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광마일기>>
(상략)
생각났다!
변아학이라는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
서강상단의 장자로, 어려서부터 그 상재가 뛰어나 아홉 살부터 상단주인 아비를 따라 비단길을 오갔다고 했다.
올해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로, 처음으로 혼자 상단을 이끌고 비단길 상행에 오른 소년이었다.
적사마적단의 습격으로 표사들을 모두 잃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싸우다 큰 상처까지 입었다.
물과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기에, 어린데다 상처까지 입었던 소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그 소년에게 내 몫의 물과 전병을 모두 건넸다.
그 하루, 유일하게 배급받은 내 식량이었다.
그래도 기뻤다.
하루가 지나 부쩍 기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년 말고도 노부부도 있었고, 새색시도 있었다.
모두 상단 소속으로, 노부부는 마지막 상행에 나선 상단주 부부였고, 새색시는 막 혼인을 하자마자 비단길에 오른 젊은 상단주 남편을 따랐다가 적사마적단에 잡힌 것이라 했다.
그들의 사연이 너무나 기구하여 내 마음을 울렸다.
그래서 내 음식을 모두 나누어 주고, 몰래 내기까지 주입해 가며 그들의 기운을 북돋고 상처를 치료해 줬다.
마적단에 잡힌 모든 이들에게 그리했다.
며칠이 지나기도 전, 적사마적단에 잡힌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에게 따스한 미소와 인사를 건네는 이유였다.
그때는…… 그때는…… 행복했다.
(하략)
* * *
광천마제 시절과 똑같이 행동했다.
나는 물론, 천무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까지 자신의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마적단의 눈을 피해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보살폈다.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고 따스한 눈빛을 건넸다.
나는 아니지만, 천무휘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은 그런 그들의 감사와 눈인사에 한없이 감동한 얼굴을 했다.
-마 도사님, 오늘입니다. 마적단 놈들이 조금 전 돌아오는 걸 확인했는데, 평소에 비해 다섯 배나 많은 수확을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분명 오늘 마적단 전체에 큰 술판이 벌어질 것입니다.
제갈가단이다.
마적단에 잡힐 때 제압당한 마혈은 진즉 모두 풀어 주었다.
산공독의 독기 역시 사라진 지 며칠이나 됐다.
제갈가단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이제 내공 운용에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놈이 말한 대로, 오늘이 맞다.
적사마적단을 쓸어버리는 날.
-좋소. 계획대로 움직입시다. 마지막까지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마 도사님.
그렇게 우리는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의제와 한해북, 그리고 제갈가단을 비롯한 사남삼녀도 움직였다.
최대한 은밀히, 은형술을 극대로 펼쳤다.
이미 해가 저문 후, 우리가 종마상단 수레에 숨겨 두었던 도검을 되찾았다.
광천검도 내 손으로 돌아왔다.
제갈가단 등은 적들이 여기저기 흘린 병기를 훔쳐 움직였다.
나와 천무휘, 우리 둘이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중이다.
적사마적단은 광마일기에 적힌 대로, 또 낮에 제갈가단이 말했던 대로, 큰 술판을 벌였다.
집은 물론 만취하여 맨땅에 쓰러져 잠을 자는 놈들까지 수두룩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의제를 비롯한 이들이 움직였다.
조용히.
은밀하게.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적사마적단 놈들의 숨통이 끊어졌다.
한 시진이나 은밀한 살수를 펼쳤음에도 발각되지 않았다.
그사이 적사마적단의 숫자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뭐야! 뭐야! 경종! 경종을 울려라! 적이다! 죽었어! 죽었다고! 경종 울려, 미친 새끼들아! 어서 일어나!"
댕댕댕댕댕댕댕댕!
의제를 비롯한 이들이 적사마적단의 숨통을 육백 명 가까이 끊었을 때.
어떤 놈이 오줌을 싸러 나왔다가 동료들의 시체 더미를 보았다.
곧바로 적사마적단 내에 밤의 적막을 깨는 경종이 울려 퍼졌다.
사막에서 활동하는 놈들이라 그럴까?
만취한 상태로 세상모르고 자던 놈들이, 순식간에 살벌한 병장기를 들고 바깥으로 일제히 튀어나왔다.
"저기다! 저놈을 죽여라!"
"저 새끼도 죽여! 계집도 있다!"
채채채채채챙!
챙챙챙!
퍼퍼퍼퍼펑!
펑펑펑!
곳곳에서 숨 막힐 정도로 치열하고 또 잔혹한 싸움이 일어났다.
나와 천무휘는 경종이 울릴 때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두목, 천무휘가 부두목.
적사마적단의 두목 혈수만기 서석은 초절정 고수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
이미 광천마제 시절, 내 광천검으로 놈의 목을 베어 본 경험이 있지 않겠는가.
절정 고수인 부두목은 천무휘의 상대가 애초에 되지 않을 테고.
하지만 싸움을 곧바로 끝낼 수는 없다.
날이 밝을 때까지, 광천마제 시절의 그때와 같은 시각 놈들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쾅!
사방 곳곳에서 싸움이 일었지만, 역시 가장 치열한 싸움은 나와 두목의 싸움이었다.
하!
이건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쉽지 않아 이렇게 목숨이 오락가락하며 전력을 다해 싸우는 중이다.
이거 진짜 자칫하다간 내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광천마제 시절 나는 어떻게 이 괴물 같은 놈을 상대로 싸워 이겼는지, 이해가 다 안 갈 정도였다.
결국.
-천 형, 계획 변경입니다. 부두목 얼른 제거하고, 나 좀 도와주시오. 이러다 내 목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전음이 다 끝나기도 전.
천무휘가 부두목 반월쌍도 타미르의 목을 베고 나에게 합류했다.
녀석이 합류한 후에야 나도 여유가 조금 생겼다.
광마일기에 두목 녀석의 무력이 이렇게까지 강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 부분은 수정을 해야겠다.
아무튼 여유가 좀 생겨 주위를 둘러봤다.
의제와 한해북, 그리고 제갈가단 녀석들.
거기에 다쳤던 표사들도 대부분 다친 몸을 이끌고 적들과 싸우고 있다.
쟁자수들이라고 어디 그냥 싸움에 싸 자도 모르겠는가?
본래의 직분이 짐을 나르고 옮기는 일이라지만, 중원의 상행도 아닌 먼 서역까지 오가는 상행에 오른 닳고 닳은 노련한 쟁자수들이다.
그 정도 되면, 최소한 호신용이라도 삼재검법이나 팔방도법 정도는 익히고 있다.
그들까지 일제히 힘을 더해 마적단과 열심히 싸움을 치르는 중이다.
사실, 광천마제 시절 의제는 부두목을 상대했다.
고수의 끝자락이었던 의제로서는 절정의 고수였던 부두목을 상대로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
해가 뜰 때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였다.
뭐, 결국 내가 두목의 목을 베고 의제를 도와 부두목까지 해치우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번엔 의제가 부두목이 아닌 마적단 무리에 들어가 대도를 휘두르고 있다.
거기에 한해북까지 가세를 했고.
광천마제 시절의 싸움은 팽팽했지만, 이번엔 거의 압승에 가깝다.
만약 지금 나와 천무휘가 두목 녀석의 목까지 베어 버린다면, 그 승리는 더 확실해질 테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 * *
-천 형, 지금입니다.
-네, 마 형. 제가 놈의 눈을 가릴 테니, 마 형이…… 어?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때를 알리자, 천무휘가 어떻게 싸울지 내게 전음으로 보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이미 적사마적단의 두목 서석은 싸울 의지마저 꺾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도망가려는 것을 나와 천무휘가 지금껏 죽지도 못하고 도망도 못 가게 붙잡아 둔 것이다.
이미 다른 마적단은 대부분 죽었고, 일백 명 정도는 도망을 가 버린 상태였다.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겠다! 지옥으로 떨어져라!"
내 외침.
곧 광천검에서 검붉은 검강이 뿜어져 나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적사마적단의 두목은 그렇게 천참만륙이 되어 죽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제갈 대협 만세! 황보 대협 만세!"
"백리한고 소가주님의 활약이 컸다! 백리세가 만세!"
"모용세가 만세!"
"수룡검 천무휘 대협 만세!"
"고맙습니다, 마 도사님!"
"곽 대협 만세! 한해북 대협 만세!"
사막마저 모두 뒤덮을 것 같은 엄청난 환호와 갈채는 끊이지 않았다.
죽거나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할 자들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됐는데, 그 기쁨이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소년 변아학이 아픈 몸을 이끌고 내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남편을 잃은 새색시도 눈물을 흘리며 연신 허리 숙여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또 마지막 상행을 나섰다가 마적단에 잡힌 노부부.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모두가 기쁨과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기! 저기에 일단의 무리가 옵니다!"
누군가의 외침.
뜨거웠던 함성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모래사막 위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수백의 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말을 달려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잔뜩 긴장하여, 병장기를 다시 움켜잡았다.
곧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자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의복을 입고 있다.
한 무리가 아닌 여러 무리, 그것도 여러 상단이 합쳐져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사막의 먼 길을 떠날 상단이라면, 으레 낙타를 탔을 것.
하지만 저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다.
그것도 모두 손에 검을 쥐고, 엄청난 기운까지 뿜어 대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백리세가다.
조금 전 싸움에서 도망갔던 마적단 중 한 놈이 저들에게 잡혔고, 이 소식을 접한 백리세가의 구원대가 곧바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했다.
"숙…… 큰 숙부님! 작은 숙부님!"
"한고야! 한옥악! 무사한 것이더냐!"
백리세가의 일장로 시류검(矢流劍) 백리명손과 이장로 냉호섬월(冷虎閃月) 백리춘성이 백리세가의 삼대무력대 중 두 개인 폭성검조대와 백화유무대를 이끌고 왔다.
총 삼백여 명.
세가의 소가주를 구하기 위해 백리세가의 핵심 전력을 모두 투입한 것이다.
이들이 도착하자 백리한고와 백리한옥은 눈물을 뿌리며 백리명손과 백리춘성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이들을 품에 안은 백리세가의 두 노고수도 어느새 눈시울이 붉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더 든든한 전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모두가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안전할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였다.
분명 그렇게 해야 했다.
그랬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두 조카가 숙부들 품에 안겨 감동적인 해후를 하고 있을 때.
그들 사이로 하나의 인영이 빠르게 다가갔다.
제갈가단이다.
개새끼.
그리고 이내 전음으로 무언가 빠르게 백리명손과 백리춘성을 향해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곧 황보 놈들과 모용 계집들까지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다시 곧, 무언가 전음으로 빠르게 또 많은 대화를 잇는가 싶더니, 백리명손과 백리춘성의 시선이 어느새 나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곧!
빌어먹을 새끼들.
백리명손이 내공까지 실어 백리세가의 두 무력대에 명령을 내렸다.
"저 마두들을 포위하라!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처처처처처처처처척!
백리명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폭성검조대과 백화유무대 삼백여 명이 움직였다.
나와 의제, 천무휘, 한해북.
우리를 포위하고 검을 겨눈 것이다.
난 기회를 줬다.
하지만 제갈가단과 그 떨거지들이 그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퉤!
찢어 죽일 연놈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저기 있는 저자들. 마두들입니다! 마룡검, 사도신마, 우각도마, 그리고 잔혹마 한해북!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사막으로 도주를 한 극악무도한 마두들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제갈가단의 외침.
조금 전까지 우리 곁에 몰려 연거푸 감사함을 표하던 사람들이 곧바로 겁에 질려 멀찍이 자리를 피했다.
소년 변아학도.
갓 혼인했다 마적단에 남편을 잃은 새색시도.
또 마지막 상행을 떠났다가 이곳에 잡혀 온 노부부까지.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마두였어? 저치들이? 그렇게 안 보이던데?"
처음엔 이랬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의 두 번째 반응도 이랬다.
"맞다. 그런데 마적단이 감시를 위해 간자를 우리 틈에 섞어 놨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어?"
시간이 조금 지나 세 번째 반응은 이랬다.
"흥! 난 저놈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네 번째 반응이었다.
"저 새끼. 저 가운데 있는 마두 놈 있잖아. 아까 싸울 때 봤어? 막 칼에서 검붉은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데, 분명 마공이라고. 마교의 마공이라니까!"
"맞아. 사악하기 그지없었어. 또 손속은 얼마나 잔인했다고. 마두 맞아!"
다섯 번째 반응과 여섯 번째 반응은 주로 이러했고.
"저치들이 마적단과 내통하는 것을 누가 봤다고 했습니다!"
일곱 번째 반응은 내 피를 거꾸로 치솟게 했다.
"죽여라! 마두들을 죽여라! 마적단과 한패다! 죽여! 죽여라!"
"내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 죽여라! 죽여!"
"백리세가의 협객님들! 마두들을 처단해 주세요!"
"죽여라! 때려 죽여!"
우리에게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고, 침을 뱉으며, 돌을 던졌다.
새색시는 눈을 감고 우리를 모른 척했다.
노부부는 등마저 돌려 버렸다.
그리고 변아학.
소년은 어느새 사람들 틈에 섞여 나와 우리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됐다.
시험은 끝났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더 이상 기회는 없다.
모두 살려 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게 됐다.
잘 가라.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