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저는! 제갈세가입니다!"
모두 죽었다.
다 끝났다.
아니 한 명.
내가 주시하고 있던 놈.
제갈가단만이 마지막까지 대여섯 명의 마적단을 상대로 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놈이 극마의 고수를 향해 그리 소리친 것이다.
마지막 내공까지 쥐어짜, 그것을 모두 목소리에 실은 외침.
일순간,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로 이루어진 현장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놈에게 쏠렸다.
극마의 고수 역시 마찬가지다.
극마의 고수는 대꾸 대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제갈가단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목숨과 같이 소중히 여겨야 할 검마저 땅으로 던져 버리고 꿇은 무릎이다.
그러더니 놈은 그 상태 그대로 시체와 피의 모래사막 위로 무릎을 질질 끌어 가며 극마의 고수 쪽으로 움직였다.
"대협! 대협! 저는 제갈세가의 혈통입니다. 제갈세가 일장로가 제 아버지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대협!"
결국 제갈가단이 울부짖음과 같은 외침을 하며 무릎을 질질 끌고 극마의 고수 앞에까지 다가갔다.
극마의 고수는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구기기만 했다.
"대협!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제갈세가가 대업을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지 말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
극마의 고수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갈가단은 다급해 보였다.
아! 참고로 난 지금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빠르게 광마일기에 기록 중이다.
"대협! 대협께서…… 대협께서 이곳에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만약 대협께서 이곳에 계신 줄 알았다면, 제가 어찌 이런 무모한 짓을 벌였겠습니까? 살려 주십시오."
"……."
대꾸하지 않는 극마의 고수.
고심하는 것 같다.
제갈가단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이내 똥줄이 진짜 바싹 다 타 버리고 만 얼굴을 한 제갈가단이다.
그러면서도 제갈세가의 종자답게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게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눈동자를 통해 다 보였다.
"살려만 주신다면, 만약 이 미천한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저와 제 아버지, 그리고 제갈세가는 분명히 이 은혜를 열 배 또 백 배와 천 배로 그분께 갚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꼭, 꼭 그분께 오늘의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대협."
그분?
역시 천수신권인가?
쌍둥이야?
그런데 왜 저자는 이곳에 있는 것이지?
여전히 내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극마의 고수가 입을 열었다.
"네 어리석은 행동으로, 대업에 얼마나 큰 지장이 생겼는 줄 아느냐?"
"그, 그게…… 제가 이곳이 그것과 연관된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쯧쯧쯧, 적사마적단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대업에 쓰이는 자금의 삼 할을 책임지고 있었다. 심지어 혈수만기 서석을 초절정 고수로 만드느라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쏟아야 했다. 그걸…… 네가 하루아침에 다 망가뜨린 것이야. 네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살려 달라는 것이더냐?"
푹!
제갈가단이 무릎 꿇은 상태 그대로 모래에 자신의 머리를 처박았다.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떠는 게, 그가 지금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나저나 대업은 또 뭐야?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나?
아! 돌겠네.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갚겠습니다! 해결하겠습니다! 저희 세가를…… 제갈세가를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머리를 모래에 박은 상태로, 제갈가단이 절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극마의 고수는 그런 제갈가단을 한참이나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결국.
"일 년을 주겠다. 제갈세가가 그간 보였던 노력을 보아 특별히 주는 기회다. 만약 일 년 안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내 친히 제갈세가를 방문할 것이…… 쯧쯧. 쥐새끼가 있었군."
아!
씨팔.
걸렸다.
왜 항상 전개가 이렇지?
저 노인네는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죽는다는 소리다.
언제나 그렇듯,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젠 사실 죽는 게 그렇게 두렵지도 않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 열라 빠르게 이 상황을 모두 광마일기에 적었다.
아니, 거의 다 적었을 때.
거짓말처럼 조금 전 제갈가단 앞에 있던 극마의 고수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 애들, 상황 파악은 했을 테다.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자임을 모두 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나타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도검을 뽑아 겨눴다.
난, 아니다.
"잠, 잠깐! 다들 진정하시고. 하하하. 반갑습니다, 대협. 하하하. 전 현화문의 마악치라고 합니다. 들어보셨죠?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현화검존께서 몸담고 계셨던 그 현화문 말입니다, 하하! 하하하."
비굴하게 웃었다.
간사하게 웃었다.
한 손에는 광마일기를, 또 한 손에는 각혼필을 쥔 상태로 그렇게 비굴하고 간사하게 웃으며 극마의 고수에게 한발 다가갔다.
의제와 천무휘, 한해북이 기겁을 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것뿐이다.
됐다.
안 죽인다.
개고생하지 말고, 정보 하나라도 더 얻자.
"하하. 반갑습니다, 대협. 하하하. 사막 날씨가 무척 덥군요. 하하."
"……."
안 죽인다.
그래, 물어보자.
"기왕 죽이실 거,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하. 정말 궁금해서 그렇거든요. 하하하. 정말, 정말로 궁금해요."
"……?"
내가 뭘 물어볼지, 극마의 고수도 궁금했나 보다.
계속 안 죽인다.
심지어 고개까지 갸우뚱한다.
날 미친놈이라 생각하는 걸까?
상관없다.
어차피 죽는데, 미친놈이면 어떻고 파친놈이면 또 어떤가?
물어보자.
"대협, 진짜! 진짜로 이것만 알려주세요. 천수신권 원욱 대사와 무슨 관계에요? 쌍둥이에요? 누가 형인데요?"
쉬이익.
세상이 빙그르르 돈다.
툭.
내 머리가 모래 위에 떨어졌다.
이것이 나의 스무 번째 죽음이다.
* * *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동굴에서…… 아! 누군지 못 알아냈나 보군.
광천동에서 하루 만에 나와 집으로 갔다.
언제 보아도 우리 사부는 좋다.
사부에게 삼재검법을 가리키고.
구산사괴는 안 왔다.
사부와 함께 십간산을 돌며 수양을 쌓았고, 유람을 떠났다.
유람을 돌며 간간이 탁발도 했다.
역시나 전낭이 묵직하다.
절강 항주에서 무적 할매와 초향을 만났다.
이제 초향을 보면 눈물보다 웃음이 앞선다.
이번에도 초향과 원 없이 놀아 줬다.
역시나 숨바꼭질이 제일 어려웠다.
그리고 귀정사로 떠났다.
작은 사부가 있는 귀정사.
천수신권 원욱 대사를 떡돌이로 부려 먹던 작은 사부라면, 분명 무언가 알고 있을 테다.
* * *
"작은 사부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허허, 녀석. 매일 물어보면서 매일 같은 소리구나. 그래, 얼마든지 물어봐라."
"이번엔 좀 그런 거래서 그래요."
"뭐가 그런 건데?"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이요."
"음, 요 몇 년 천수신권이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 녀석이 궁금한 것이냐?"
역시 우리 작은 사부답다.
천수신권을 ‘그 녀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번엔 그 녀석이 아니다.
그 녀석의 쌍둥이다.
"네, 궁금해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 번 더 들어야 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내가 진짜로 궁금한 부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었단다."
"작은 사부."
"그래, 더 궁금한 게 있느냐? 그 녀석에 대해선 다 말해 줬는데."
"아니요. 제가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혹시 그 녀석…… 아니지, 큭큭. 천수신권한테 혹시 형제가 있었어요?"
"엇? 그걸……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꽤 놀란 눈을 하는 작은 사부다.
"허허, 별일도 다 있구나. 나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인데 말이다."
작은 사부는 먼 산을 보며 잠시 회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이다. 그때 녀석들의 나이가 열두 살인가? 열세 살인가? 아무튼 막 코에 솜털이 날 때쯤이었지. 동생 녀석이 소림에서 파문을 당했단다."
"파문요?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 어린 나이에 파문까지 당해요?"
"소림사에 들어왔을 때부터, 원욱이나 원곡 모두 꽤 음침하고 나쁜 짓을 많이 했단다. 그 둘의 사부가 둘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 원욱은 금세 다른 동자승과 같은 모습이 되었어. 하지만 원곡은 아니었다. 계속 어두웠고, 계속 음침했으며, 계속해서 나쁜 짓을 이어 갔단다."
잠시 말을 멈춘 작은 사부가, 얕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따돌림에 괴롭힘까지 많이 당했다. 실은…… 내가 제일 많이 때리고 괴롭혔단다. 그래서 어른 스님들보다 나를 더 무서워했지. 파문당하기 직전 몇 번은, 나를 보자마자 입에 거품을 물로 쓰러져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단다. 오줌도 지리고. 나무아미타불. 그래서 그랬는지, 무공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결국 장서각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마공에까지 손을 대고 말았지."
"그래서 파문당한 거군요?"
"그렇다."
"그 정도 중죄면 단전 파괴하고 근맥 자르고 그러지 않아요?"
"허허, 실제 그렇다. 아무리 소림이 불도를 닦는 곳이라 해도, 마공에 손을 댄다거나 기사멸조의 죄를 지어 파문당하게 되면 그러하지."
"그런데…… 안 그랬죠?"
"허허, 녀석. 그것까지 아느냐? 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니까. 열다섯 살 미만의 어린 소동에게는 그 형벌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대세가는 몰라도, 구파일방은 거의 다 그런다고 알고 있다."
아! 그래서 그자가 멀쩡히 무공을 익힐 수 있었던 거였고.
덕분에 그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죽고, 또 말도 통하지 않는 먼 나라의 노예로 팔려 가게 됐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혼낼 건 혼내고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해야 다른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
"파문했다고 끝이 아니다. 만약 소림 밖으로 나가서 문제를 일으키면 그 즉시 소림에서 출동, 치죄를 한다. 약조와 맹세까지 받고서야 소림사를 떠날 수 있단다."
"그 후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어요? 사람 쉽게 고쳐지지 않을 텐데요."
"소식이 끊겼다. 소림에서 붙였던 스님을 따돌리고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더구나."
"그 후에는요? 영영 찾지 못한 거예요?"
"최소한 내가 소림에 있을 때까지는 그랬다. 당시 원욱이 항시 내 곁에 있었기에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당시 천수신권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게 이상하게도 애매했다. 쌍둥이 동생이 파문당했는데, 크게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지. 먼 훗날, 그러니까 내가 이곳 귀정사에 자리를 잡고 지난날을 참회하다가 떠올랐는데 말이다."
"……."
"원욱이나 원곡 모두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들에게는 광기가 아닌 다른 기운이 있었겠지. 그게 무엇이든 좋지 않은 기운일 테야."
"기운요?"
"딱히 기운으로 단정 지을 순 없고. 타고난 성품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옳겠구나."
"성선설, 성악설. 이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나도 그렇고, 그 쌍둥이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나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게 타고난 천성이란다. 악인이 될 운명이었고. 다만…….
"……?"
"나는 워낙 잘나고 또 거짓말로 나 자신을 잘 포장했지. 원욱은 나와 반대로 스스로를 숨기는 데에 특출났다. 감쪽같이 소림 어른들의 눈과 귀를 속였다."
"아……."
조금 놀랐다.
아니, 많이 놀랐다.
천수신권에 대한 평가.
세인들의 것과 작은 사부의 평가는 완전히 상반됐다.
하지만 분명, 난 누구의 평가가 더 정확한지 알고 있다.
당연히 작은 사부다.
부처는 부처를 알아보고, 돼지는 돼지를 알아보며, 살인자는 살인자를 알아보는 법이다.
사부는 진즉 천수신권이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작은 사부는 우리 사부를 만나 개과천선하게 됐고, 천수신권은…… 모르겠다.
알 것 같지만, 단정 짓지 않겠다.
광마일기에도 욕이 한가득 이지만, 그것도 신뢰하지 않겠다.
그건 내가 나쁜 놈이었을 때 쓴 거니 신뢰할 수 없고, 작은 사부의 평가도 거의 오십 년 전의 일이니까 말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천수신권은 무려 오십 년 동안 소림사에서 불도를 닦고, 불가의 무공을 익혔다.
사막에서의 기록이 다시 그를 의심하게 만들지만, 일단 기록만 해 두자.
천수신권에 대한 판단은, 직접 내가 겪은 후 다시 해도 늦지 않는다.
"작은 사부, 그러면 원곡은요? 원곡은 어땠는데요?"
"원곡은 그 무엇도 하지 못했어. 나같이 거짓말을 잘하지도 못했고, 원욱만큼 자신을 숨기는 데에 능숙하지도 못했단다. 그는 그저 타고난 그 성품, 그 사악함을 고스란히 표출시켰던 거야."
난 잠시 고민 후 입을 열었다.
"작은 사부,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야 해요.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