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69화 (69/245)

69화

사흘이 지나 절강 항주의 위화궁에서 한 마리 매가 날아왔다.

전서구도 아닌 전서응으로 돌아온 답신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부의 글씨였다.

놀랍게도 사부 말고 무적 할매도 함께 서신을 보내왔다.

아미파와 하오문의 관계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까운 듯한 모양이었다.

뭐, 사실 따지고 올라가면 위화궁의 시조가 풍화사태라는 검후였고, 풍하사태는 다시 보타암 출신이고, 보타암이나 아미파나 여승으로만 구성된 불문의 문파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좀 억측이기도 하겠지만, 두 문파가 세상 모르게 가깝게 지내고 있는 여러 인연과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사부는 당연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더불어 무적 할매는 예지의 무공 수련을 도와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는 내용을 서신에 담았다.

말은 예의를 갖추어 허락을 구하는 형식이었으나, 실상은 아미파에서 오는 손님이라 할 수 있는 금예지를 궁주인 무적 할매가 직접 보살피고 돕겠다는 뜻이다.

아미파의 장문인과 장로들도 이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하였다.

절강 항주로 떠나려 준비하고 있는 예지의 물품에 아미파의 영약과 보검 등 위화궁에 전할 여러 귀한 선물이 가득 담긴 이유였다.

아미파에서는 특별히 오장로와 두 명의 이대 제자를 예지의 먼 길에 동행시켜 주었다.

그렇게 예지는 이튿날 아미파를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의 첫사랑을 떠나보내며…….

"형님…… 끄어어억. 엉엉엉. 끄어어억. 엉엉엉."

의제가 꺼억꺼억 울었다.

아놔, 내 동생이라지만 정말 못생겼다.

이미 예지는 저 멀리, 하나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의제의 오열은 멈추지 않았다.

"힘내,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내가 약속하지. 알잖아, 나 신통력 대단한 거."

그렇게 의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준 후 몸을 돌렸다.

우리도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하기에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

우리 숙소 뒤뜰의 수풀이 들썩이는 것을 감지했다.

짐승?

아니다.

사람의 기운인데, 극도로 그 기운을 갈무리하며 억제하고 있다.

뭐지?

우리를 감시하는 자가 있었나?

"네 이놈!"

호통과 함께 몸을 날렸다.

"허걱! 천…… 천 형…… 여기서 왜 이러고……?"

천무휘다.

예지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환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손을 흔들었기에, 이 녀석은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뒷마당 수풀 뒤에 잔뜩 쭈그려 앉아 숨어서.

"끄어어어억. 엉엉엉엉. 끄어어어어억. 엉엉엉엉."

자신의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그걸 또 입으로 쑤셔 넣어 터져 나오려는 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 수풀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나에게 걸린 건데.

그냥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됐고 또 쑤셔 넣은 주먹과 입 사이로 침은 주르르 흐르고.

쭈그려 앉은 상태로 놀란 눈을 떠 나를 보는데, 참.

가관도 보통 가관이 아니었다.

"힘……내쇼, 천 형.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슬픔과 놀람, 침, 눈물, 콧물, 쭈그린 자세 등등.

아무튼 내 말에 천무휘가 격하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주먹은 좀 입에서 빼고 고개를 끄덕이던가.

난 아무것도 못 본 척, 그렇게 등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아!

역시 한해북.

방에 들어서자마자 의젓한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녀석도 첫사랑을 보내며 그 기분이 우울할 텐데, 그래도 묵묵히 짐을 챙기고 있는 중이다.

난 그런 녀석이 기특해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으며 불렀다.

"한 형, 한 형은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듬직해서 좋습…… 허걱!"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어깨의 들썩임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고 어깨를 잡으며 그를 부른 그 순간.

녀석이 고개를 돌렸는데.

아나!

얼마나 울었는지 눈탱이는 밤탱이가 되어 있고, 천무휘의 두 배가 넘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침이 한데 어우러져 목 아래의 옷까지 끈적끈적 적시고 있었다.

이 새낀 제정신이 아니다.

위험하다.

진짜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씌운 줄 알겠다.

아!

진짜 다들 심각하군, 심각해.

이러다 나까지 돌아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서둘러 숙소에서 나왔다.

그렇게 난 정처 없이 걷다가 그곳에 도착했다.

우리 예지와 그녀의 사부가 지내는 초가.

하지만 이제 예지는 없다.

그녀의 사부, 윤화 사니만 홀로 마당 한가운데 앉아 쓸쓸한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윤……화…… 사니…… 사니님…… 끄어어어어억! 엉엉엉엉! 우리 예지! 엉엉엉! 우리 예지! 엉엉엉!"

난 그날 윤화 사니의 품에 안겨 한참이나 울었다.

* * *

<<광마일기>>

(상략)

이때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수룡검 천무휘의 죽음으로 화산파에 쫓긴 기간만 반년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호북 위산 순양자의 비동 사건으로 제갈세가와 무당파에서까지 우릴 쫓기 시작했었다.

십 개월 가까이 도주를 하며 숱한 위기도 겪었다.

나와 의제의 도검에 목숨을 잃은 자들의 수만 삼백이 넘었다.

우리라고 멀쩡할 순 없었다.

온몸에 상처 아닌 곳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열 달이나 지났음에도 우리들의 첫사랑 금 형을 사지에 홀로 남겨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슬픔은 조금도 치유되지 않았었다.

아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아픔은 깊어져만 갔다.

놈들을 향한 나와 의제의 칼이 날이 갈수록 잔인해지는 이유였다.

(중략)

스물두 살의 생일을 몽고의 초원에서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됐다.

중원에서, 더 이상 화산과 제갈 그리고 무당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잠시 새외로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의제와 둘이 우릴 쫓는 놈들이 없는 곳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수련에 임할 계획이었다.

힘을 키워 복수한다는 뜻을 품었었다.

무적의 고수가 되어 돌아와, 우리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우리들의 첫사랑을 죽인 놈들에게 피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곧 커다란 문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돈이 없는 건 둘째치고.

그곳 초원, 중원과 몽고의 경계에서 한참을 더 벗어나야 안전할 수 있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전혀 몰랐다.

결국 우리는 비단길을 오가는 상단에 합류할 생각을 했다.

그들을 따라 최대한 중원에서 먼 곳으로 간 후, 무적의 고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계획이었다.

낭인 표사로 소개를 하고 여러 상단에 몸을 의탁하려 시도했었다.

하지만 낯선 우리를 받아 주는 상단은 아무 곳도 없었다.

(하략)

* * *

"죄송합니다. 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천무휘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와 우리에게 사과했다.

이로써 천무휘만 다섯 번째 실패다.

의제는 두 번 만의 시도 끝에 아예 포기해 버렸다.

한해북도 네 번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다.

세 녀석 다 시무룩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이곳은 중원과 몽고의 경계, 비단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상당히 큰 규모의 대철객잔이란 곳이다.

비단길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상단들 대부분이 거치고 묵는 객잔이다.

규모가 꽤 큰 객잔임에도, 몇 개의 상단이 동시에 몰리는 바람에 이곳이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객잔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우리 녀석들이 연이어 실패한 것은, 본격적으로 비단길로 떠나려는 상단에 합류하려는 시도다.

"아무래도 먼 길, 그것도 중원이 아닌 새외로 일 년 넘게 떠나야 하는 여정이라 낯선 우리를 받아 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무휘가 풀이 죽은 얼굴로 나름의 현 상황을 분석해 말했다.

한해북과 의제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무휘의 말에 동조했다.

이미 겪어 본 일이다.

아니, 광마일기에서 읽은 내용과 같다.

곧 의제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쟁자수 말고 그냥 표사로 끼워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우리 실력 살짝 보여 주기만 해도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일 텐데요."

그렇다.

우린 어설픈 쟁자수로 변용한 상태다.

뭐, 변용이라고 해 봤자 옷만 허름한 걸로 갈아입은 게 전부지만 말이다.

물론 천무휘는 얼굴에 숯이랑 흙을 많이 칠해야 했다.

광천마제 시절의 나와 의제는 낭인 표사로 상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좋지 않다.

광마일기를 읽고 고심한바, 표사 보다는 확실히 쟁자수가 눈을 속이는 데 더 낫다는 내 판단이다.

"조금만 기다려 봐. 이제 곧 올 거야."

"뭐가 와요, 형님?"

"우리를 받아 줄 상단."

"그런 게…… 있었어요?"

의제는 물론 천무휘와 한해북까지 황당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한 시도가 모두 개고생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미안. 하지만 다른 상단에 아무 시도도 하지 않다가, 우리가 원하는 상단만 콕 집어 합류시켜 달라고 하면 더 의심받을 수 있잖아. 그러니 헛일했다고 생각하지들 말라고."

이미 계획은 모두 설명해 주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미래의 일.

그것을 설명하고 또 어떻게 대처할지까지 다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의제는 물론 천무휘와 한해북까지 일말의 의심도 또 질문도 하지 않았다.

절대적 신뢰다.

그렇게 우리는 대철객잔에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철객잔의 가장 늦은 손님들로, 이곳으로 오는 도중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난 표사와 쟁자수 몇 명을 남겨 두고 부족한 인원으로 간신히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이곳에 도착한 이들이었다.

종마상단이다.

상단을 이끄는 행주 역시 비단길을 홀로 이끄는 것이 초짜인 자였다.

그들이 도착한 후 내가 움직였다.

의심의 눈초리를 나와 우리에게 조금 보내긴 했으나, 광마일기에 적힌 그대로 어렵지 않게 상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마상단 표두와 표사들의 눈을 속여, 우리의 병장기를 상행의 물품에 숨길 수 있었다.

표두가 고수 초입이고, 일류가 두 명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류 표사들이었다.

그들의 눈을 속이는 일 따위는 조금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우리는 종마상단에 쟁자수로 합류하여 비단길로 떠날 수 있었다.

* * *

대철객잔을 떠나 하루 만에 초원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졌다.

객잔에서 봤던 그 많던 상단들도 보이지 않았다.

동서남북, 보이는 것은 우리와 뜨거운 모래뿐이다.

그렇게 다시 사흘을 더 움직였다.

"자네들 이번 상행이 처음이라고 했지?"

"네, 어르신."

"어르신은, 하하. 같은 쟁자수끼리 그냥 편하게 해. 장 형이라고 부르라고. 내가 좀 들어 보여도, 자네들하고 몇 살 차이도 안 날 거야."

"네, 장 형."

의제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대단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푹푹 꺼지는 모래를 걷는 건 정말 죽을 맛이다.

행주와 총관 그리고 표두와 표사들은 말과 낙타를 탄다.

하지만 쟁자수들은 모두 걷는다.

무공을 익힌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무공에 무 자도 모르는 노인네 기운이 넘친다.

쟁자수들의 최고참이다.

사흘 동안 다른 쟁자수들과는 많이 친해졌다.

하지만 노련한 최고참 쟁자수 장 씨는 오늘에야 처음으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사흘간 우리를 의심하며 감시했던 것이다.

인력이 부족하다고 훌쩍 우릴 상행에 합류시킨 행주보다 훨씬 더 노련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그런 그도, 이제는 우릴 어느 정도 신뢰하는 모양이다.

우리를 보는 시선 또한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네 사막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게 뭔지 아는가?"

"물 아닙니까? 아니면 열사병이요?"

의제가 답했으나, 장 씨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나 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네."

"그럼 무엇입니까?"

"사람이지."

"아……."

얕은 탄성.

이건 비단 의제만이 아니라 나와 천무휘, 한해북에게서도 동시에 터져 나온 탄성이었다.

역시 언제 어디서나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리라.

"자네들 녹적쌍마(綠赤雙魔)라고 들어봤나?"

이젠 의제가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해 묻는 장 씨였다.

우리는 힘겹게 모래 위를 걸으면서도, 장 씨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장 씨가 얼굴에 슬쩍 우쭐한 미소까지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 사막 위의 가장 강력한 두 마적단을 일컬어 녹적쌍마라 부른다네. 각각 녹주마적단(綠州馬賊團)과 적사마적단(赤沙馬賊團)이라고 부르지."

우리가 그의 말에 집중하자 장 씨는 미소를 더 짙게 그리며 말을 이었다.

"녹주마적단은 중원의 산적이나 수적과 비슷해. 이곳 비단길을 점령하고, 오가는 상단에 오랜 관례에 따라 정해진 통행세를 받는다네. 가끔 길을 잃거나 물이 떨어졌다든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상단을 보면 돈을 받긴 하지만 제대로 도와주는 마적들이라네. 그래서 상인들도 존경의 의미를 담아, 녹주마적단의 두목을 향해 중원 무림의 예법으로 포권을 하고 대협이란 칭한다네."

"오, 제법 괜찮은 마적 놈들이군요."

"허허, 그렇지. 그런 마적만 있으면, 이 일도 꽤 해 볼 만하지."

"그럼 적사마적단은 안 그런가 보죠?"

"사막의 모래를 피로 물들인다고 해서 그 이름도 적사마적단 아니겠는가?"

"어이쿠, 무섭네요."

의제가 제법 연기를 할 줄 안다.

그러자 장 씨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적사마적단은 악명이 자자해. 그냥 보이면 다 털어. 반항하면 다 죽이고. 산 사람은 끌고 가서 서역에 노예로 팔아 버린다네."

"무시무시한데요?"

의제가 진짜 겁이라도 먹은 얼굴로 몸까지 한 차례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러자 장 씨가 한껏 우쭐거리며 말했다.

"하하, 염려 마시게.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적사마적단의 영역이 아니라 녹주마적단의 영역이니 말일세.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세. 괜히 경험이 필요하고 선배를 존경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네. 이게 다 연륜이지, 하하하하!"

사실 장 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의 말대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만나는 마적단은 녹주마적단이 아니라 적사마적단이다.

0