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광마일기>>
(상략)
참, 광마일기를 쓰다 보니 드는 생각인데.
내 인생도 진짜 기구하다, 기구해.
무공에 무 자도 모르는 우리 사부는 구산사괴한테 잔인하게 죽었지.
우리들의 첫사랑.
금 형은 이름도 모른다.
누구한테 왜 죽었는지도 모른다.
난 첫사랑마저 지켜 주지 못하고 죽게 했다.
그리고 빌어먹을 정파 놈들에게 얼마나 쫓기며 손에 피를 묻혔던가.
그렇게 사막까지 도주했는데, 씨팔!
아! 또 열받네.
열받으니까, 화산검후 그 계집한테 맞은 칼빵 아흔여덟 군데가 다시 쓰라려 온다.
사막에서는 진짜 너무 심했다.
생각만 해도 또 피가 거꾸로 솟네.
불쌍해서.
약자들 아닌가?
그래서 목숨 걸고 도와줬더니, 나와 의제를 향해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욕을 했다.
우리더러 마두라며 소리쳐 죽이라 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사실 지금에야 일기를 쓰며 욕을 해 대지만, 그때는 욕도 안 나왔다.
밤샘 싸움으로 몸도 지쳤지만, 정신적 충격이 진짜 너무 컸다.
갑자기 극도의 정신적 피로와 무기력증이 내 몸에 들이닥쳤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냥 그대로 죽는 게 낫다는 생각뿐이었다.
딱 한 가지 생각.
약하고 불쌍하다 하여, 모두가 착한 건 아니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무리 약자라 하여도 섣불리 돕지 않았다.
현화문의 작은 도사 마악치의 마음에, 제대로 된 마심(魔心)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중략)
대마두가 된 이유?
사부의 죽음.
첫사랑의 죽음.
거기에 목숨을 걸고 도왔던 약자들의 생각지도 못했던 배신까지.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다.
이런 일 연이어 겪어 보라고.
그러면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대마두가 될 테다.
아니, 지옥대마왕이라도 되어 버릴 것이다.
(하략)
* * *
난 괜찮았다.
이번엔 무기력증 따위는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천무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의 상황은 달랐다.
살짝 옆에 있는 녀석들을 보았더니, 셋 다 동공이 풀려 있었다.
사람들이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욕을 해 댔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욕설과 침 그리고 돌을 온몸으로 맞고만 있었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극도의 무기력증이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이다.
순간 크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됐다.
나와 의제도 이 아픔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성장했으니 말이다.
천무휘와 한해북도 이 충격을 극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두들을 포박해라! 반항하면 즉각 사살하라!"
"넵!"
백리세가 무인들이 겹겹으로 우릴 포위하고, 또 천천히 그 포위를 좁혀 왔다.
우리를 완전히 제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들이었다.
난 초조하지도, 또 불안하지도 않았다.
왜?
아! 왔다.
"장로님! 적들이 몰려옵니다!"
"경계 태세를 갖추어라!"
저 멀리,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엄청난 무리가 이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마디로 돌풍과 같은 속도다.
백리세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사막의 환경에 적응한 이들이란 뜻이다.
그리고 곧, 그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녹주마적단입니다! 오백여 기로 보입니다!"
이장로가 서둘러 일장로에게 물었다.
"어찌할까요, 형님?"
"일단 경계 태세를 유지해라."
"네, 형님."
다시 제갈가단이 일장로 곁으로 다가갔다.
"백리 대협, 녹주마적단은 적사마적단과 다르다 들었습니다."
"아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네, 대협."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절반은 여전히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삼백 중 절반, 일백오십 명으로 오백에 달하는 녹주마적단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계 태세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경계 태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형님! 저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십여 장까지 다가온 녹주마적단.
저들의 속도라면 순식간이면 이곳에 닿을 거리다.
이장로가 다급히 일장로에게 말을 했으나, 일장로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일장로가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
"모두 죽여라!"
녹주마적단 두목의 외침.
녹주마적단이 말을 탄 상태로 우리 진영으로 뛰어들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퍼퍼퍼퍼퍼펑!
"으아아아아악!"
"살려 줘!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했고, 피가 소나기처럼 뿌려졌다.
순식간에 피의 난장으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의제, 천 형, 한 형, 정신 차리세요."
목소리에 은은한 기운까지 실어 그들을 일깨웠다.
완전히 온전한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넋이 나간 상태로 멍하니 있던 눈동자에 초점이 조금은 돌아왔다.
"가죠. 떠나요."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쉬이이이익.
"끄아아아악!"
내가 시선을 녀석들에게 고정한 상태로, 우리에게 달려들던 마적 세 놈의 목을 한 번에 베었다.
그놈들의 피가 의제와 천무휘, 한해북의 머리 위로 뿌려졌다.
"움직입시다. 정신들 차리고."
내기를 조금 더 실었고, 목소리도 좀 더 높였다.
이내.
천무휘가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의제와 한해북이 이를 따랐다.
내가 선두에서 피의 난장이 된 이곳의 활로를 찾아 움직였고, 녀석들이 그런 내 뒤를 바싹 뒤쫓았다.
우리는 곧, 그 지옥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
<<광마일기>>
(상략)
녹주마적단이 공격해 오자마자, 나와 의제는 그 혼란한 틈을 타 도주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타고선 미친 듯 달렸다.
우리 뒤로 살려 달라는 외침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지만, 귀를 닫아 버렸다.
축생(畜生)의 울부짖음 따위를 내 귀에 담을 마음 따윈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사막을 떠나 다시 중원에서 도주를 한 지 몇 달.
나와 의제는 뜻밖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적사마적단의 전멸.
그것까진 우리 손으로 했으니 놀랄 일이 없었다.
인질 전멸 중 생존자 한 명.
제갈세가 일장로 양원검풍 제갈세현의 장자 제갈가단.
뒤이은 이 소문이 나와 의제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갑작스럽게 기습을 감행했던 녹주마적단에 관한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제갈가단이, 녹주마적단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문 덩어리인 게 많다.
어떻게 그곳에 있던 그 많은 사람이 모두 죽을 수 있었지?
아니, 애초에 녹주마적단은 왜 그때 공격해 왔던 거야?
이해되지 않는 점은 또 있다.
제갈가단은 어떻게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왜 녹주마적단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선 개방과 하오문도 전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제갈가단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게 두 정보 세력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략)
* * *
"힘을 더 내라! 우리는 백리세가의 최정예다! 마적단 따위는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모두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두 무리의 충돌.
첫 기세는 녹주마적단이 압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백리세가의 일장로 시류검 백리명손은 제대로 된 고수였다.
또 백리세가의 두 무력대, 폭성검조대과 백화유무대 역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비한다고 해도 밀리지 않을 제대로 된 무인들로 조직되었다.
싸움이 중반에 이르자, 그 누구의 우세도 점치기 힘들 만큼 치열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와 의제, 천무휘, 한해북은 사막 언덕에 몸을 숙이고 이 싸움을 지켜보는 중이다.
내가 저들에게 건넨 시험 그리고 기회.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팽팽한 싸움에 우리가 가세를 했다면, 싸움은 곧바로 끝났을 것이다.
백리세가와 사람들 모두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시험을 배신했고, 내가 준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나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돌을 던지며 죽이라 했던 이들을 도와줄 만큼 나는 착한 도사가 아니다.
아니, 도사고 신선이고 나발이고.
씨팔!
도울 생각 털끝만큼도 없다.
마음 약한 천무휘의 표정이 조금은 슬퍼 보이고, 의제와 한해북의 얼굴 역시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 나서서 도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됐다.
생각하지 말자.
양심?
개나 줘 버려.
퉤!
내가 지금 봐야 할 것은, 평판이 좋았던 녹주마적단이 왜 이들을 공격해 왔고 잔혹하게 죽이는지.
또 어쩌다 팽팽한 이 싸움이 백리세가와 상단 사람들의 전멸로 끝났으며, 마지막으로 제갈가단이 어떻게 홀로 살아남았냐 하는 것이다.
좀 더 지켜보자.
* * *
콰콰콰콰콰콰콰쾅!
"사막의 악적! 목을 내놓아라!"
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시간이 꽤 흘렀지만 싸움은 여전히 그 어느 쪽의 우세라 할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한 곳.
백리세가의 일장로와 녹주마적단 두목 간의 싸움은, 미세하지만 그 우위가 조금씩 갈리기 시작했다.
정파의 내공이란 게 그렇다.
무게 있고 깊게 자리한다.
반면 녹주마적단 두목의 내공은 빠르게 고갈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일장로의 우위를 판단한 시점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목은 급격히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만약 두목이 죽는다면, 녹주마적단은 사기가 꺾일 것이고, 그러면 백리세가와 상인들이 이 싸움에서 이길 텐데.
왜지?
다시금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끝이다, 악적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이미 검은 피를 토하며 스무 걸음이나 뒤로 밀렸던 두목을 향해, 일장로가 회심의 일격을 쏟아부었다.
정말 끝이다.
이건 저 두목이 막을 수 없다는 게 나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때!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어?
엄청난 폭발.
비단 일장로에게만 향한 게 아니다.
사람 머리 크기의 강구(剛球), 강기로 만들어진 구슬이 아홉 개다.
그것이 마치 유성과 같이 긴 꼬리를 그리며 빠르게 뻗어 나갔다.
일장로에게 하나.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일장로는 육편이 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다시 남은 여덟 개의 강구.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곧바로 사방에서 죽음의 비명과 절규가 난무했다.
정확히 여덟 곳에서 그 폭발이 일었다.
백리세가의 이장로를 포함, 한참 치열하게 싸우던 백리세가의 무인들과 상단 표사 등이 팔 할가량이 즉사했다.
말이 안 된다.
이건…… 이건 우리가 가세한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힘이다.
인물이고.
심지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어쩌면 광천마제 시절에는 겪어 봤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생소하고 이질적인 기운마저 느껴진다.
그것도 무지막지를 넘어 살이 다 떨려 올 정도로 무서운 힘이고 기운이다.
뭐지?
이 힘의 정체는?
그보다, 초절정이 아니다.
화경이다.
확실하다.
갑자기 화경의 고수가 나타났다?
뭐야?
사막에 왜?
마적단 따위에 어떻게 화경의 고수가 있는 거냐고?
"잔당들을 모두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조금 전 백리세가 일장로에게 죽을뻔했다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간신히 살아난 두목이 소리쳤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도주하려 해도 사막 위에서 그들의 마수를 벗어날 순 없었다.
저항해도 죽고, 도주해도 죽었다.
다 죽었다.
이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들이 전멸했는지.
그런데 정말 저자는 도대체 누구야?
폭발의 여운이 가시자 그 모습을 드러낸 고수.
화경의 고수.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섞인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는 듯, 그렇게 모래사막 위에 홀로 서 무표정한 얼굴로 학살을 지켜보고 있다.
정말 누굴까?
내가 그런 의문을 심각하게 품고 있을 때.
-원욱…… 원욱 대사…… 천수신권……
한해북이다.
한해북이 경악한 눈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전음마저 툭툭 끊기고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무슨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천수신권이 여기서 왜 나와?
아니, 그보다!
빡빡머리가 아니잖아.
내가 전음으로 그런 생각을 말하려고 할 때.
천무휘의 전음이 먼저 들려왔다.
-소림의 권법입니다. 하지만 기운은…… 소림의 기운이 아닙니다.
얘는 또 왜 이래?
소림의 권법이라니?
한해북하고 천무휘가 동시에 미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둘 다 너무 멀쩡하다.
크게 놀랐지만, 그들의 눈이 조금 전 무기력증이 찾아왔을 때보다 더 또렷한 정신 상태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천수신권이라니?
그때 다시 천무휘의 전음이 들려왔다.
-화경이…… 아닙니다. 극마(極魔)의 고수입니다. 소림의 권법을 익히고 마공을 운용하는…… 극마의 고수.
씨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