 짚어 혼절시킨 그 장로다.

무당파 장문인까지 보증을 설 정도로 그 인품도 훌륭하다.

하지만 절정의 고수다.

이번 일에 함께하기에는 아직 무공과 파급력 모두 조금씩 부족하다.

봉화 사니보다 훨씬 더 큰 그릇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이건, 말을 뱉는 순간 그것이 진실이 될 정도로 무게가 있고 큰 그릇.

"장문인 사저는 우리 아미의 대표네. 무공은 고강하고, 그 인품 역시 믿을 만하다네."

"다른 문파와 많은 교류 갖고, 많은 관계를 맺으며, 또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죠."

"아…… 그렇지.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장문인에 관해선 나도 이미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안 된다.

만약 저들이 꾸미는 거대한 음모의 뿌리가 내가 예상하는 깊이까지 뻗어 있다면, 장문인이라고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지금 내 상황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시 윤화 사니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번엔 정말 오랜 시간 고민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이내.

"자네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려면 그분들밖에 없네."

"그게…… 누구죠?"

"아미삼검(峨嵋三劍)."

* * *

윤화 사니의 서신을 품에 품고 길을 떠났다.

예지와 단둘이 떠난 길이다.

먼 길은 아니고, 산을 다섯 개 넘으면 되는 거리다.

완연한 절정의 고수인 예지에겐 이런 산을 다섯 개 정도 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내공 운용이 금지된 상태라 신법을 펼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천천히 걸은 건 아니다.

일부러, 그녀와 단둘의 시간을 더 갖고 싶어 천천히 걸었다.

그래도 해가 지기 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미삼검이다.

아미파 전대의 고수들.

지금으로부터 십일 년 전.

예지가 아홉 살 때, 윤화 사니의 손을 잡고 아미파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복마전을 찾아갔을 때 말이다.

당시 우연히 십오 년 만에 은거를 깨고 자신의 심득을 전해 주려 아미산 본산에 내려왔던 전대의 아미파 여승이 있었다.

예지의 눈에서 화기를 처음 발견했던 그 전대의 고수.

그녀다.

그녀가 아미삼검 중 일인이다.

윤화 사니의 말에 따르면, 아미삼검은 아미파 전대의 최고수라 했다.

하나가 아닌 언제나 셋이 싸웠고, 그 아미삼협검(峨嵋三俠劍)은 능히 화경의 고수까지 제압하는 신위를 보였다고 했다.

더군다나 예지를 만나기 전 십오 년과 예지를 만난 후 지금까지 십일 년.

도합 이십육 년 동안 딱 한 차례 심득을 전해 주러 아미 본산에 내려온 걸 빼면,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어 산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이들이었다.

문제는, 하하하하!

윤화 사니 왈.

‘그분들께서 아직 살아계신 지…… 그걸 모르겠네, 마 도사.’

제발 살아 있어라.

송암 도장은 일백이십 세도 넘게 사는데.

아직 백 살도 안 된 어린 분들이 벌써 돌아가시면 안 되지.

그렇게 가슴을 졸이며 그곳에 도착했다.

다행히 모두 살아 있었다.

* * *

"너는 분명 그때 그 아이…….

"속가제자 금예지가 아미삼검 사조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십일 년 전, 예지의 눈에서 화기를 보았던 그 비구니인 듯하다.

당시 꼬맹이었을 예지가 이미 나에게 시집을 와도 될 정도로 다 큰 어른이 되었음에도, 대번에 알아보고 놀란 눈을 떴다.

"나무아미타불.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화기를 잘 다스리고 있구나. 나무아미타불."

곧이어 다른 아미삼검 두 사람까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대 무림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는 아미삼검은 그저 산골에 사는 소박한 할머니들이었다.

예지를 두고 한참이나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수다를 떨었다.

몇 번이고 손뼉을 치며 감탄하고 탄성을 뱉어내었다.

또 예지가 화기를 다스릴 수 있게 노력한 장문인과 장로들, 그리고 윤화 사니를 입에 침이 마를 때까지 칭찬했다.

그렇게 그녀들의 수다는 오래 이어졌고.

어느새 깊은 어둠이 산속에 찾아왔다.

"그런데 자넨 누군가?"

빨리도 물어보시네.

"아까…… 아닙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현화문의 마악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윤화 사니가 써 준 서신입니다."

난 그렇게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 * *

"저는! 제갈세가입니다!"

모두 죽었다.

다 끝났다.

아니, 한 명.

내가 주시하고 있던 놈.

제갈가단만이 마지막까지 대여섯 명의 마적단을 상대로 홀로 버티고 있었다.

다시 사막이다.

적사마적단의 본거지.

적사마적단의 대부분은 죽었다.

일부가 도망을 쳤다.

우린 살았고, 뜨거운 환호성은 끝이 날 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이 우릴 향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돌을 던지며…… 죽이라 외쳤다.

의제와 천무휘, 한해북은 다시금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쳐들어왔다.

녹주마적단이다.

백리세가와 녹주마적단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싸움을 이어 갔다.

그리고 백리세가의 일장로가 막 녹주마적단 두목의 숨통을 끊으려 할 때.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극마의 고수.

원곡이다.

이상했던 기운, 하지만 완전히 생소하지만은 않았던 원욱의 기운.

마기였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싸움을 끝냈다.

사막의 모레 위로 시체가 산을 만들고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

그때 제갈가단이 외친 것이다.

"저는! 제갈세가입니다!"

놈은 무릎을 질질 끌어 원곡 앞에까지 다가가 울고 불며 애원했다.

그리고 결국, 원욱은 그를 살려 주기로 결심한다.

"일 년을 주겠다. 제갈세가가 그간 보였던 노력을 보아 특별히 주는 기회다. 만약 일 년 안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내 친히 제갈세가를 방문할 것이……. 쯧쯧, 쥐새끼가 있었군."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처럼, 정말 거짓말처럼 원욱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두 손이 짙은 마기의 강기로 물들어 갔다.

그때 내가 외쳤다.

이번엔 비굴하고 간사한 웃음을 지을 필요 없다.

"지금입니다!"

그리고 곧.

내 등 뒤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검붉게 물든 권강(拳剛)으로, 일권에 내 머리를 부수어 때려죽이려던 원곡의 몸이 순간 돌처럼 굳어 버렸다.

아니, 내 머리를 부수기 위해 위로 번쩍 치켜올렸던 그의 손과 팔 그리고 그의 온몸이 굳어 버리는가 싶더니, 이내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의 동공은 더 심했다.

진짜 눈 속에 무슨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오로지 등장만으로, 극마의 고수인 원곡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이제 맞을 시간이다, 원곡아."

우리 작은 사부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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