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70화 (70/245)

70화

<<광마일기>>

(상략)

어리석은 초짜 행주 덕분에 종마상단에 합류하고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이 왔다.

적사마적단이라 했다.

오십여 기의 말을 몰아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우리를 포함한 종마상단 전체를 포위했다.

순간 갈등했다.

저놈들을 다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 번뜩!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수십 년 동안 중원 무림의 무림맹이나 구파일방, 오대세가 같은 곳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는 놈들 아니겠는가?

놈들의 은거지 역시 알려지지 않았고.

그거라 생각했다.

놈들에게 일부러 잡혀간 후, 적사마적단을 통으로 접수한다는 생각.

멋지지 않은가!

그때는 그랬다.

내 머리가 의외로 좋다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략)

* * *

"하하하! 이 선배님 말만 잘 듣고 따르면, 아무리 이곳이 사막이라고 해도, 그 어디보다 안전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친히 자네들에게 전수해 주겠…….

휘이이이이이이이익!

최고참 쟁자수 장 씨가 한참 신이나 우리를 향해 허세를 부릴 때.

종마상단의 선두에서 위급한 경고를 알리는 호각이 울렸다.

우리와 종마상단의 쟁자수, 표사들은 곧바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수레를 한가운데로 모으고, 쟁자수들이 이를 바싹 붙어 지켰다.

또 행주와 표두 그리고 표사들이 그런 수레를 적들로부터 지키는 형태의 진을 펼쳤다.

곧, 광마일기에 나왔던 그대로 오십여 기의 마적들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우리를 포위했다.

온통 붉은빛의 피풍의를 걸친 마적들이었다.

"행주님, 어떻게 할까요? 상대는 적사마적단입니다. 통행세 정도로 저들을 순순히 되돌려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그럼…… 그럼 어떻게 해?"

선두에서 빠르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행주와 표두다.

하지만 이미 결론은 난 듯하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표두와 달리, 무리의 수장인 행주는 이미 두려움이 극에 달해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싸우거나 순순히 저들에게 잡히거나."

"왕 표두, 왕 표두. 싸우면, 싸우면 이길 수 있어? 자신 있어?"

"가능성은 절반…… 솔직히 그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다른 마적단이라면 몰라도, 적사마적단이라면…… 힘듭니다."

왕 표두의 말에 행주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푹 숙인 그가 말에서 내렸다.

다시 이내.

터벅터벅, 홀로 우리를 포위한 마적단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걸어갔다.

툭.

결국, 그가 마적단의 수장에게 무릎 꿇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오체투지를 했다.

"푸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 목숨 귀한 줄 아는 놈이구나. 크하하하하! 뭣들 하느냐! 표두와 표사들에게 약을 먹이고, 쟁자수 놈들을 시켜 수레를 옮겨라!"

"넵!"

무리의 수장인 행주가 항복을 표했기에, 반항하는 표사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표두와 표사들은 마적단이 건넨 환단을 꿀꺽 삼켰고, 우리를 포함한 쟁자수들은 서둘러 마적단이 시키는 곳으로 수레를 옮기기 시작했다.

"장 형,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의제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수레를 끌며, 앞에 있는 최고참 장 씨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장 씨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미, 미안하네. 이젠 다 글렀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시게들. 적사마적단에 잡히면 둘 중 하나밖에 없네. 예외 따윈 없어. 죽거나…… 서역 먼 나라의 노예로 팔려 가거나."

"입 닥치고 어서 수레나 끌어!"

찰싹!

찰싹!

말 위에 탄 마적단이 장 씨를 향해 채찍질을 했다.

곧바로 장 씨의 옷과 피부가 찢겨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장 씨는 묵묵히 다시 수레를 끌기만 했다.

이를 보는 다른 쟁자수와 표사들의 분위기가 한껏 침울해졌다.

* * *

<<광마일기>>

(상략)

지금 쓸쓸히 죽어 가며 광마일기를 쓰고 있는 내 기분이 참 엿 같다.

의제와 둘이 밤새도록 신나게 술 퍼마시던 일상이 그립다.

아니지, 죽긴 왜 죽어.

현경의 고수만 된다면, 살 수 있다.

복수도 할 수 있고.

그렇지.

맞다!

생각났다.

이 년 전,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의제와 밤새도록 술판을 벌였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젊었던 시절, 몽고의 사막에 갔을 때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 의제가 먼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둘 다 술에 잔뜩 취해 몽고의 사막에서 적사마적단 놈들에게 잡혀 개고생했던 이야기를 했다.

나야 뭐 워낙 오래전 일이라 술안주 삼아 이야기를 이어 갔지만, 의제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분노가 극에 달한 모습이었다.

내가 어떻게 만류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의제였다.

그날 새벽, 의제는 결국 만취한 상태로 자신의 대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 사패천의 고수 이천 명을 긴급 소집 했다.

의제가 사패천의 고수 이천을 이끌고 사막 원정을 떠난 게 바로 그날이다.

의제와 이천의 사패천 고수는 다섯 달 후에나 돌아왔다.

몽고 사막에 산재하는 마적단 서른한 곳을 모두 쓸어버리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것이다.

(하략)

* * *

"형님, 우리 좆 된 것 같은데요?"

의제가 평소의 그 못생긴 얼굴로, 한껏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의제만 그런 게 아니다.

천무휘와 한해북도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사막.

동서남북 보이는 건 오로지 모래사막뿐이었다.

적사마적단에 잡혀 끌려가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배고픈 건 둘째치고, 목이 너무 말라 다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때.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얕은 모래언덕, 그것을 넘었더니 그곳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작은 도시?

커다란 마을?

아무튼 엄청났다.

불과 조금 전까지, 그러니까 얕은 모래언덕을 넘기 전까지 이곳에 이런 게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흙으로 지은 집만 수백 채에 달했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만 일이천에 달했다.

이러니 관이고 무림이고 이놈들을 찾지도 잡지도 못했던 것이리라.

아무튼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광마일기에 적힌 그대로, 순순히 칼을 쓰는 마적의 숫자만 세어도 일천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뭣들 하느냐! 어서 수레를 끌어!"

찰싹!

찰싹!

적사마적단 본진의 규모에 다들 놀라 멈칫하자, 어김없이 채찍 세례가 쏟아졌다.

그렇게 우리는 적사마적단 본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 * *

"표사 놈들은 이쪽! 여기에 줄 서! 새끼들아, 빠릿빠릿 움직이지 못해!"

찰싹!

찰싹!

아까 마적단 놈들에게 잡힐 때 이미 환(丸)으로 된 산공독을 복용한 표사들이다.

거기에 두꺼운 밧줄로 단단히 몸까지 포박당했다.

또 틈만 나면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물리적은 물론, 정신적으로까지 그들을 압박하려는 행위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적사마적단 본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다시 마혈을 제압당했다.

심지어 세 명은 별 반항도 하지 않았는데, 목이 베여 죽었다.

본보기다.

공포심을 심어 주는 것이고.

내가 낭인 표사가 아닌 쟁자수로 종마상단에 합류한 이유이기도 했다.

표사들에 비한다면 우리를 포함한 쟁자수들은 나름 편했다.

마적단 스스로 우리가 자신들의 위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특출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따로 구속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마혈까지 완전히 제압된 표사들과 함께 우리는 지붕도 없고 얕은 담으로 길게 둘러싸인 장소에 갇히게 됐다.

사실 말이 가둔 것이지, 이건 어린아이도 뛰어넘을 높이의 담장이 전부다.

하지만 아무도 그 얕은 담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린 마치 우리에 갇힌 가축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종마상단 무리의 수는 마흔이 조금 넘었다.

그리고 우리가 갇힌 곳에는 이미 사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잡혀 있었다.

하나같이 겁에 잔뜩 질리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들이었다.

우리가 새로이 합류하였음에도, 그 누구 하나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사막의 깊은 밤이 찾아왔다.

뜨거웠던 낮과 달리 사막의 밤은 매서웠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끼리 몸까지 맞닿고 기댄 후에야 그나마 조금의 추위를 견디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잠든 시각.

나와 천무휘, 의제, 한해북은 은형술을 극대로 펼쳐 사람들 사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접근할 목표는 진즉 포착한 상태다.

우리와 함께 잡힌 인질들은 물론, 이곳 마적단 모두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린 후에 움직인 것이다.

* * *

꾀죄죄한 몰골의 사남삼녀가 한데 몰려 쪼그린 상태로 잠을 자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의제와 한해북이 경계를 섰고, 나와 천무휘가 그들에게 바싹 다가갔다.

사남삼녀는 얼마나 심신이 지쳤는지, 아무리 마혈을 제압당했다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혔다는 놈들이 우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툭툭.

결국 그들 중 한 녀석의 팔을 내가 툭툭 쳤다.

"누……."

-쉿! 조용하시오.

마혈을 제압당했기에 상대는 전음을 보낼 수 없었다.

곧 내가 깨운 이가 그 옆의 이들을 깨웠고, 다시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을 깨웠다.

사남삼녀의 젊은것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나와 천무휘 그리고 경계 서는 의제와 한해부까지 보는 순간이었다.

-잘 들으시오.

내가 공동 전음을 보냈음에도, 이 멍청한 연놈들은 잠에서 덜 깼는지 눈만 껌뻑껌뻑한다.

-들었으면 고개라도 좀 끄덕여 주시오.

다시 전음을 보내자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 놈만 빼고.

제갈세가의 종자다.

이놈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또렷한 눈으로 우릴 경계하고 있다.

-난 현화문의 마악치라 하오.

-천무휘라 합니다.

"헙!"

"허걱!"

-조용하라고!

역시 천무휘가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세 명의 여인에게서 곧바로 반응이 왔다.

내가 눈까지 부라린 후에야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그녀들이었다.

-적들은 우리가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모르고 있소. 마적단 놈들이 우릴 잡을 때 없애 버릴까 싶었지만, 혹시 인질이 또 있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잡힌 후 이곳까지 와 봤더니, 상황이 이렇소. 생각보다 규모가 커 적들의 전력을 파악한 후 행동하려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소?

내 말에 다들 다시 격하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제갈의 종자가 마른 나뭇가지를 집어 땅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갈가단, 제갈세가 양원검풍(亮遠劍風)의 장자’

놈의 소개에 천무휘가 순간 미세하지만 움찔했다.

철천지원수까지는 아니어도, 우리와 분명한 적대적 상황에 놓인 제갈세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갈가단은 주저함 없이 자신을 소개했다.

다 이유가 있다.

놈은, 아직 우리와 제갈세가 사이의 일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놈은 자신의 숙부, 그러니까 삼장로 제갈세진이 우리 손에 죽었는지도 현재는 모르고 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제갈세가 일장로님의 장남이셨군요.

내 전음에 제갈가단이 고개를 두 번 끄덕인 후, 다시 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백리세가 소가주 백리한고, 여동생 백리한옥’

‘모용향인, 모용향윤, 모용세가주의 둘째와 셋째 딸’

‘황보대웅, 황보대랑, 황보세가 삼장로 장남과 차남’

-혹시나 해서 왔더니, 역시 모두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시군요.

내 전음에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피접이 상골하고 꾀죄죄한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들이었다.

* * *

<<광마일기>>

(상략)

제갈세가주의 팔다리를 분질러 버렸다.

일장로와 일장로의 아들은 아예 단전을 파훼시켜 버렸고, 근맥까지 모두 잘라 버렸다.

울음바다가 됐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제갈 성씨를 가진 어린놈들을 죄다 끌어와 매질을 했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수하들을 시켜 때리게 했다.

역시나, 금 형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중략)

앞서 한 번 언급했지만, 그때 내가 제갈세가주도 아닌 제갈세가의 일장로와 그 아들의 단전을 파훼시키고 근맥까지 모두 잘라 버린 것은 금 형의 일 때문만은 아니다.

사막에서의 악연이, 제갈가단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극도의 분노로 치밀었기 때문이다.

(하략)

* * *

내가 사막에 온 이유.

이들과 나의 악연.

아니, 이곳에 잡힌 모두와의 악연을 끊기 위함이다.

아니, 시험이다.

그리고 기회다.

여기에 있는 모두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만약, 내가 한 번의 기회를 더 줬음에도 똑같이 행동한다면, 난 다시금 광천마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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